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 정조 이산
- ‘임금은 모든 신하와 백성의 스승‘이라는 군사(君師)라고 자처한 제왕
# 홍재(弘齋) : “군자는 도량이 넓어야 한다!”
조선에서 임금은 제왕인 동시에 한 사람의 유학자였기 때문에, 호를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선비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호학군주(好學君主)였던 정조는 스스로 다양한 호를 지어 자신의 뜻과 철학을 세상에 드러냈다.
홍재(弘齋),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홍우일인재(弘于一人齋) 등, 정조가 남긴 호는 다른 어떤 선비들의 호보다 독특하고 다채롭다.
정조는 임금이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학자에서 찾았던 사람이다.
정조가 가장 먼저 사용한 호는 왕세손 시절 자신이 거처하던 동궁의 연침(燕寢, 침소 혹은 침전)에 이름붙인 ‘홍재(弘齋)’였다.
‘선비는 가히 도량(度量)이 넓고, 마음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 『논어(論語)』 「태백(泰伯)」편
정조는 증자가 선비가 갖추어야 할 자질로 언급한 ‘홍(弘)’과 ‘의(毅)’ 중, 홍(弘)을 취해 자신의 생애 첫 호로 삼았다. 여기에서 홍(弘)은 ‘관대하다 혹은 넓다’는 뜻으로 도량이 넓은 것을 말하고, 의(毅)는 ‘굳세다’는 뜻으로 마음이 굳센 것을 가리킨다.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는 정조가 왕세손 시절 남몰래 기록해 비밀리에 간직하고 있던, 일기 형식의 비망록(備忘錄)이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정적들은, 왕세손을 모함하고 무고해 내쫓으려 했고, 심지어는 동궁의 관리들을 매수하거나 제거한 다음 왕세손을 암살하려는 음모까지 꾸몄다.
정조는 ‘홍재’라는 호를 통해 훗날 자신이 왕위에 오르더라도, 넓은 도량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 정적을 대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정조는 학자 군주였지만, 또한 왕세손 시절부터 예리한 안목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정치적 계책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던 노련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왕세손 시절 호에 새긴 ‘홍(弘)’자의 뜻처럼 넓은 도량으로 정적들을 상대했다.
화완옹주, 정후겸, 홍인한, 김구주 등 자신을 직접적으로 해치려고 모의한 역적들과 그 추종 세력에 대해서는 일벌백계 차원에서 중형(重刑)을 가했다. 그러나 이들의 뿌리이자 최대 정적이었던 노론(老論)이라는 붕당에 대해서는 국정 운영의 파트너로 대우했다.
그리하여 정조는 세종과 더불어 조선사를 빛낸 최고의 성군으로 자신의 치세(治世)를 이끌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정조의 제왕론(帝王論)인 ‘군사(君師)’, 즉 ‘임금은 모든 신하와 백성의 스승’이라는 독특한 철학에 있었다.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은, 임금에게 죽을 때까지 학문적 자질과 능력을 요구한,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문치(文治)의 나라였다. ‘경연제도(經筵制度)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조선의 임금은 끊임없이 학문을 닦고 가르침을 받아야 할 학생에 다름없었다. 이때 임금은 제자였고 유학과 성리학에 능숙했던 엘리트 집단 출신의 신하들은 스승이었다.
그런데 정조는 이러한 관계를 역전시켜 버렸다. 그는 ‘군사(君師)’라고 자처하며, 오히려 신하들을 가르쳤다. 경연의 자리에서도 시험 대상은 정조가 아니라 신하들이었다.
정조는 권력이 아니라 자신의 학문적 혹은 지적 능력으로 신하들을 다스린 임금이었다. 세종 이외에 이러한 임금은 없었다.
그것은 정조가 조정 안의 신하들은 물론이고, 조정 밖의 유학자(성리학자)들을 압도할 만큼, 높은 수준의 학문적·지적 경지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반증해준다.
정조는 연암 박지원이나 다산 정약용과 같은 당대 최고의 학자와지식인들이 스스럼없이 ‘임금이자 스승’이라고 여길 만큼 높은 학문과 깊은 식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당대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 ‘군사(君師)’라고 자처한 정조를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사람은 없다.
