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 약해 못 막을 수 있지만, 국정화로 박근혜 몰락할 수도"
새정치민주연합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특별위원회 위원장인 도종환 의원의 사무실에는 수 십 권의 교과서가 쌓여 있었다. 학생이 오래 공부를 한 것처럼 옆면에는 때가 묻고 표지도 허름해진 모습이다. 지난해 <교학사>의 친일 역사교과서 논란 때부터 도 의원은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으로 많은 문제점을 제기했고, 결국 <교학사> 교과서는 일선 학교에서 거의 채택되지 못했다.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검정에서 국정으로 변경한다는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의 발표 다음날인 지난 13일 도 의원을 국회에서 만났다. 도 의원은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기 직전 문재인 대표 등 당 지도부와 함께 여의도역으로 대국민서명운동을 나갔다. 서명운동은 갑자기 나타난 어버이연합의 난입으로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도 의원은 "저렇게 하는데 무슨 국민통합인가"라며 개탄했다.
도 의원은 인터뷰에서 현행 교과서가 좌편향 돼 있다는 정부와 여당의 주장에 "그것부터가 거짓"이라며 "주체사상을 비판적으로 가르치는 게 지금의 교과서"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전쟁 역시 북한의 책임이라고 정확하게 기술돼 있다"라며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국민을 호도하고 있다"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황우여 부총리도, 김무성 대표도, 박근혜 대통령도 (교과서를) 안 읽어봤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친일미화-독재옹호) 역사교과서를 갖는 게 박근혜 대통령의 간절한 소원"이라며 "아버지의 명예회복이 정치적 목적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아버지 명예를 높이고 나면, 독립운동가의 명예는 땅에 떨어져도 괜찮나"라며 성토했다.
이어 "역사 교과서는 우리 민족의 집단 자서전"이라며, "있는 그대로 가르치고 그 속에서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게 역사 교육"이라고 강조했다.
▲ 어버이연합, 새정치연합 서명운동 현장에 난입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와 도종환 위원장 등 당 지도부가 13일 서울 여의도역에서 '친일독재미화 국정교과서 반대 대국민 서명운동'에 나서자, 어버이연합 회원들이 욕설과 삿대질을 하며 행사장에 난입했다. | |
ⓒ 공동취재사진 |
다음은 도 의원과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교학사> 교과서에서 국정으로, 정해진 시나리오"
- 황우여 사회부총리의 발표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우리 모두 역사에 큰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황우여 부총리뿐 아니라 그걸 막지 못하고 있는 우리도 큰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국정교과서가 '친일미화, 독재옹호' 교과서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정부가 만들고 싶어 하는 교과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증거가 있다.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라는 곳이 있다.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라는 발언을 한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위원장으로 있는 단체다. 여기서 지난 2011년에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분석한 자료를 냈다. 여기에 먼저 (식민사관 교과서를) 검정교과서로 진출시키고, 최종적으로는 필수과목으로 지정해 국정교과서로 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미 지난 2008년부터 그 같은 시도를 해왔다. '대안교과서'라는 이름으로 <한국 근현대사>(교과서포럼 저, 기파랑 출판사)라는 책을 만들었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교과서다. 자연히 김구는 테러리스트로 묘사되는 교과서다. 이런 시도를 바탕으로 이론적 정리를 해 <교학사> 교과서를 검정교과서로 진출시키고, 그게 안 되면 국정교과서로 간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국정교과서를 만들기 위한 시나리오대로 가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이승만 중심의 역사, 독립운동을 축소한 역사, 상해임시정부 인정하지 않고 1948년을 건국절로 하는 역사. 박정희의 업적만 기리는 역사로 가는 교과서를 만들고 싶은 거다.
그래서 지난 2013년에 <교학사> 교과서를 만들었는데, 일선 학교의 채택률이 거의 0%였다. 10개 학교가 채택했다가 한 곳만 제외하고 모두 채택을 포기했다.
그러니까 이제 남은 방법은 국정교과서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그렇게 가는 거다."
- 정부와 여당은 현재 검인정 교과서가 좌편향 돼 있다고 주장한다. 문제가 있다면 국정교과서도 해결 방법이 될 수 있지 않나?
