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 이익과 순암 안정복
- 실학의 산실(産室), ‘성호학파’
# 지식 혁명, 학문과 지식에 대한 사고의 대전환(大轉換)
역사에는 일세(一世)를 지배하는 시대적 추세와 정신 사조가 있다.
율곡 이이가 산 16세기를 ‘사림의 시대’, 우암 송시열이 산 17세기를 ‘보수의 시대’라고 표현한다.
18세기는 ‘혁신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100년 동안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 등 모든 방면에서 최대의 화두는 단연 개혁(改革) 혹은 혁신(革新)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조선은 가히 ‘지식 혁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기존의 학문과 지식에 대한 사고의 대전환이 일어났다.
성리학(주자학)만이 유일한 가치이자 학문이라고 여겼던 전통적인 개념의 지식인(사대부)들이, 중인 이하의 계층이나 배우고 다루는 ‘잡학(雜學)’이라 외면하며 배척한 영역들에, 새롭게 학문적 가치를 부여하고 공부와 탐구의 중요한 대상으로 삼았다.
성리학 세계에서 학문과 지식의 정통은 경학(經學)과 사서(史書)였다. 사대부에게 유학의 경전이나 성리학서 외에 읽어도 될 만한 서책은 역사서가 허용될 뿐이었다.
성호(星湖) 이익은 “나는 사람과 만나 대화할 때 일찍이 유학의 학술을 갖고 말하지 않았다. 아무런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사람들의 실제 생활에 아무런 이로움도 없는 유학이나 성리학의 고담준론보다는, 일상생활에 유용하고 사회 현실에 필요한 학문과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실용적인 사고와 현실적인 용도에 바탕을 두고 학문을 해야 한다는 이익의 철학은, 당시 사대부들이 외면하고 배척했던 경제·풍속·천문·지리·문화·공예·종교·음악·산학(算學)·과학 기술 등 모든 분야로 학문과 지식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평생을 경학과 사서에 파묻혀 사는 것보다는, 오히려 세상에 유용하고 백성에 이로운 학문을 공부하고 지식을 탐구하며 정보를 검색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사고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실학’이라고 부르는 이익의 철학이었다.
이익은 이러한 자신의 철학을 담은 학문을 가리켜 ‘사설(僿說)’, 곧 ‘자질구레한 혹은 하찮은 학설이나 이론’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익의 수제자였던 안정복은 이러한 학문을 가리켜 ‘하학(下學)’이라고까지 불렀다. 하학은 공자의 ‘하학(下學)하고 상달(上達)한다’는 말에서 취한 것으로, 안정복은 하학에 대해서 “주변에서 흔하게 보거나 들을 수 있고 실제 생활에 가까운 것을 말한다. ··· 일상생활에서 유용한 도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익은 서양의 학문과 지식은 물론, 종교(천주교)에 대해서도 매우 자유롭고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주자학자들은 명나라가 청나라에 멸망당하자, 중화의 적통이 조선으로 옮겨왔다는 소중화(小中華)의 이념을 만들어내고, 청나라와 서양의 사상과 문화를 오랑캐의 것으로 보고, 배척과 증오의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에 대해서는, 사문(斯文, 주자학)을 어지럽히는 사학(邪學)의 근원이라고 보아 크게 탄압했고, 천주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서, 서양의 지식과 과학 기술의 도입까지 거부했다.
그러나 이익은 서양의 천문지리학을 공부하고 수용하면서, 세계를 ‘중화와 오랑캐’로 구분하는 주자학의 화이론적 세계관이 얼마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논리인지를 깨달았다.
18세기 조선에는 유럽 출신의 선교사와 학자들이 서양의 학문과 지식을 한문으로 번역해 소개한 다양한 종류의 서적들이 들어와 있었다. 이익은 이들 서학서(西學書)를 거의 열람하고 탐독으로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서양 전문가였다. 특히 그는 마테오 리치가 쓴 종교 교리서인 『천주실의』에 대한 발문(跋文)까지 지었다.
실학의 양대 산맥으로 어깨를 나란히 했던 북학파에 대비하여, 성호학파(星湖學派)를 서학파(西學派)고 부르는 것은, 모든 방면에 걸쳐 서양의 학문과 지식을 적극적으로 탐독하고 비판적으로 해석하면서, 새로운 학풍을 불러일으켰던 이익의 지적 탐구와 작업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18세기를 혁신의 시대, 특히 ‘지식 혁명의 시대’라고 부르는 이유는,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를 섭렵하고 집대성하겠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적 모험과 여정을 행동에 옮긴, 이른바 ‘백과전서파’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인류의 지성사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지적 작업과 그 성과물은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이 편찬한 『백과전서』(정확한 제목은 ‘백과전서 또는 과학, 기술, 공예에 관한 합리적 사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세계 백과사전의 대명사로 불리는 영국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역시 18세기 중후반인 1768년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일본에서는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라는 백과사전이 1713년에 나왔다.