정조는 왕세손 시절부터 학문과 독서를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당대의 어떤 지식인이나 학자들보다 높고 넓은 정신세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정적들을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가르쳐서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 교화의 대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임금은 모든 신하와 백성의 스승’이라는 논리는, 정적들을 복수의 대상이 아니라 교화의 대상으로 보겠다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죄인의 아들’로 더러운 피가 흐른다는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채 끝내 폭군이 되었고, 광해군은 정비(正妃)의 출생이 아닌 후궁의 소생이라는 콤플렉스로 말미암아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지녔음에도 암군(暗君)의 신세를 모면하지 못했던 반면, 정조는 자신을 죄인의 아들로 만든 정적들을 초월해 넓고 깊은 학문 세계와 높고 당당한 정신세계를 구축하면서, 오히려 그들을 스승이 제자를 대하듯 혹은 아버지가 자식을 대하듯 다스렸던 셈이다.
따라서 정조 나름의 독특한 정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군사론(君師論)’은 정적조차 교화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한, 높고 깊은 뜻이 새겨져 있다고 할 것이다.
정조는 일찍이 어떤 임금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184권 100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개인 문집(文集)인 『홍재전서(弘齋全書)』를 남겼다.
『송자대전(宋子大典)』의 우암 송시열이나, 『성호사설(星湖俟說)』과 『성호전집(星湖全集)』의 성호 이익, 그리고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다산 정약용에 견줄 만한 저술 분량이다.
더욱이 송시열과 이익은 83세까지 장수했고, 정약용 역시 75세까지 살았던 반면, 정조는 49세의 나이로 단명(短命)했다.
그런 점에서 정조는 ‘군사(君師)’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제왕이었다고 할 수 있다.
#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 : “붕당(朋黨)과 신분을 따지지 않고, 오직 인재만을 취해 온 세상이 협력하도록 하겠다!”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이후에도 정조는 정적들의 암살 시도와 역모 사건에 시달려야 했다. 정조에 대한 첫 번째 암살 시도는, 즉위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1777년 7월 28일과 8월 11일 밤, 침소에까지 찾아든 자객에 의해 일어났다. 당시 수포군에 붙잡힌 자객은 전흥문이라는 자였는데, 심문 과정에서 그는 “홍삼범은 임금이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아버지 홍술해와 홍지해를 섬으로 유배 보내고, 다시 홍인한과 정후겸을 사사(賜死)하자, 임금을 시해하기로 결심한 다음 자객을 불러 모았다.”라고 실토했다.
즉위 2년을 넘긴 1778년 7월 18일에는 서명완의 고변으로 역모 사건이 일어났고, 1782년(정조 6)에는 참언(讖言)으로 민심을 뒤흔든 술사(術士)들이 개입한 전국적 규모의 역모 사건이 발생했다.
1785년(정조 9) 2월 29일에도 고변에 의해 역모를 꾸민 일당을 토벌하는 일이 있었고, 1786년(정조 10)과 1787년(정조 11) 역시 연이어서 크고 작은 역모 사건이 일어났다.
정조 스스로 임금에 오른 지 1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국이 안정됐다고 말한 것처럼, 1788년(정조 12)에 들어와서야 암살 음모와 역모 사건이 잠잠해졌다.
임금의 자리에 오른 후 12년 동안이나 암살과 역모 사건에 시달렸다는 것은, 노론 세력의 힘과 영향력이 그만큼 거대하다는 사실을 반증했다.
정국이 안정되자, 정조는 전격적이고 과감한 인사 조치를 단행했다. 남인(南人)인 번암(樊巖)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한 것이다. 80년 만에 나온 남인 출신의 정승이었다.