"좌편향 돼 있다는 주장부터가 사실이 아니다. 주체사상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는데, 주체사상을 비판적으로 가르치는 게 지금의 교과서다. 한국전쟁의 책임이 남북모두에게 있는 것처럼 나와 있다고 하는데 그것 역시 거짓이다. 북한의 책임이라고 정확하게 기술돼 있다. 국민을 호도하고 있는 거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말한다. 아마 황우여 부총리도, 김무성 대표도, 박근혜 대통령도 (교과서를) 안 읽어봤을 거다."
"국정화는 교과서의 저작권을 국가가 갖는 것"
▲ 항의서한 전달하는 교문위 위원들 도종환 새정치민주연합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특위 위원장을 비롯한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야당 의원들이 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 |
ⓒ 유성호 |
- 우려되는 내용이 들어가는 것 이외에 국정화 자체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저작권을 국가가 가져간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사실 그렇게 하기 위해 국정화를 추진하는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집필진을 구성해 책을 쓰면 그것대로 교과서가 되는 게 아니다. 국가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지금의 검인정은 필자에게 저작권이 있다. 정부가 수정을 지시할 수 있지만 마음대로 내용을 바꿀 수는 없다. 자기 입맛에 맞는 교과서를 만들기 위해 국정화를 추진하는 거라고 봐야 한다."
- 정부는 국정교과서를 '올바른 역사교과서'라고 명명했다.
"거짓을 감추려고 한다. 나치도 국정교과서 만들면서 민족정체성 확립, 국가정통성 확립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 교과서도 화려한 명분이 있었다. 명분은 그럴싸하지만 친일을 미화하고 독재를 옹호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무슨 이유로 국정교과서를 만들겠나."
- 과거에도 국정교과서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국민의 역사의식에 큰 문제가 있다고 느끼기 어렵다. 교과서가 사회의식에 그렇게 크게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나?
"교과서 내용은 학문적으로 연구 검증된 것을 적는다. 국정교과서가 되면 제대로 된 연구가 반영되는 게 아니라, 어떤 연구는 제한되고 금지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배우더라도 제대로 된 역사를 배우는 게 아니다. 나중에는 자기가 제대로 된 역사를 배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없게 된다. 논문 다섯 편을 읽고 한 줄을 쓰는 게 교과서다. 국정교과서는 올바르게 가르치겠다는 게 아니라 한 가지만 가르치겠다는 얘기다."
- 황교안 국무총리는 "유신을 찬양하는 교과서를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같은 시기에 그런 문제가 있는 교과서를 만들 수 없고, 믿어달라는 얘기다.
"그렇게 말하는데 이걸 보면 믿을 수 없다. 내년 초등학교 6학년이 배우게 될 사회교과서다. 현재 초등학교 교과서는 국정이다. 2014년 8월에 나왔다. 여기에는 일제시대 때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했다'고 나온다. 주어가 일본이다. '경찰권 장악'이라고 한다. '을사조약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이토'라고 나온다. 우리가 '쌀을 수출했다'라고 한다. 수탈을 당했다고 하는 게 맞다. 이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교학사> 교과서가 똑같았다.
식민을 근대로, 분단을 건국으로, 독재를 부국으로 그렇게 기술하고 싶은 거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그런 걸 긍정적 역사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대표가 되면서 역사전쟁을 선포하고100명의 의원을 구성해 <교학사> 교과서 필자들의 강의를 들었다. 그러고 나서 지금 여기서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이념전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학문적 논쟁을 벌일 일에 정치인이 나서서 전쟁을 하고 있는 꼴이다."
▲ 새정치연합, 황우여 해임건의안 제출 새정치민주연합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특위 위원장인 도종환 의원(오른쪽)과 이언주 의원이 박근혜 정부의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을 우려하며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12일 오후 국회 의안과에 제출하고 있다. | |
ⓒ 남소연 |
- 하지만 국민을 통합하고 긍정적인 역사를 가르친다는 게 잘못된 말로 들리지는 않는다.
"오늘 여의도역에서 있었던 일이 통합인가 분열인가.(문재인 대표 등 당 지도부가 서명운동을 하던 도중 어버이연합 회원들이 난입한 사건) 지금 교과서들은 집필 기준을 이명박 정부 때 세웠고 박근혜 정부에서 통과시킨 것들이다. 그동안 친북교과서였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나. 검정을 통과시킨 교육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 역사교과서는 자랑스러운 건 자랑스러운 대로,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대로 가르치는 게 역사교육이다. 있는 그대로 가르치는 게 역사교육이다.