중국에서는 1728년에 모든 분야의 학문과 지식을 총망라한 백과사전이자, 고금의 도서를 집대성한 총서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이 간행되었고, 다시 이 고금도서집성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1785년에는 『사고전서(四庫全書)』라는 역사상 최고·최대 규모의 총서를 완성하였다.
동아시아에서는 ‘화이론적 세계관’이 몰락하면서 유학 혹은 성리학이라는 정치-지식 권력이 쇠퇴했고, 유럽에서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붕괴되면서 종교와 신학의 정치-지식 권력이 힘을 잃었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학문과 사상 그리고 최신의 지식과 정보, 특히 일상생활과 관련된 실용적인 지식과 혁신적인 산업 및 과학 기술을 모두 아울러 집대성하기에 가장 적합한 저술 형태가 바로 ‘백과사전’이었다.
이익은 40세를 전후한 시기부터, 책을 읽고 사색을 통해 얻거나 제자들과 질문하고 답변한 수많은 내용들을 기록해 두었다. 이익의 나이 80세가 되었을 때, 집안의 조카이자 제자들이 이 기록들을 정리해 책으로 편찬했고, 이익은 여기에다 『성호사설(星湖俟說)』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책은 이익의 새로운 철학을 담은 학문과 지식인 ‘사설(僿說)’을 종합하고 집대성해놓은 백과사전이었다.
『성호사설』은 고대로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조선의 학문과 지식은 물론, 외부 세계로부터 조선에 들어온 모든 지식과 정보를 집대성한 백과사전의 결정체였다.
안정복 역시 ‘백과사전파’의 일원이었다. 안정복은 『성호사설』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다시 뽑아 엮은 『성호사설유선(星湖俟說類選)』을 편찬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 또한 백과사전류의 서책을 남겼다.
잡동사니와 같은 잡다한 지식과 정보를 모아 놓았다고 해서, 스스로 ‘잡동산이(雜同散異)’라고 이름 붙인 안정복의 책에는, 경학(經學)과 조선 및 중국의 각종 제도·기록 및 문헌, 사물의 명칭이나 도수(度數), 백성의 일상생활이나 야담 및 야화 등이 실려 있다.
이익의 ‘사설(僿說)’에 견줄 수 있는 안정복의 ‘하학(下學)’의 성과물이 다름 아닌 『잡동산이』였다.
이렇듯 이익과 안정복은 사제지간으로 18세기 ‘지식 혁명’을 선도한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이었다.
이익이 이룩한 거대한 지적 탐구와 작업의 결과물은, 그의 직전 제자와 그를 사숙(私淑)한 제자들에게 전승되어, 실학의 최대 학파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성호학파’를 형성했다.
남인 계열이 중추를 이룬 성호학파는 그 인적 규모와 역량 면에서 노론 계열의 북학파를 능가했고, 소론 계열의 실학파를 대표하는 달성 서씨 가문을 압도했다.
이익을 따라 배운 제자들의 구성은 혈족인 여주 이씨 가문 출신의 제자들, 안정복과 같은 가계(家系) 이외의 제자들, 정약용처럼 이익이 사망한 후 사숙한 제자들로 나누어 살펴보아야 할 만큼 그 수가 많다.
이익의 아들인 이맹휴는 실용적인 학문에 뛰어났고, 조카인 이용휴와 이만휴는 각각 천문학과 문학 그리고 경제학에 밝았다. 손자뻘인 이중환은 지리학, 이가환은 역사학과 서학, 이철환은 박물학(백과사전)으로 이름을 날렸다.
안정복은 역사학, 황운대는 천문학, 윤동규는 지리학, 신후담은 문학, 권철신은 경학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익을 사숙한 제자로는, 실학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받는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 사실주의 문학을 창달했다고 평가받는 이학규 등이 있다.
학자들이 이익을 가리켜 ‘실학의 마르지 않는 샘’ 혹은 ‘실학의 무수한 별들을 길러낸 거대한 호수’라고 하였다.
# 성호(星湖) : 실학의 큰 별들을 품은 성호장(星湖莊)과 육영재(六楹齋)
이익의 집안은 남인 명문가였다. 그의 아버지 이하진은 숙종 때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을 지낼 만큼 남인을 대표하는 거물급 인사였다.