『정조실록』에도 채제공을 ‘특별히’ 우의정에 임명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정조의 행동은 숙종 이후 80여 년 가까이 조정에서 배척당한 남인을, 노론을 견제할 정치 세력이자, 개혁 정치의 파트너로 삼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세력 판도의 변화와 더불어, 정조는 『서경(書經)』에서 또 다른 뜻을 취해 자호를 지었다. 재위 14년이 되는 1790년, 자신의 침실에 새로이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에는 “붕당과 신분을 따지지 않고, 오직 인재만을 취해 온 세상이 협력하도록 하겠다.”라는 ‘탕평(蕩平)’의 정치 철학이 담겨 있었다. ‘탕탕평평’은 유학의 3경(三經) 중 하나인 『서경』 「홍범(洪範)」 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무편무당(無偏無黨)하면 왕도탕탕(王道蕩蕩)하며, 무당무편(無黨無偏)하면 왕도평평(王道平平)하며, ···
[어느 한 쪽 의견에 치우치지 않고 어느 한 쪽 당파(黨派)에 치우치지 않으면, 왕도(王道)가 넓고 깊을 것이다. 어느 한쪽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어느 한쪽 의견에 치우치지 않으면, 왕도(王道)가 평탄하고 평탄할 것이다.]
- 『서경』 「홍범(洪範)」 편
정조는 평소 자신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글로 적어 기록해 두었는데, 이 글을 모아 엮은 것이 『일득록(日得錄)』이다.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치열한 사색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로마제국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과 견줄 만한 책이다.
이 『일득록』의 「정사(政事)」편에서 정조는 침실의 이름을 ‘탕탕평평실’이라고 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였다.
탕평정치(蕩平政治)는 영조 때 처음 나왔다. 이때 탕평책의 핵심은 ‘쌍거호대(雙擧互對)’였다. 이것은 한 당파의 인물을 등용하면 반드시 대등한 직위에 상대 당파의 인물을 등용하는 인사 정책이다. 나쁘게 말하자면 붕당의 머릿수를 맞춰 채우는 형식적인 정책에 불과했다. 남인을 등용하면서 노론을 등용하고, 소론을 등용하면서도 노론을 등용한다면, 다른 당파와 비교해 노론은 2~3배 이상의 세력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조정을 장악한 노론은 자기 당파의 사람들끼리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요직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정조 16년인 1792년 채제공이 우의정에 임명되기 이전 80여 년 동안 남인 출신으로 정승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영조 시대 내내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이 얼마나 거대한 집단을 형성할 수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정조는 영조 시대의 탕평책을 획기적으로 개혁한 새로운 탕평책을 추진했다. 정조는 탕평책의 핵심 취지와 기본 철학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었다. ‘붕당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 있는 인재를 취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정조 탕평책의 근본정신이었다.
영조 시대와 다른 정조 시대 탕평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로 붕당을 초월해 그동안 조정에서 배척당한 채 재야에 묻혀 있던 인재들을 과감하게 중용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남인 실학파의 거목인 성호 이익의 종손(從孫) 금대(金帶) 이가환이다. 공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등 조정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던 이가환은 특히 정조 개혁 정치의 파트너였던 남인의 상징적인 존재이자 실질적 리더였다.
영조의 탕평책이 당파적 안배를 고려한 소극적인 정책이었다면, 정조의 탕평책은 당파를 초월해 조정 안팎에서 능력 있는 사람을 발굴해 중용하는 적극적인 정책이었다.
정조 탕평책의 두 번째 특징은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계(抄啓)란 본래 의정부(議政府)에서 학문적 재능을 갖춘 젊은 인재들을 선발해 임금에게 보고하는 제도이다.
그런데 정조는 37세 이하의 당하관(堂下官) 가운데 참신하고 유능한 관료들을 선발해 초계문신이라고 부르도록 하고, 규장각(奎章閣)에서 학문 연마 및 연구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매월 두 차례의 구술 고사와 한 차례의 필답 고사를 통해 성적을 평가하고 상벌을 내렸다.
정조는 몸소 초계문신들에 대한 강론에 나서는 한편, 직접 시험 감독이 되어 채점을 하기도 했다.
규장각이라는 공간과 초계문신이라는 제도를 통해, 정조는 한 사람의 스승이 되어, 제자나 다름없는 젊은 개혁 인재들을 가르쳤다고 하겠다.