항일의 역사는 자랑스럽다. 민주화의 역사 역시 자랑스러운 거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은 빛과 그늘이 있다. 그대로 가르치는 게 역사교육이다.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역사라고 하는 건 권력의 횡포다. 역사는 교육자와 학자들에게 맡겨야 한다. 김무성 대표가 나서서 '왜 주체사상을 가르치냐'라고 하는 건 부당한 개입이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학자들을 다 좌편향으로 모는 게 정치인이 국민을 상대로 할 일인가."
- 무엇 때문에 국정교과서를 고집한다고 생각하나?
"이런 역사교과서를 갖는 게 박근혜 대통령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아버지의 명예 회복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아버지의 명예를 높이고 나면, 나머지 독립운동가 명예는 땅에 떨어져도 괜찮나. 그 분들 이름에 먹칠을 해도 되는 건가.
일제에 저항하며 희생한 사람이 있다. 감출 필요가 없다. 민주화 운동하다가 희생한 사람들 감출 필요 뭐가 있나. 역사 교과서는 우리 민족의 집단 자서전이다. 있는 그대로 가르치고 그 속에서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그게 역사다.
대통령의 목적만이 있는 건 아니다. 우리의 역사를 바꾸는 것은 수구세력의 오랜 숙원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역사학자가 부족하다. 실력도 없다.
'국가정상화위원회' 보고서에는 '논쟁에서 그들을 제압할 수 없다. 그들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사안을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할 논거를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나와 있다.
그래서 경제학자, 정치학자 모아서 하겠다고 한다. 결국 실력이 안 되니까 정치가 개입해서 억지로 국정교과서로 가는 거다."
"교과서에는 헌법 가치 담겨야"
▲ 새정치민주연합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특위 위원장을 맡은 도종환 의원은 13일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에 대해 "국가를 책임져야 할 최고 통수권자가 불필요한 국민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라며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한 것이든, 내년 총선에서의 여당 승리를 위한 것이든 대통령으로서는 하지 말아야 할 가장 나쁜 행위"라고 비판했다. | |
ⓒ 남소연 |
- 일부 교육감과 일선 교사들이 대안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한다. 얼마나 실효성이 있겠나?
"별 효과 없을 거다. 불복종하겠다는 교사들과 교육감이 있다. 하지만 국정교과서가 만들어지면 써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걸 거부하거나 하면 징계 받는다. 앞으로 많은 징계 사례가 나올 것이다.
나치 때도 그랬다. 아리안족의 인종적 우월성을 가르치는 생물교과서와 민족정통성을 가르치는 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내려 보냈는데, 따르지 않는 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에 대한 징계와 탄압을 바탕으로 국정교과서가 시행됐다. 힘으로 그렇게 하면 막을 수가 없다. 그걸 못 막아서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유대인 대 학살이 일어났다.
우리에게도 엄청난 사회혼란이 계속 될 것이다. 그게 어떻게 사회통합이 될 수 있나. 힘으로 통합시킬 수는 있다. 나치나 일제, 유신 때처럼 무력으로 통합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정신을 어떻게 무력으로 통합할 수 있나. 끝없는 분열만 재생산된다. 그건 올바른 교과서가 아니라 그저 하나로 가르치는 교과서다. 지금 그렇게 하는 나라는 없다."
- 외국 사례가 많이 거론됐다. OECD 대부분은 자유발행이나 검인정이지 않나?
"중국은 검정일까 국정일까?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지만 1980년대부터 검정이다. 러시아는 검정인데 국정으로 바꾸고 싶어 한다. 푸틴 대통령이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전 세계가 '스탈린이 되려 하냐'고 비판한다. 베트남이 국정인데 검정으로 바꾸고 싶어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례를 연구하다가 국정을 추진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독일 분단시기에 동독은 국정, 서독은 검인정이었다. 어느 체제가 승리했나. 이슬람 국가들은 종교적 이유 때문에 국정이다.
OECD 34개 중에 17개는 자유 발행이고, 13개는 검인정이다. 4개가 국정인데 터키는 이슬람 국가고, 그리스는 여러개의 검정교과서 중 하나를 선택하는 형태다. 엄밀히 국정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아이슬란드는 인구가 37만 명에 불과하다. 학교가 몇 개 되지 않는다.
전 세계적으로 국정교과서는 후진국에서나 하는 일이다. 선진국으로 진입하려는 나라가 국정으로 가는 게 말이 되나."