이하진은 이익이 태어나기 2년 전인 1679년에, 당시 남인 청남파(淸南派)의 영수였던 허목이 사직하고 조정을 떠날 때, 이를 적극 만류하고 나섰다가 정쟁에 휘말려, 외직인 진주목사로 좌천되어 나갔다.
그런데 1680년(숙종 6)에 남인이 대거 숙청당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났다. 이때 이하진은 진주목사에서 파직을 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평안도 운산(雲山)으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익은 1681년 10월 18일 아버지가 귀양살이하던 운산에서 출생했다. 이익이 태어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1682년 6월 14일 아버지 이하진은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이익은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선대로부터 집안의 터전이 되어온 광주(廣州, 지금의 경기도 안산)의 첨성촌(瞻星村)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이익은 평생토록 첨성촌에서 지냈다.
이익이 살고 있던 첨성촌의 집은 ‘성호지빈(星湖之濱)’, 곧 성호라고 불리는 호수가에 자리하고 있었고, 별빛이 아름답게 비추는 호수인 이 ‘성호(星湖)’를 自號로 삼았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은 이익에게 정신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둘째 형 이잠(李潛)이었다.
1706년(숙종 32) 이잠은 예전에 세자(장희빈 소생으로 훗날의 경종) 책봉을 격렬하게 반대했던 노론의 영수 송시열을 논박하고, 권·척신(權戚臣)들이 사방에서 세자에게 칼날을 겨누고 있다는 요지의 상소를 했다.
그러나 이미 남인을 내친 숙종은, 이잠의 상소가 남인의 잔당이 노론의 대신을 모함하는 것이라 여겨, 이잠을 잡아들인 다음 친히 국문했다. 당시 이잠은 벼슬하지 않은 유학자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국(親鞫)을 당할 정도로 숙종과 노론의 분노는 심했다.
이잠은 무려 18차례에 걸친 혹독한 고신(拷訊)을 당했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버티다 끝내 장살(杖殺)당하고 만다.
이로 인해 이익은 과거 공부나 벼슬에 나갈 뜻을 버렸고, 이때부터 죽음을 맞는 1763년까지 무려 57년간 성호가의 집 성호장(星湖莊)에 몸을 의탁한 채, 독서와 사색과 저술을 일생의 소임으로 알고 살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익은 이전 시대 조선의 어떤 지식인도 밟지 않은 학문의 영역을 섭렵했고,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지식의 경지에 올랐고, 명실상부한 실학의 일인자이자 큰 스승으로 우뚝 솟았다.
그리고 그의 지적 작업은 나이 80세 때 집안의 조카이자 제자들이 정리해 편찬한 『성호사설』에 고스란히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18세기 조선의 지식인이 도달한 학문과 지식의 넓이와 높이, 그리고 깊이를 보여주는 명저 중의 명저다.
이익은 ‘육영재(六楹齋)’라고 명명한 성호장의 바깥채에서 집안의 조카들과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약용은 1801년 신유사옥 때 천주학의 수괴이자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한, 이익의 종손(從孫)이자 제자였던 이가환의 전기라고 할 수 있는 ‘정헌묘지명’을 비밀리에 썼다. 여기에서 정약용은 이가환의 학문이 모두 이익의 가학(家學)에서 나왔다고 소개했다.
“우리 성호선생은 하늘이 보내신 특출한 호걸이다. 도덕과 학문이 고금(古今)을 초월했고, 집안의 자제와 제자들 모두 대학자가 되었다. 일찍이 한 사람의 문하에서 학문의 융성함이 이러한 사례는 없었다.”
안정복이 이익을 직접 만나 가르침을 받은 일수(日數)는 평생에 걸쳐 모두 합해봐야 4일에 지나지 않고, 더욱이 이익이 세상을 떠나기 전 10여 년 동안에는 단 한 번의 만남도 갖지 못하고, 다만 편지 왕래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가르침을 주고 배움을 받았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안정복은 오늘날까지 이익의 학문을 전수한 수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학문과 지식의 도는 많은 말과 가르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득과 체득에 있을 뿐이라는 이익의 뜻을 안정복이 잘 알고 실천했기 때문이다.
안정복이 이익의 학풍을 따르면서도,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저술해 역사학 방면에서 대가의 반열에 올랐던 것이나, 이익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862년에 태어난 정약용이 훗날 “나의 큰 꿈은 성호선생을 따라 사숙하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다.” 라고 했듯이, 이익의 학문과 지식은 후학(後學)들에게 ‘절대적인 가치나 존재’가 아닌, ‘새로운 학문과 미래의 지식으로 가는 나침반’으로 여겼다.