이 때문에 규장각은 국왕과 조정의 중신 그리고 유능하고 전도유망한 젊은 관료들이 모여 학문을 연구·토론하고, 나라의 정책과 발전 방향을 의논하는 실질적인 정치의 중심 무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정조 즉위 6년째인 1781년부터 정조가 사망한 1800년까지 20여 년 동안 초계문신에 선발된 관료들이 138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 초계문신 가운데 정약용은 정조가 가장 총애한 ‘최우등 개혁 인재’였다. 탕탕평평의 원칙에 따라 초계문신을 선발했기에 남인 출신의 정약용은 물론, 정조 시대 내내 최대의 정적이었던 노론 벽파의 서영보, 노론 시파의 김조순, 소론의 서유구 등 다양한 당파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될 수 있었다.
정조 탕평책의 세 번째 특징이자 가장 혁신적인 정책은 ‘서얼허통(庶孼許通)’이다. 정조는 신분과 출신 배경을 초월해 인재들이 자신의 재주와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정조는 즉위 초인 1777년 3월 21일에 이조와 병조에 명을 내려, 서얼 출신의 관직 진출을 위한 절목(節目)을 상세하게 마련하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들 서류(庶類)도 나의 신하요 자식이다. 그런데 그들이 제자리를 얻지 못하고, 또한 그들이 자신의 포부도 펴보지 못하게 한다면, 이것 또한 과인의 허물이 된다.”
이 서얼허통의 가장 큰 수혜자가 다름 아닌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이수 등 서얼 출신의 규장각 ‘4검서관’이다. 1779년(정조 3) 이덕무를 시작으로 차례로 검서관에 발탁된 이들 4검서관은, 정조 시대의 ‘문치와 문예 부흥’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탕평정치는 정조가 사망한 후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와 같은 집권 노론 가문의 ‘세도정치(世道政治)’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당하고 말았다.
#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 “달빛이 비추는 개울은 만(萬)개이지만, 밝은 달은 하나일 뿐이다!”
정조는 사망하기 2년 전인 1798년에 다시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새로운 호를 지었다.
달이 만 개의 개울을 비추듯이, 자신의 다스림이 일부 특권 계층이 아닌 만백성에게 두루 혜택이 미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글까지 지어 발표했다.
하나의 달이 만 개의 개울을 비추는 것처럼, 한 사람의 제왕으로서 만백성에게 두루 은택(恩澤)을 베풀겠다는 정조의 뜻과 의지가 반영된 대표적인 개혁 정책은 ‘노비 제도의 혁파’와 ‘신해통공(辛亥通共)’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사회에서 노비는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되었다. 임금이 은택을 베풀어야 할 ‘민(民)’, 즉 백성의 범주에 노비는 포함되지 않았다. 유학에서 정치의 대의명분으로 주창한 ‘민본(民本)’에 노비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런데 정조는 노비 역시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신민(臣民)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찌 귀한 자가 있고 천한 자가 있겠느냐?”라고 역설했다.
정조의 이러한 사고는 유학의 ‘민본주의’ 사상보다 한발 더 나아간 근대적 개념의 ‘인본주의’ 사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신해통공’은 시전 상인들의 독점적 상업 특권과 횡포 때문에 큰 피해를 입고 있던 소상인, 행상(行商), 그리고 노점상 등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해주는 경제 조치였다. 통공 정책은 정조 개혁의 선봉장이나 다름없는 채제공이 주도했는데, 당시 이 정책에 크게 반발해 ‘통공정책을 폐지하라’고 시위를 한 시전상인들에게 한 말은 정조의 인본주의 철학을 확인해주고 있다.
양반이나 특권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보호해주는 임금이 아니라, 일반 백성 심지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노비에게까지 은택을 베푸는 제왕이 되겠다는 뜻과 철학은 정조 재위 24년 동안 여러 가지 개혁 정책으로 나타났으나, 노론 벽파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의 끊임없는 저항과 반발에 부딪쳤다. 그래서 개혁은 부분적인 성과를 내는 데 그치거나 혹은 유명무실해지기 일쑤였고, 심지어 좌초당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까닭에 정조는 만백성의 주인이자 보호자로서, 그들에게 혜택이 미칠 수 있도록, 자신이 추진해온 개혁 정책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강력한 뜻과 의지를 담아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호를 지었던 것이다.