- 야당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막기 어려운거 아닌가?
"우리 힘이 약해 못 막을 수 있다. 유신도 못 막았다. 하지만 유신 선포는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박근혜 정권도 국정교과서를 선포하는 순간 몰락으로 가는 길이 될 거라고 본다. 국민이 나서줘야 한다."
- 끝으로 역사교과서는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나?
"헌법적 가치를 담아야 한다. 우리 헌법 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나와 있다. 1948년을 건국절로 가르치면 안 되는 이유다. 또 4.19민주이념에 따라 독재를 옹호하거나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 그러니 당연히 조국의 평화통일과 민족의 화해를 위한 교과서가 돼야 한다."
[ 남소연, 최지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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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엔 여러 견해 있다" 황교안, 바로 그거야!
박근혜 대통령이 탁월한 말솜씨를 지녔다고 믿는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눈빛으로 제압하고, 침묵으로 지시하는 묘한 재주를 지녔다.
'침묵 웅변술'만이 아니다. 그는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감을 과시하는' 신비로운 재주도 갖고 있다.
모두가 알듯, 박 대통령은 해외순방을 자주 떠난다. 2013년 대선 여론조작과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파문, 2014년 국정원 간첩 조작, 세월호 참사, 정윤회 문건 유출, 2015년 '성완종 리스트'와 국정원 해킹 등으로 지지율이 폭락할 때마다 그는 어김없이 유럽으로, 아시아로, 중동으로, 북미로, 중남미로 떠났다.
대통령의 순방에는 거의 예외 없이 대규모 기자단이 따라붙는다. 기자들은 순방 당시는 물론, 돌아온 뒤에도 상당 기간을 대통령의 '성과'와 '치적' 보도로 방송, 신문, 인터넷을 요란하게 수놓는다. 이렇게 해서 지지율이 오르면, 대통령은 다시 외국으로 나간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순방의 양상이 좀 달라진다. 이제 '지지 여론'을 업고 큼직한 사건을 터뜨린 뒤 외국으로 피신하듯 떠나는 것이다.
2013년 기초노령연금 공약 파기 당시 대통령은 인도네시아 발리에 있었고,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때는 영국에 가 있었다. 일을 저질러 지지율이 떨어져도 떠나고, 지지율이 오르면 일을 저지른 후 떠나는 것이다.
또 '사고치고' 피신하는 대통령
▲ 박근혜 대통령과 오얀타 우말루 페루 대통령이 20일 오전(현지시간) 페루 대통령궁에서 단독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2015.4.21 | |
ⓒ 연합뉴스 |
올해도 다르지 않았다. 황교안 총리 후보를 내세운 후 '최악의 공안총리'라는 비난이 쏟아지자, 대통령은 임명 직후 미국으로 떠나려 했다. 하지만 메르스 전국 확산으로 반대여론이 들끓자 대통령은 울며 겨자먹기로 순방 계획을 미뤘다.
많은 이들이 대통령의 방미 취소 결정을 반겼고,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통령이 '아껴놓은 여행'은 언제 터질지 모를 불발탄처럼 내 마음을 짓눌렀다. 떠나면서 또 '큰 놈' 하나를 터뜨릴 테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언론에서 대통령이 '나간다'는 사실이 보도되기 시작했고, 내 마음속에는 근심의 먹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짙은 두려움을 뚫고 '국정교과서'라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박 대통령의 선임인 이명박 전 대통령은 '국민이 반대해도 일단 저질러 놓으면 나중에 좋아한다'는 기이한 통치철학을 현 정부에 각인시켜 놓은 지도자였다. 반대 여론이 거셀 때 대처하는 법도 알려주었다.
"소나기가 오면 피해야 한다."
잠시 눈치 보며 살피다가 빗줄기가 잦아들면 다시 '저지르기 모드'로 복귀하는 한편, 경찰과 검찰을 풀어 정부에 반대한 국민들을 야금야금, 그러나 끈질기게 손보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통치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 그는 소나기를 피하는 법을 알 뿐 아니라, 소나기를 피하기 좋은 곳이 외국이라는 사실까지 아는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완전히 도사급이 되어, 기우제까지 지내놓고 사뿐히 비행기에 오르는 수준에 도달했다. 이제 허수아비 여당과 관료들이 '행동대장'으로 나설 차례고, 그 뒷감당은 박복한 국민들 몫이다. 대통령은 고운 옷에 화사한 웃음으로 해외 정상을 만나고, 그를 감시하고 비판해야 할 언론은 동반자가 되어 정상회담을 칭송할 언어를 찾기 바쁘다. 어느 모로 봐도 '정상'이 아니다.
