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중단은 없다
장날 야바위꾼의 손은 빠르다. 손님의 돈을 뜯기 위해서다. 손님의 눈이 손을 따라가면 승부는 끝난 것이다. 손님은 뻔히 보면서도 속아 넘어간다.
난리 통에는 요설이 판친다. 무당의 점괘나 예언은 늘 그럴듯하다. 그래야 복채를 두둑하게 받는다. 요설과 진실을 분간하기는 쉽지 않다.
최근 사태의 본질은 박근혜-최순실의 국정 사유화다. 대통령 자리를 이용해 돈을 뜯고 이권을 챙겼다. 당장 대통령 자리에서 내쫓고 감옥으로 보내야 한다. 그게 법치국가의 상식이다.
이대로 살 수는 없다. 정국을 수습해야 한다.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박근혜 대통령 스스로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60일 이내에 19대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것이다.
둘째, 박근혜 대통령이 사퇴를 거부하면 탄핵해야 한다. 국회의 소추와 직무정지, 헌법재판소의 심판이 필요한 절차다.
그런데 극구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통령이 임기 도중 그만두면 헌정 중단이란다. 청와대와 여당 사람들이 그런 말을 많이 한다. 야당 일각에도 그런 주장이 있다. 그런가? 거짓말이다.
헌정은 입헌정치(constitutional government)다. 헌정 중단은 헌법에 입각한 정치가 중단된다는 뜻이다.
헌정 중단 사례가 있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로 정부를 무너뜨렸을 때다. 그리고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하고 이른바 10월 유신을 선포했을 때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지 못한다고 정부가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국회가 해산되는 것도 아니다. 헌정 중단일 수 없다.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다. 공화국은 주권을 가진 국민이 선출한 대표자가 국가를 통치하는 제도다. 공화국의 핵심 원리는 대표자가 공익을 위해 국정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자가 사익에 따라 국정을 좌지우지하면 공화국은 존립할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로 시작되는 취임 선서를 했다. 그래 놓고 헌법 1조 1항을 위반했다.
헌법을 위반한 대통령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도 헌법은 간결하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첫째, 사퇴의 경우다. 68조 2항은 “대통령이 궐위된 때에는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거한다”이다. 71조는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국무총리, 법률이 정한 국무위원의 순서로 그 권한을 대행한다”이다. 대통령이 사퇴해도 국무총리나 국무위원이 권한을 대행하고 60일 이내에 다음 대통령을 새로 뽑으면 그만이다. 헌정 중단이 될 수 없다.
둘째, 탄핵이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 탄핵소추권을 부여한 이유는 보통의 파면 절차로 파면하기 곤란하거나 보통의 검찰기관에 의해 소추하기 곤란한 국가 중요 공무원의 직무상 위헌·위법 행위를 적발해 쫓아내기 위한 것이다. 이번 사례가 딱 여기에 해당한다. 탄핵소추를 당한 대통령은 직무가 정지되는데 그렇다고 헌정이 중단되지는 않는다. 국무총리가 권한을 대행하기 때문이다. 2004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 탄핵소추 당시에도 헌정 중단이라고 하지 않았다.
청와대와 새누리당 사람들이 박근혜 대통령 사퇴나 탄핵을 헌정 중단이라고 우기는 진짜 이유가 뭘까? 시간벌기다. 책임총리든, 거국내각이든 박근혜 대통령을 살려서 숨만 붙여 놓을 수 있다면 무너져 내리는 집권세력을 재정비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고 계산하는 것이다.
야당 일각에서 ‘헌정 중단’을 걱정하는 이유는 또 뭘까? 야당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점점 커져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100만 촛불집회가 벌어지기까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섣불리 하야나 탄핵을 밀어붙일 경우 역풍이 불 수 있다고 우려하는 듯하다. 그러나 성난 민심의 파도는 이미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쓰나미로 발전했다. 엉거주춤하다가는 야당도 쓸려갈 수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 검찰의 박근혜 대통령 조사, 최순실·안종범 등 관련자 기소라는 두 가지 고비가 다가오고 있다. 모두 담대해야 한다.
여야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사퇴를 요구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거부하면 곧바로 탄핵소추 절차에 들어가야 한다. 국민을 믿고 정도대로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바로 그게 헌정을 지키는 일이다.
성한용, 정치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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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운명과 사법부
“대부분의 판사들은 이 뉴스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환호하거나 우려하거나 또는 애써 중립인 체하면서도 결과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들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재판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혜의 아홉 기둥>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한 밥 우드워드가 1979년에 쓴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들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은 워터게이트 청문회 뉴스가 언론을 도배하던 1973년 7월, 미국 판사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술했다.
‘이게 어떤 식으로 연방대법원에 오려나.’ 한 대법관은 재판연구원들을 모아놓고 이런저런 가상 시나리오를 작성해 놓고 있었다.
지금 한국의 판사들도 최순실 게이트에 관한 뉴스들을 유심히 볼 거다. 이 사건 관련자의 구속영장을 심사할지도 모르는 서울중앙지법 판사들도 그럴 거고, 지난 12일 율곡로, 사직로의 집회를 사상 처음으로 허용한 서울행정법원 재판부의 판사들도 그랬을 거다.
