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 정도전
- 도담 삼봉인가? 삼각산 삼봉인가?
# “이성계가 나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성계를 이용해 조선을 세웠다.”
조선은 군사적 기반을 갖춘 이성계 세력과 유교적 이념으로 무장한 정도전 등 신진 사대부의 결합에 의해 탄생한 나라다. 이성계가 힘을 쓰는 ‘몸체’였다면, 정도전은 머리를 쓰는 ‘두뇌’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은 정도전의 정치 철학과 머릿속 설계도에 따라 건설된 셈이다.
이러한 사실은 두 가지 차원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하나가 ‘신권 정치(臣權政治)’라면, 다른 하나는 ‘한양 도성(漢陽都城)’이다.
臣權政治란 재상(宰相)이 국정 운영의 중심이 되어 통치하는 것이다. 유교 국가가 이상으로 삼은 ‘민본(民本)과 왕도(王道)’를 이루기 위해서는, 임금의 권력 행사를 제한하고, 자신과 같은 지식 엘리트 집단에서 나온 재상이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자 세습을 정통으로 한 왕조 국가에서 성군(聖君)과 현군(賢君)이 나올 수도 있지만, 암군(暗君,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이나 폭군(暴君)이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암군과 폭군일지라도 임금의 자리란 함부로 바꾸거나 폐지하기 어렵다.
반면에 재상이라는 존재는 유학자, 곧 지식 엘리트 집단에서 가장 현명하고 유능한 인물을 고르는 일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무궁무진하다. 또한 임금은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 없지만, 재상은 변변치 못하거나 잘못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정도전은 무능하고 변변치 못한 임금이 나오더라도, 훌륭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재상만 있다면, 자신이 정치적 이상으로 여긴 ‘民本과 王道’를 이루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임금의 역할이란 현명한 재상을 제대로 뽑는 일에 있을 뿐이다.
··· 재상은 임금의 아름다운 점은 따르고 나쁜 점은 바로잡으며, 올바른 일을 받들고 옳지 않는 것은 막아서, 임금으로 하여금 균형을 잡도록 해야 한다.
- 『조선경국전』, 「총서(總序)」
정도전은 “한나라 고조(유방)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고조를 이용해 한나라를 세웠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는데, 이 말은 ‘이성계가 나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성계를 이용해 조선을 세웠다.’는 뜻.
“임금은 자신의 속마음을 비우고 스스로를 낮춰서, 아래에 있는 현명한 재상에게 순응하여 따라야 한다.”
臣權政治는 달리 말하면 철인정치(哲人政治).
정도전이 유교 국가의 이념과 철학을 철저하게 구현해 건설한 도시가 수도 ‘한양(漢陽)’이었다. 정도전은 『주례(周禮)』의 원리인 ‘좌묘우사 면조후시(左廟右社 面朝後市)’에 따라 궁궐과 종묘, 사직단, 관청, 시장 등 주요한 공간의 자리를 잡았다. 즉 북악(北岳) 아래에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세우고, 그 왼쪽인 지금의 종로에 선왕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宗廟)를, 오른쪽인 인왕산 아래 자락에는 토지신과 곡물신을 모시는 사직단(社稷壇)을 배치했다. 그리고 육조(六曹) 등 조정의 주요 관청들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 좌우에 배열해 세우고, 다시 종로에 저잣거리(시장)를 조성하도록 했다.
또한 정도전은 경복궁은 물론이고,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융문루 등 궁궐의 주요 건물 하나하나에 유교적 이념과 이상을 새겨 이름을 지었다.
경복궁이란 이름은 『시경(詩經)』 「대아(大雅)」편의 ‘기취(旣醉, 이미 술에 취하다)’라는 시의 구절 중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네. 군자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리라” 라고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주역의 팔괘의 원리와 질서를 담아 한양 도성을 축성하고 4대문(四大門)과 4소문(四小門)을 설치했으며, 유학의 기본 이념인 ‘仁義禮智信’에 따라 한양 도성을 지키는 4대문(四大門)의 명칭을 지었다. 仁을 일으킨다는 철학을 담아 동쪽 대문의 이름을 ‘興仁之門’, 禮를 높인다는 이념을 담아 남쪽 대문의 이름을 ‘崇禮門’이라고 했다.
제왕(帝王)은 남면(南面)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법도(法道)라고 하며,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자는 무학대사의 뜻을 꺾고,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아 그 아래에 정궁(경복궁)을 세웠다.
이성계를 이용해 자신이 조선을 세웠다는 정도전의 말은 역사적 사실로 볼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정도전은 그토록 막강했던 힘과 영향력 때문에, 신권 정치를 ‘신하들이 나라의 권세를 제멋대로 하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했던 태종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나라인 조선에서 400여 년 가까이 ‘역적’ 대접을 받았다.
조선 중기 이후 권력을 잡은 사림파는 정도전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정몽주를 종조(宗祖)로 삼아 자신들의 학통과 정치적 명분을 세웠기 때문에, 정도전은 선비들 사이에서도 비판의 대상 혹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791년(정조 15)에 국가 차원에서 다시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三峰集)』을 수정 편찬했다. 1865년(고종 2)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한양 도성 설계의 공적을 인정해 시호를 하사해 달라고 청하고, 이에 고종이 1870년 마침내 문헌(文獻)이라는 시호와 함께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정도전의 삶과 철학 그리고 죽음은 조선이 망해 갈 무렵에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았다.
