누구를 위한 ‘국정 교과서’ 되살리기인가
9월이면 한국사 교과서를 다시 국정화할지 여부가 결정된다. 황우여 교육부 장관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등의 발언을 보면 정권 차원에서 이미 국정화 방침을 굳힌 듯하다. 하지만 이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세계적으로 전면적인 교과서 국정제를 운영하는 나라는 북한과 방글라데시, 몇몇 이슬람 국가뿐이다. 공산당 일당 체제인 중국도 우리와 같은 검정제다.
핀란드·프랑스·스웨덴·네덜란드 등 유럽에서는 검정제보다 더 나아간 자유발행제가 보편적이다.
긴 말을 하지 않더라도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정통성이 허약하고 억압적인 국가일수록 단일한 교과서를 선호하고, 자유가 충만한 나라일수록 다양한 교과서가 존재한다.
왜 그런지는 삼척동자도 알 것이다. 교과서 내용, 특히 역사를 정권의 입맛에 맞게 왜곡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험도 이를 뒷받침한다. 1974년 박정희 정권은 학자들의 반대를 누르고 한국사 국정 교과서 도입을 강행했다. 당시 교과서는 5·16 쿠데타 ‘혁명 공약’ 가운데 ‘민정 이양’을 약속한 대목을 왜곡함으로써, 자신의 약속을 깨고 장기집권에 나선 박정희 정권을 옹호했다. 이후 군사독재 시대의 교과서도 낯뜨거운 정권 찬양으로 얼룩졌다.
이런 식으로 정권의 입김이 교과서를 흔들면, 학생들은 시대와 정권에 따라 변색되는 역사를 배우며 극심한 혼란을 겪어야 한다.
가뜩이나 현 정부 들어 역사 왜곡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참이다. 2013년 뉴라이트 성향의 교학사 교과서가 교육부 검정에 합격해 논란이 일었다. 역사 왜곡과 수준 미달의 내용에 대한 비판이 커지면서, 결국 채택률은 0%대에 머물렀다.
최근에는 국사편찬위원회가 독립운동 및 친일에 대한 서술을 축소하는 교과서 집필기준을 만들었다고 한다. 국정화까지 이뤄진다면 역사 교과서가 어떤 모습이 될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 정권 때 도입했던 한국사 국정 교과서를 박근혜 정권이 되살리려 하는 것은, 실책의 반복이며 역사의 퇴행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사를 대입 필수과목으로 만들어 ‘단일한 교과서’의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것도 똑같다. 하지만 입시의 편의를 위해 역사 교육의 본질을 훼손할 수는 없다. 입시 측면에서 보더라도 과거처럼 단일 교과서의 지엽적인 내용까지 출제하기보다, 여러 검정 교과서에서 공통적으로 다루는 핵심 내용 위주로 출제하는 게 학생 부담을 줄인다는 지적이 설득력 있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는 말 그대로 백해무익일 뿐이다.
[ 2015. 8. 31 한겨레 사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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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은 왜 그토록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외치나
‘보수 대선주자’로 이미지 굳히기
밀어줬던 교학사 채택률 0%대
진보와의 1차 ‘역사전쟁’서 굴욕
“보수 대표성 확보 위한 대세몰이”
‘부친의 친일 의혹’ 지우기 논란
부친 친일행적 쏙 뺀 평전 나와
“친일 미화 말라” 비판받기도
교과서 국정화 총력지원 가능성
여권에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투톱’은 황우여 사회부총리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다. 김무성 대표는 교육부 수장인 황우여 부총리 못지않게 ‘통일된 역사 교육’이 필요하다며 대국민 여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김 대표의 ‘보수 본능’에 ‘대권 전략’이 맞아떨어진 결과라는 관측이 많다.
김무성 대표는 지난 20일 동국대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는 자리에서 “(현재) 어린 세대에게 부정적인 사관으로 쓰인 패배주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며 “대한민국 미래를 위해 통합·긍정의 역사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의지를 또다시 노골적으로 내비친 것이다. 비슷한 발언은 광복절을 전후로 사흘 건너 한번꼴로 반복됐다. “어린 학생들이 부정적인 역사관으로 쓰인 역사교과서로 우리 현대사를 배우는 것은 막아야 한다”(8월17일), “좌파세력이 준동하며 어린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역사관을 심어주고 있다”(7월31일)는 등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김 대표는 평의원이던 2013년에도 ‘역사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다. 친일 미화 논란을 빚었던 ‘교학사 사태’ 당시 그는 “좌파와의 역사전쟁을 승리로 종식시켜야 한다”며 ‘근현대사역사교실’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100명이 넘는 여당 의원들을 참여시켰다. 역사 왜곡·편향으로 지탄을 받던 교학사를 ‘국민 기업’으로 추어올리고, 교과서 집필자 등을 불러 직접 강연도 들었다. 그러나 떠들썩하게 공을 들였던 교학사 교과서의 채택률은 0%대에 그쳤고, 김 대표는 ‘좌파와의 역사전쟁 시즌1’에서 체면을 구겼다.