국정화 발표 당일 불거진 재앙들
황우여 교육부장관이 '국정화'를 선언한 12일 바로 그 날, 두 개의 뉴스가 언론에 슬그머니 등장했다 사라졌다. 하나는 한국노동연구원 발로 보도된 청년 고용난 소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2015년 세계 노인복지 지표'(GAWI)가 드러낸 한국 노인들의 형편없는 복지 수준이었다.
이에 따르면, '청년 신규채용은 10년 새 10만 명 감소했고, 일자리 질 악화는 더욱 심각'하며, 한국의 노인복지 지표는 100점 만점에 44점을 기록해, 베트남이나 필리핀보다 낮았다. 더 한심한 것은, 50위에서 60위로 떨어져 일 년동안 무려 10계단이나 추락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이런 위급한 시기에 대통령과 여당이 '한가하게' 교과서 타령이나 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대통령이 임기 절반이 지나도록 (제 1공약이었던) '일자리와 복지'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며, 나머지 임기 동안도 지킬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해결하지 못한 '먹고사는 문제'를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덮는 것, 이것이 '교과서 트집 잡기'의 핵심이다.
'다시 잘 살아보세'를 내세워 집권하고 나서 이제 와서 '이제까지 쭉- 잘 살아왔네'라고 말하는 셈이다. 교과서 국정화는 이명박 정부 이래로 끈질기게 추진되어 온 '여론 길들이기'의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한다. 지난 정부는 '무더기 종편 허용'과 '공영방송 국영화'를 통한 언론 우경화 작업에 나섰고, 덕분에 참담한 실패 뒤에도 재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현 정부는 다시 권력 재창출을 위해 '포털 길들이기'와 '카카오 감청' 작업을 마무리하고, 뒤이어 '교과서 손보기'에 나섰다. 앞의 것이 '유권자 눈·귀·입 가리기' 시도라면, 뒤의 것은 '집권용 조기교육'에 해당할 것이다.
'우익 교과서 막겠다'는 공안총리
▲ 황우여 교육부 장관이 12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브리핑실에서 '올바른 교과서'라고 명칭을 한 한국사 국정교과서 행정예고 발표를 마치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
ⓒ 이희훈 |
지난 13일 국회대정부 질문에서 야당 의원은 '국정 역사교과서가 친일을 미화하고,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을 미화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전했다. 이에 대해 황교안 총리는 이렇게 대꾸했다.
"만약 그런 시도가 있다면 내가 막겠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명박 전 대통령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사람들이 4대강 사업이 가져올 수질 오염을 우려하자, '로봇 물고기를 풀면 된다'던 확신에 찬 음성 말이다.
황교안 총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모양이다. 그는 국민이 투표로 뽑아놓은 의원과 정당을 '종북'이라며 하루아침에 날려 버린 사람이다. 물론 대통령의 의지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고, 여기에는 대선 토론 당시 이정희 의원 입에서 '다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이 나왔다는 사실이 중요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정당 해산'이라는 엄청난 작업을 군말 없이 행한 사람이, '아버지 명예회복'을 위해 정치에 입문했다는 대통령 뜻을 온몸으로 막겠다고?
황 총리는 2009년 자신의 책에 "4·19는 혼란"이고, "5·16쿠데타는 혁명"이라고 썼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총리의 '내가 막겠다'는 호언이 나온 그날, 야당 의원은 그에게 "5·16이 쿠데타인가, 혁명인가" 물었다. 그는 "논란이 생길 수 있다"며 답변을 피했다. 하지만 정말 흥미로운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야당 측이 "5·16이 쿠데타인가, 혁명인가" 계속 추궁하자, 황 총리는 "그렇게 말할 일이 아니다.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고 대꾸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거다. 역사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기에, 하나의 시각을 강요하는 국정교과서를 막아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검정 체제는 황 총리의 견해가 담긴 책이 오롯이 존재한다. <교학사> 역사 교과서다. 이 책은 박정희 집권을 "5.16군사혁명"으로 표기하고 있다.