이러한 까닭에 성호학파는 실로 다양한 방면에서 대가들을 배출했고, 이익의 글과 기록은 현재까지 모든 분야에서 무궁무진한 지식의 보고(寶庫)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 순암(順菴) : “천하의 일은 순리(順理)뿐이다!”
『동사강목』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안정복은, 이익의 수제자로 이익 사후 성호학파를 이끈 인물이다.
나이 15세 때 관직에서 물러난 할아버지를 따라 전라도 무주에서 살았던 안정복은, 24세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다음 해(1736년) 10월, 조상의 선영이 자리하고 있는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리로 이주했다. 이때 ‘암(菴)’자 모양으로 집을 짓고 ‘순암(順菴)’이라고 이름 붙였다. ‘천하의 일은 오직 순리(順理)일 뿐이다’라는 뜻을 취한 이름이었다.
1746년 나이 35세 때 안산 첨성촌 성호가의 성호장으로 이익을 찾아가 사제의 인연을 맺은 안정복은, 중년에 접어든 1757년(나이 46세), 스승에게 ‘순암’이라 이름 붙인 집의 모양새와 그 뜻을 설명한 다음, ‘기문(記文)’과 ‘암명(菴銘)’을 지어달라고 청했다.
제자 안정복의 간곡한 청을 받은 이익은 그 즉시 “암기(菴記)를 지어서 보내주었다.”고 한다.
안정복은 이익이 세상을 떠난 후, 유학의 경전 해석과 서학 및 천주교의 수용 여부를 둘러싸고, 성호학파가 우파와 좌파로 갈라설 때, 우파의 수장 역할을 했다. 우파는 경전 해석에 보수적이었고, 서학과 천주교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못해 배타적이었다.
이익의 유지(遺志)와는 어울리지 않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태도였다.
‘순암’이라는 그의 호에서는, 서학에 대해 배타적이면서, 유학의 여러 분야 중 가장 보수적인 성격을 띠는 예학(禮學)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삶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이익은 안정복의 요청에 따라 「순암기」를 써주었는데, ‘순암’의 뜻을 헤아리면서 제자의 마음이 어느 곳에 가 있는지를 간파했고, 그 뜻에 걸맞게 기문(記文)을 써서 보내주면서도, 경계의 말을 덧붙였다.
예학을 배우고 닦되, 지나치게 그것에 빠져 미혹(迷惑)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었다.
안정복은 이익을 따라 배웠다고 하지만, 새롭고 자유롭고 개방적인 학풍보다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유학이나 주자학의 그늘 속에 여전히 갇혀 있던 사람이었다.
이익의 학풍은 서학을 비롯해 천주교와 양명학 등, 당시 성리학자(주자학자)들이 배척한 이단과 사설(邪說)의 학문에 대해서도 매우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이익이 살아있을 때 성호학파 내부에는 예학에서 천주학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학문과 지식 경향이 크게 대립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익이 세상을 떠나자, 성호학파는 크게 갈등을 겪고 분열하게 된다.
안정복은 순암 이외에 ‘영장산객(靈長山客)’이라는 호도 사용했다. 광주 덕곡리에 있는 영장산은 조상의 선영이 있던 성지(聖地)였다.
자신의 자전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영장산객전(靈長山客傳)」
“영장산 속에서 독서하며 ‘영장산객’이라고 자호하였다.”
안정복은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영장산 아래에 이택재(麗澤齋)라는 재실을 짓고, 조상을 모시는 한편, 제자들을 가르치는 강학의 공간으로 삼았다.
안정복은 이익에게 가학(家學)을 전수받은 가계(家系) 측의 수제자인 이병휴가 타계한 1776년 나이 65세 이후부터 실질적으로 성호학파를 이끌었다.
1780년대에 들어와 성호학파는 유학의 경전 해석과 서양 문물을 수용하는 태도와 방식을 둘러싸고 의견을 달리하면서, 우파(보수파)와 좌파(진보파)로 분열되었다. 당시 안정복은 우파의 수장으로 좌파를 맹렬하게 비난하고 공격했다.
서양의 학문과 지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천주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때로는 동조하기까지 했던, 이익의 높고 깊고 넓은 학문 세계와 정신세계를 따라가기에는, 안정복의 삶과 철학에 드리운 유학과 성리학의 그늘이 너무도 짙고 어두웠다.
이익의 학풍은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곧 주자학과 서학, 폐쇄와 개방,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18세기 조선 지식 사회의 위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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