# 정도전의 호 삼봉(三峰)은 도담삼봉(嶋潭三峯)이다!
정도전의 호 ‘삼봉(三峰)’이 단양 팔경 중의 하나인 ‘도담삼봉’에서 유래했다는 설은 최근까지 일반적인 중론(衆論)이었다.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의 ‘도담삼봉’에서는 “정도전이 도담 삼봉과 이웃한 지금의 단양읍 도전리에서 태어났고, 도담 삼봉에서 아호를 따서 삼봉이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도담 삼봉의 유래 또한 정도전과 관련이 있다고 소개했다.
단양군청의 홈페이지 : “조선 개창에 큰 공을 세운 정도전은 자신의 호인 삼봉을 이곳에서 취할 정도로 도담의 경관을 사랑했다.”
한영우 교수는 자신이 처음 제기한 후 이미 하나의 정설처럼 굳어져 버린 ‘도담 삼봉설’에 대한 견해를 조심스럽게 뒤집으면서, 三峰이 지금은 북한산이라고 불리는 삼각산(三角山)에서 뜻을 취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정도전의 시 「三峯에 올라」에 “삼봉은 지금 서울의 삼각산(三角山)을 가리킨다. 정도전이 살며 학문을 하던 집이 있던 곳이다. 그의 호가 삼봉인 것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 심경호 교수, 국역한 『삼봉집』에 주석을 달아 놓음
# 정도전의 호 삼봉은 도담 삼봉이 아니라 ‘삼각산(三角山) 삼봉(三峰)’이다!
『삼봉집』에 실려 있는 여러 편의 시를 통해 삼봉의 지명과 위치를 가늠해 본 결과, 삼각산이 옳을 듯하다.
삼봉은 삼각산, 즉 오늘의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의 세 봉우리로 이뤄졌다 해서 예부터 삼각산으로 불렀는데, ‘삼봉’으로 약칭되기도 했다.
전해오는 전설이나 설화는 정도전의 호가 ‘도담 삼봉’이라고 하지만, 정도전 자신과 그와 시대를 함께했던 스승과 벗들이 남긴 문헌은 그의 호 ‘삼봉’이 ‘삼각산 삼봉’이라고 가리키고 있다.
# 삼각산 삼봉이 정도전의 호로 타당한 이유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에는 그의 호 삼봉이 ‘삼각산 삼봉’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여러 편의 시와 글이 존재한다.
정도전이 남긴 글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행적을 연도별로 기록해놓은 『삼봉집』 「부록(附錄)」의 「사실(事實)」편을 찾아보아도 ‘단양’이나 ‘도담 삼봉’이라는 단어나 지명은 찾아볼 수 없다.
조선 개국의 최대 공신이자 정승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인데도, 정도전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다.
정도전의 출생지에 관해서는 단양설, 개경설, 양주 삼각산설, 경북 영주 혹은 봉화설 등, 여러 학설과 주장이 혼재한다. 정도전은 벼슬길에 오른 이후, 불분명한 출생과 더불어 어머니 쪽의 가계가 천하고 명확하지 않다는 이류로 여러 차례 곤욕을 치렀다.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이 임금이 된 후 편찬한 『태조실록』에서도, 평생 주홍글씨처럼 정도전을 따라다녔던 ‘외가의 천한 신분’을 지나치도록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음.
‘정도전의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밝지 못하다’
‘정도전은 천지(賤地)에서 몸을 일으켜, 높은 벼슬에 올랐다’
철저하게 ‘정치적인 인간’이었던 정도전은 자신의 인생이나 정치적 행보에 이롭기는커녕, 오히려 장애가 되는 외가에 연고해서 자신의 호를 삼을 까닭이 없다.
정도전은 1362년(공민왕 1)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올랐는데, 이후 공민왕이 신돈을 중용하자, 크게 실망해 삼각산의 옛집으로 낙향한다.
경북 영주에서 부모상을 치른 후 다시 관직에 나간 정도전은, 신돈이 공민왕에게 죽은 후 순조로운 관직생활을 했으나, 공민왕이 시해당하고, 우왕을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운 권신 이인임이 득세하면서, 그들과 권문세족의 친원(親元) 정책에 맞서다, 전라도 나주로 유배형에 처해진다.
이곳에서 정도전은 천민들이 거주하는 부곡(部曲)에 머물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피부로 체감했고, 훗날 고려를 멸망시켜야 할 정치적 명분의 하나로 삼은 ‘민본(民本)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1377년 유배지에서 풀려나 경북 영주로 갔다가, 왜구의 난리 때문에 삼각산 아래 옛집에 돌아왔다.
그에게는 개경에는 들어올 수 없다는 금족령이 내려져 있었기에, 삼각산 아래 ‘삼봉재’라 이름 붙인 거처에서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삼각산 삼봉재에서 부평, 김포 등지로 거처를 옮기면서, 6년 여간 망명객 아닌 망명객으로 살다가, 1383년 가을 변방의 함주막사(咸主幕舍)로 이성계를 찾아가게 된다.
맹자의 사상은 두 가지 점에서 독창적이라고 하는데, 그 하나가 이른바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고 하는 천명개혁(天命改革)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백성[民]이 가장 우선이고, 그 다음은 사직(社稷, 국가)이고, 가장 마지막이 임금[王]이라고 한 민본(民本) 사상이다.
정도전은 삼각산 삼봉재에서 야심만만하게 ‘역성혁명과 민본 사상’의 정치 철학과 이를 구현할 새로운 나라에 대한 정치적 구상을 마무리한 다음, ‘천명(天命)의 소재’를 찾아 이성계를 만나러 머나먼 변방으로 길을 떠났던 것이다.
정도전의 호가 ‘도담 삼봉’이 아니라, ‘삼각산 삼봉’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에 더 수긍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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