김 대표의 이런 행보에는 ‘대권 플랜’이 작용한 것 아니겠냐는 관측이 많다. 유창선 정치평론가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김 대표는 여론조사에서 (여권 차기 대선주자 선호) 1위를 달리고 있지만, (비박근혜계인) 그의 대권 행보에는 박근혜 대통령과의 (불편한) 관계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과격한 우편향 발언을 통해) 박 대통령의 승낙·동의가 없더라도, 스스로 보수 진영의 대선주자로서 대표성을 확보하려는 일종의 ‘대세 몰이’ 전략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친일 의혹이 제기되는 부친과의 연관성에 주목하는 시선도 있다. 공교롭게도 김 대표가 ‘좌파세력의 부정적인 역사관’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던 시기인 지난 15일에, 부친 김용주 전 전남방직 회장의 평전 <강을 건너는 산>이 출간됐다.
이 평전에선 김용주 전 회장의 친일 행적은 사라지고 사회공헌 활동만 부각돼, 야당으로부터 “아버지의 친일을 미화하지 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김 대표와 가까운 한 인사는 “그의 아버지는 친일파도 아니고, 역사 문제를 대권에 활용하려는 의도도 없는 걸로 안다”며, “지금처럼 보수·진보가 갈가리 찢어져 있으면 대한민국엔 미래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통합을 이뤄야 한다는 게 김 대표의 신념”이라고 강조했다.
다음달 ‘2015년 개정 교육과정 고시’에 앞서 교육부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최종 결정할 경우, 김 대표와 새누리당은 든든한 지원세력이 되어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새누리당 핵심 관계자는 “(지난달 22일 고위 당정청 회동에서) 황 부총리와 김 대표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걸로 안다”며, “정부가 (국정화에 대한) 입장을 최종 정리하면 정부와 여당은 한목소리를 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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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교과서 되면 부담 줄어든다?
[심층기획]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미신’을 깨자
‘하나의 역사’ 가르쳐야 혼란 없다?
정권 바뀔 때마다 ‘입맛대로 개정’…혼란 더 키운다
“역사는 하나로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한국사 수능을 치를 수 있다.”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여부를 묻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일관되게 내놓은 답변이다. 언론이 이를 국정화로 해석하면 교육부에선 “국정화를 한다고 밝힌 적이 없다”고 펄쩍 뛴다. 하지만 ‘하나의 역사’와 ‘수능 부담 경감’은 교과서 국정화를 주장하는 이들이 국정화를 정당화하려는 데 동원하는 핵심 논리다.
교육부는 9월 ‘2015 개정 교육과정’ 총론과 각론 고시 일정에 맞춰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여부를 결정한다. 지난 2년간 여론의 동향을 살피며 ‘국정화 군불 때기’에 주력해온 교육부가, 공식적인 결정을 더는 미룰 수 없는 결정의 순간이 임박했다. 역사학계와 교육계는 중대 고비를 앞두고, 국정화를 떠받치는 ‘미신’들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국정화 저지에 힘을 쏟고 있다.
5·16 쿠데타 6번째 ‘민정 이양’ 공약, 1979년판 내용 변조해 왜곡 수록
2013년 교학사 초판엔 아예 뺐다가, 학계 비판 일자 뒤늦게 추가
교육부, 내달 국정화 결정 땐 파문
■ ‘하나의 역사’를 가르쳐야 혼란이 없다?
전문가들은 ‘하나의 역사’를 가르치는 국정 교과서가 도입되면 학교 현장에 ‘최악의 혼란’이 현실화할 위험이 크다고 경고한다. ‘국가가 정리한 승자 중심의 단일 역사관’만을 가르치게 되는 근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5년 단임제인 우리나라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국사 교과서 내용이 바뀌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은 탓이다.
국정 교과서란 필자 구성, 집필, 수정·개편 등 모든 권한을 교육부가 가진 교과서다. 이런 사정을 고려할 때, 보수 정부 입맛에 맞게 만든 교과서를 진보 정부에서 그대로 쓸 가능성은 낮다. 진보 정부가 만든 교과서를 보수 정부가 그냥 둘 가능성은 더욱 낮다.
유신 시절 발행된 국정 교과서가 5·16 군사쿠데타를 왜곡한 선례를 보면 기우가 아니다. 원래 5·16 쿠데타 ‘혁명 공약’의 여섯째 항목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의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였다. 하지만 1979년판 중·고교 국정 국사 교과서에선 이를 ‘우리의 과업을 조속히 성취하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토대를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는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고 바꿔놨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민정 이양 약속을 뒤집고 대선에 출마하면서 변조한 항목을 그대로 교과서에 실은 것이다.
정권이 바뀌면 이전 정권 입맛에 맞게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교과서 내용은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학생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달라진 교과서로 배워야 한다. 심지어 몇년 간격으로 상반된 역사적 해석을 강요받을 수도 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국정 교과서도 전보다는 나으리라고 방심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2013년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교학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역사학계로부터 1979년판 국정 교과서보다 문제가 더 많다는 비판을 받았다.
예컨대 교학사 교과서는 논란이 되는 5·16 쿠데타 여섯째 항목을 아예 삭제하고, ‘혁명 공약’이 원래 다섯 항목인 것처럼 서술했다.