물론 <교학사> 교과서는 인기가 없다. 수없이 많은 오류와 왜곡으로 인해 경쟁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국정체제는 경쟁체제에서 살아남지 못할 질 낮은 교과서를 강매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입에 거품을 물고 '경쟁체제'를 외쳐온 정권이 왜 유독 역사 교과서에는 '독점체제'를 주장할까?
권력은 역사기록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
▲ "입만 열면 좌경매도" 고영주 사퇴 촉구 8일 오후 여의도 방송문화진흥회(MBC대주주) 사무실에서 'MBC를 국민의 품으로! 공대위' 회원들이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야당대표, 전현직 정치인, 전직 대통령 및 그들의 지지자들까지 공산주의자나 이적행위자로 몰고 있다'며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 사퇴를 촉구했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국민을 이적행위자로 매도한 고씨를 공영방송 이사장직에 임명한 책임을 느낀다면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즉각 해임해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
ⓒ 권우성 |
현 정부는 이렇게 말한다. "올바른 역사관"을 위해서라고. 그렇다면 무엇이 '올바른' 역사일까?
문창극 같은 사람을 총리 후보로 뽑고, 그의 친일 찬양 비디오에 '감동했다'는 이인호 같은 사람을 최대 공영방송 이사로 임명하며, 유권자 절반 가까운 표를 얻은 야당 정치인을 "공산주의자"로 부르는 고영주 같은 사람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로 세우는 권력에게 '올바른 역사'를 독점할 권리를 줘도 좋을까?
비단 박근혜 정부만이 아니다. 어떤 권력도 스스로 역사를 쓰겠다고 나설 수 없다. 권력은 역사기록의 객체이지,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권력은 이해관계 당사자이기 때문에 역사 기록에서 멀리,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한다. 이는 왕정 시대조차 왕이 사관의 서술에 개입할 수 없던 이유이기도 하다.
길게 말할 것도 없다. 국가기록원의 '사관' 설명을 보면, "그대로의 사실을 거짓 없이 그대로 기록(이것을 직필(直筆)이라고 합니다)해야 하기에 권력 앞에 맞서는 용기도 필요했다"며 다음의 예시를 든다.
"1404년(태종 4년)에 태종은 사냥을 나갔다가 실수로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태종은 급히 일어나서 좌우를 둘러보며 이 사실을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관은 태종이 한 말까지도 사초에 기록했습니다. 태종 7권, 4년(1404 갑신 / 명 영락(永樂) 2년) 2월 8일(기묘) 4번째 기사."
그리고는 이렇게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인다. "이렇게 사관들은 직필의 원칙을 지켰으며, 이로 인해 조선시대의 국왕은 사관의 기록에 언제나 긴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과서 국정화는 왕이 사관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나 다름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화의 명분으로 '국민통합'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국정화 문제로 국론분열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국정화가 '통합' 대신 '분열'을 가지고 온다는 사실을 본인도 알고 있는 것이다.
뭘 소심하게 이 정도 가지고 '분열'을 걱정하시는가? 기다려 보시라. 국정화가 시작되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를 제 입맛대로 쓰려는 시도가 되풀이될 것이고, 나라는 나뉠 수 있는 대로 나뉘어 난투극을 벌일 것이다.
물론, 얻은 게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데올로기 싸움에 정신이 없어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경제가 어디로 향하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을 테니.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에게는 더없이 좋은 호시절이 열리는 셈이다. 그래서 현 정부가 국정화에 목숨을 거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이 순간에도 역사를 쓰고 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꾀하는 이들이 잊고 있는 사실이 있다. 우리 국민이 두 번에 이은 군사독재를 물리치고 민주화를 이뤘을 때, 학교에서는 '군사독재 찬양 국정 교과서'로 가르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교과서를 입맛대로 바꿔서 자신들의 역사적 정당성 결여, 무능, 부패를 감추고 계속 집권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국민들이 '총선 때 보자'나 '역사가 심판할 것' 따위의 손쉬운 핑계로 교과서 국정화 시도를 묵인할 수는 없다. 국정교과서가 몇 년 치의 퇴행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루 다르게 침몰하는 국민의 생존권과 자유는 이런 역행을 감당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역사는 행동의 기록이고, 우리는 이 시간에도 역사를 만들고 있다. 우리의 21세기 역사는 두 번 잇따라 몰상식한 권력을 탄생시킨 과오를 기록할 것이다. 이 사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우리 국민이 몰상식한 권력의 몰상식한 행태에 침묵했는지의 여부다.
[ 강인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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