뉴스를 열심히 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평화적인 집회를 할 거라는 확신을 갖기 힘들었을 거다.
율곡로, 사직로 집회 금지에 대해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참여연대 쪽은, 투쟁본부가 가처분 신청을 내기로 결정하기까지 자체 논의를 길게 거친 것 같다고 전했다. 집회나 시위의 금단의 땅이 돼버린 이 길에 시위를 허용해 달라고 했다가 거부당하면 집회 분위기가 미리부터 경색되지 않을까 걱정했을 거다.
여하튼 법원은 허용했고, 막상 12일 저녁, 사직로 12차선 대로를 메우고 촛불 인파가 행진할 때 울컥했다.
‘그렇지. 사법부는 청와대와 다르지. 삼권분립!’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아직도 훨씬 많구나.
워터게이트 사건 뒤 닉슨이 퇴진하기까지 미국 사법부가 한 역할이 적지 않았다. 관계자들의 재판에서, 이 사건 모의와 처리 과정이 녹음된 테이프가 백악관에 보관돼 있음이 밝혀졌다. 법원은 특별검사가 요구한 테이프 전부를 제출하라고 백악관에 명령했는데, 닉슨은 국가안보 등을 내세워 제출할 테이프를 결정할 권리가 대통령에게 있다며 법원 명령에 항고했다. 그랬더니 특별검사가 연방대법원에 비상상고를 했다. 시간을 단축하자는 거였다.
연방대법원 판사 9명 중 대법원장 포함한 4명이 닉슨이 임명한 사람이었다. 백악관은 대법원에 성급한 판단으로 오점을 남기지 말아 달라고 했다. 비상상고를 기각하고 시간을 끌어달라는 얘기다.
그러나 대법원은 비상상고를 받아들임과 아울러, 비상상고에 대한 결정에서 전원일치로 테이프 제출을 명령했다. ‘국가안보 등을 이유로 한 대통령의 결정권’ 같은 건 일체 인용하지 않았다. 이런 사법부의 단호한 태도를 본 닉슨은 17일 뒤 사임했다.
미국의 연방대법원이 한국으로 치면 헌법재판소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거취와 관련해 탄핵 이야기가 나온다. 국회에서 탄핵이 의결되면 헌법재판소에서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러니 헌법재판소 재판관들도 뉴스를 열심히 볼 거다.
그동안 헌재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에서 시간을 끌거나, ‘나쁘지만 (헌법재판관의) 의결정족수가 모자라 금지하지 못한다’는 식의 단호하지 못한 결정을 내리는 걸 몇 차례 봤다.
하야든 2선 후퇴든 박 대통령이 뭔가를 결정하지 않는 한, 탄핵 소리는 더 커질 거다. 아직 먼 일일지 모르겠지만, 광화문 집회가 (헌재가 있는) ‘가회동 집회’로 바뀌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2003년 헌법재판소가 내린 주옥같은 결정문이 있다.
“다른 법익의 보호를 위하여 정당화되지 않는 한, 집회 장소를 항의의 대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금지한다.”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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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의 조건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 등 기타 법률이 정한 국가 공무원이 그 직무 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에는 국회는 탄핵의 소추를 의결할 수 있다.”(헌법 제65조)
우리 헌법의 이 탄핵 조항은 미국 대통령제에서 따온 것이다.
1787년 필라델피아서 열린 제헌의회에선 의회에 탄핵권을 줄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반대한 쪽은 탄핵 제도가 삼권분립 정신을 훼손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수파는 행정부 권한이 갈수록 커져 먼 훗날엔 의회의 견제를 초월하는 상황이 벌어질까 우려했다. 그래서 대통령제를 채택하기도 전에 탄핵 조항을 먼저 헌법에 삽입했다.
또 다른 논란은 탄핵의 조건이었다. 처음엔 ‘반역죄’와 ‘부패 행위’에 한정하자는 주장이 많았다. 그러나 탄핵 범위가 너무 협소해진다는 반론에 부닥쳤다. 탄핵의 개념을 명확히 한 건 건국 초기 재무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해밀턴이었다. 그는 탄핵권이 공직자 비행뿐 아니라 ‘공적 신뢰의 훼손과 권력남용’에까지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탄핵 사유에 ‘반역, 부패뿐 아니라 다른 중범죄와 공직자의 비행’이 포함됐다.
미국 상원에서 대통령 탄핵을 표결한 사례는 두 차례다. 1868년 남북전쟁 직후 남부에 유화정책을 폈던 앤드루 존슨과 1998년 ‘지퍼 게이트’에 연루된 빌 클린턴이 그 주인공이다. 두 사람의 탄핵안은 정치적 이유로 제기됐기에 모두 상원에서 부결됐다.
실질적으로 탄핵에 가장 가까이 갔던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이다. 1974년 미 하원은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닉슨 대통령 탄핵안을 의결했다. 이제 상원만 통과하면 끝이었다. 여당인 공화당 중진들은 닉슨을 찾아가 탄핵안에 찬성하겠다고 최후통첩했다.
결국 닉슨은 상원 표결 직전에 사임을 선택했다. 탄핵보다는 하야가 그래도 명예롭다는 판단에서였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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