김육훈 역사교육연구소장은 30일 “유신 시절 교육부는 뻔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혁명 공약을 왜곡해 교과서에 실었다. 박근혜 정부가 북한과 비교당하면서까지 국정제를 도입하려는 걸 보면, 어떤 내용이 실릴지 걱정이 앞선다”고 말했다.
국정교과서로 수능 치르면 부담 준다?
여러 종일 때는 ‘공통핵심’ 출제… “하나일 때는 지엽적 내용도”
검정 교과서는 집필자 마음대로?
현재 검열체계도 ‘촘촘’…국정교과서 저리 가라
■ 검정 교과서는 집필자·출판사 마음대로 만든다?
현행 검정 교과서도 교육부의 검열 체계가 워낙 촘촘해, 굳이 국정 교과서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현실적인 자조도 나온다. 지금도 한국사와 윤리 등 사회 과목은 일반적 검정 체계에 더해 별도의 집필기준까지 준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집필자나 출판사가 교육부 기준에 어긋나게 교과서를 만들 여지가 거의 없다는 뜻이다. 현재 8종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살펴보면, 참고 자료나 이미지, 교과활동의 양과 종류의 차이 정도가 있을 뿐이다.
더구나 정부는 7월30일 발표한 ‘교과용 도서 개발 체제 개선 방안’을 통해, 검정 교과서 ‘검열 제도’를 더욱 엄격하게 정비했다. 기존 검정 교과서는 기초조사와 본심사를 거쳐 일단 합격 판정을 받았다. 이후 교육부의 수정·보완 권고 이행 여부를 확인받아 최종 합격했다. 그런데 강화된 심사 체제는 ‘전문 감수’를 이유로 본심사를 두 차례로 나눴다. 1차 심사에서 기준에 미달하면 불합격이다. 1차 심사를 통과해도 전문 감수를 거쳐 수정·보완 요구를 이행해 2차 심사를 받아야 한다. 2차 심사에서 교육부 요구를 이행하지 않으면 다시 불합격 처리된다.
방은희 역사정의실천연대 사무국장은 “검정제를 유지하더라도 이미 국가 통제가 최고 수준으로 강화됐다”고 짚었다.
■ 국정 교과서로 수능을 치르면 부담이 없다?
한국사는 201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부터 필수 과목이 된다. 일반의 생각과 달리, 현행 수능에선 국어·영어·수학도 필수가 아니다. 한국사만 필수다. 국정화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국정 교과서 하나로 통일해서 배우면 여러 개의 검정 교과서를 공부할 필요가 없고, 수능 시험 부담도 줄어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한국사를 가르쳐온 교사들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지적한다. 수능은 모든 수험생이 치르는 국가 수준 시험이다. 검정 교과서가 여러 종류라면 모든 종류의 교과서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핵심 내용 중심으로 문제를 출제할 수밖에 없다. 반면 국정 교과서 하나뿐이면 교과서 한 귀퉁이에 나오는 지엽적인 내용도 출제할 수 있다. 국정 교과서로 중·고교 역사를 배운 세대가 ‘태정태세문단세~’ 하는 식으로 조선 왕조의 임금 이름 순서를 필수로 외운 과거를 떠올리면 된다. 수험생 부담이 더욱 커지는 건 당연하다. 조한경 전국역사교사모임 대표는 “과거 국정 교과서 시절 국사 시험은 지엽말단적인 내용까지 공부해야 고득점을 받았다”며, “국정 교과서로 바뀌면 학생들은 재미없는 내용을 달달 외워야 하는 부담이 더 늘어난다”고 말했다.
■ 국정 교과서가 검정 교과서보다 우수하다고?
유신 시절에도 교육부는 국가가 발행을 책임지면 학계 연구 성과를 종합적으로 반영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국정제를 밀어붙였다. 하지만 실제 발행된 교과서를 들여다보면 결과물은 정반대였다. 정치적으로 편향된 내용이 주를 이뤘다. 비교 대상이 없고 채택 경쟁을 할 필요가 없어 질도 떨어졌다.
대다수 역사학자와 역사교사들은 국정화에 거세게 반대하고 있다. 국정화에 반대하는 역사학자들이 9월초 성명을 발표할 예정인데, 이미 780여명이 서명한 상태다. 초·중·고 역사교사들은 지난해 10월 1034명이 실명으로 국정화 반대 1차 교사선언을 했고, 9월초 발표될 2차 교사선언에 실명 서명을 한 교사가 벌써 1500명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역량있는 역사 전문가들이 국정 교과서 집필에 참여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미래엔 출판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자인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지구상에 좋은 국정 교과서라는 건 없다. 모든 선진국이 국정 교과서를 채택하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국정 교과서는 집필자 선정 단계에서부터 정부의 생각을 대변해줄 학자들 위주로 구성되고, 학문적 자율성도 보장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방지원 신라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최고의 역사 전문가들은 국가의 간섭으로 창의력과 학문적 깊이를 침해받으면서까지 굳이 국정 교과서를 쓰려고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