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론, 야당과 보수언론의 자가당착
사면론이 쏟아지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과 박형준 부산시장은 문재인 대통령과의 첫 만남에서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을 요청했다. 국민 통합을 위해 대통령이 결단하라는 취지다. 재계와 보수언론은 ‘반도체 위기론’을 내세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사면하라고 주장한다. 정치권과 재계에서 사면론이 동시에 터져 나온 건 우연이 아니다. 4·7 재보궐선거에서 야당인 국민의힘이 승리하고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이 도전을 받고 있는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대통령의 사면권만큼이나 비민주적인 제도를 찾기도 힘들다. 사면권은 삼권분립과 법치주의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1787년 미국 제헌의회에서 대통령제라는 새로운 제도를 채택하면서 중세 국왕의 특권인 사면권을 온존시킨 건, ‘진정한 정의는 용서를 필요로 한다’는 도덕적 믿음을 구현하고픈 생각에서였을 터다. 그때 조지 메이슨은 ‘사면권이 법을 무시하고 대통령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적으로 활용될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우려를 증명이라도 하듯 1974년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을 사면했다. 가장 최근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퇴임을 불과 몇개월 앞두고 ‘러시아 스캔들’로 유죄 판결을 받은 핵심 측근들을 모조리 사면해버렸다.
한국에서도 쿠데타와 비리 혐의로 중형을 선고받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재벌 총수와 유력 정치인의 사면이 반복해서 이뤄졌다.
우스운 건, 명목상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나라에선 왕 또는 여왕의 사면권이 거의 행사되지 않고 사문화한 반면, 민주주의 제도로서 대통령제를 채택한 미국과 한국에서만 전근대적 사면권은 가장 빈번하게 행사되었다는 점이다.
‘국민 통합’을 내세우는 사면권 행사가 명분 없는 행위라는 건, 역대 대통령들이 사면권의 엄격한 제한을 선거 공약으로 내건 데서도 잘 드러난다. 요즘 사면 대상으로 거론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와 당선자 시절에 ‘특별사면은 국민이 부여한 대통령 권한을 남용하고 국민 뜻을 거스르는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뇌물·횡령 등 5대 중대 부패범죄에 대해선 사면권을 제한하겠다고 후보 시절 약속했다. 이명박·박근혜·이재용 세 사람은 모두 5대 중대 부패범죄에 해당하는 혐의로 수감돼 있다.
더 우스운 건, 이들의 사면을 주장하는 야당과 보수언론의 자가당착이다. 보궐선거를 앞두고 국민의힘은 ‘제왕적인 문재인 대통령의 독선과 독주’를 공격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제왕적 대통령의 독재가 법치주의를 짓밟고 민주주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성명과 논평에서 무수히 비난했다. 그런데 지금은 대통령의 가장 두드러진 ‘제왕적 권한’인 사면권을 자기 당 출신 전직 대통령을 풀어주는 데 사용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선거 전엔 ‘제왕적 대통령제와 단호히 결별할 때’라고 밝혔던 <중앙일보>는 최근 사설에서 수감 중인 이재용 부회장을 미국에 특사로 보내 백신·반도체 외교전에 투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검찰개혁이 법치주의를 훼손한다고 비난하더니, 비리 혐의로 구속된 전직 대통령과 재벌 총수를 풀어달라고 할 때는 ‘제왕적 권한’을 마음껏 써서 법치주의를 훼손하라고 부추기는 셈이다.
바람과 기대는 각기 달랐겠지만, 문재인 정부의 신뢰가 떨어진 데엔 촛불 광장에서 표출된 요구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다는 실망감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요구의 하나가 ‘반칙과 특권 없는 사회’일 것이다. 현 정권 인사들의 ‘내로남불’ 행태가 엘에이치(LH) 사태를 계기로 민심에 불을 질러 불과 몇달 사이에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면론 역시 이 지점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 여기엔 진보 인사들의 ‘내로남불’을 격하게 비난하는 보수진영의 이율배반과, 선거에서 이겼다고 아전인수로 민심을 해석하는 국민의힘의 오판이 함께 녹아 있다. 야당 본색은 보수정당 혁신이 여전히 멀고 먼 과제임을 일깨울 뿐이다.
날카로운 공정의 잣대에도 관용은 필요하고, 공익을 위한 용서는 정의에 온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이명박·박근혜·이재용의 사면과 이걸 주장하는 이들의 사적 이익이 무관하다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19세기 미국 공화주의자들이 걱정했던 대로, 제왕적 사면권의 무절제한 행사를 버젓이 요구하는 퇴행을 21세기에 우리는 지켜보고 있다.
박찬수 ㅣ 선임논설위원
pcs@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92608.html#csidx2749128a99ad8829f655b97f6e5749b
'시사,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산·소득 비례 벌금제’ 도입 늦출 이유 없다 (0) | 2021.04.27 |
---|---|
백신이 남아돌아도 품절되는 이유 (0) | 2021.04.27 |
‘바닷물타기’ 신공 (0) | 2021.04.26 |
때아닌 종부세 완화 논의, 심각한 민심 오독 (0) | 2021.04.23 |
‘더 큰 바보 이론’ 잊어선 안될 암호화폐 거래 (0) | 2021.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