# 홍우일인재(弘于一人齋) : “해와 달의 광화(光華)가 한 사람에 의해 널리 퍼져 나간다!”
정조는 184권 100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저작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를 남겼다. 『홍재전서』의 편찬 작업은 2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제1차는 정조가 살아있던 1799년(정조 23) 12월에 이루어졌다. 12월 21일 규장각에서 2본의 필사본을 완성해 정조에게 올렸다. 이때 정조가 자신의 어제 필사본에 붙인 이름이 『홍우일인재전서(弘于一人齋全書)』였다.
정조가 사망한 직후에 규장각에서 다시 정조의 어제를 정리해 편찬하는 2차 작업을 하여, 이듬해(1801년, 순조 1) 12월 11일에 완성된 필사본을 순조에게 올렸고, 그 이름을 동궁(왕세손) 시절 정조가 처음으로 자호한 홍재(弘齋)를 취해 『홍재전서』라고 했다.
정조가 생전에 간행한 자신의 문집에 이름 붙인 ‘홍우일인재(弘于一人齋)’는 그가 사용한 마지막 호라고 할 수 있다.
이 호는 『상서대전(尙書大傳)』 「우하전(虞夏傳)」에 나오는 ‘일월광화 홍우일인(日月光華 弘于一人)’에서 의미를 취한 것이다. “해와 달의 광화(光華, 빛)가 한 사람에 의해 널리 퍼져 나간다.”라는 뜻이다.
정조는 이전 ‘만천명월주인옹’에서 달을 빌렸듯이, 여기에서는 달은 물론 해까지 빌려 밤낮없이 만백성에게 빛을 비추는 것이야말로 제왕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라고 밝혔다.
당시 정조는 3단으로 된 보관함을 따로 만들어 ‘홍우일인재전서’라고 이름 붙인 문집을 간직했고, 다시 여기에 한 편의 글과 명문(銘文)을 지어 자신의 뜻을 밝혔다.
『홍우일인재전서』는 곧 나의 저술이다. ··· 학문은 노(魯)나라의 공자와 추(鄒)나라의 맹자를 종주(宗主)로 삼고, 정치는 하(夏)·은(殷)·주(周) 삼대를 숭상하였다.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을 일컬어 덕목(德目)으로 삼고, 예의와 염치를 일컬어 세속의 규범으로 삼았다. ··· 마침내 종이를 발라 만든 보관함에 넣고 쌓아두게 하였다. 3층으로 된 보관함의 넓이는 겨우 세 권의 책을 넣을 수 있다. ··· ‘어진 자는 근심하지 않고, 지혜로운 자는 현혹되지 않고, 용기가 있는 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군자의 도리 세 가지란 바로 자신의 도(道)가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어진[仁] 것이 아닌 집에는 거처하지 않고, 의(義)로운 것이 아닌 길은 밟지 않았다. 이러한 것을 문자로 기록하였으니, 내 몸속의 피가 흘러나온 것임을 자연히 속일 수 없다.
- 『홍재전서』 「홍우일인재전서의 장명(欌銘) 병서(幷序)」
정조는 이 글의 마지막에 명문을 새겨 성군(聖君)과 현자(賢者)의 도리와 단서를 터득해 나라와 백성을 구제하려고 노력했던 자신의 일생을 노래했다.
임금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학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철학자 군주’ 정조의 자부심과 더불어, 그가 도달했던 높은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글이다.
내 일찍이 듣건대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이 있다.
풍운(風雲)의 바깥에서 활달하게 움직이고
우주 가운데에 충만(充滿)하여
탁월한 그 문장이여
텅 비고 넓은 그 공정함이여
아득히 깊고 엄숙한 곳에 올라 바라보면
권세(權勢)란 대개 만물을 변화시키는 봄의 공교로움과 비슷하네
내가 오로지 정밀하고 깊고 넓게 생각해 모으고 머무르니
비록 감히 도통(道通)의 전수에는 견줄 수 없겠지만
경서(經書)를 씨줄로 삼고 사서(史書)를 날줄로 엮어
생각하건대 성군(聖君)인 복희씨·신농씨·요임금·순임금·우왕·탕왕·문왕·무왕과, 성현(聖賢)인 공자·맹자·주자의 단서와 여분을 스스로 터득한 사람은
구태여 묻지 않더라도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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