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기회균등만 남은 세계의 비극

道雨 2021. 8. 2. 11:22

기회균등만 남은 세계의 비극

 

 

1970년대 이후 정치철학 논쟁을 주도했던 존 롤스의 <정의론>은 여러 면에서 독특했다. 자유주의자인 롤스는 민주적 사회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있는 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관심사는 평등한 분배가 아니라 ‘허용 가능하고 정당한 불평등’이었다.

 

롤스는 허용할 수 있는 불평등의 조건으로 다음 두 가지를 내걸었다.

첫째, 개인들이 사회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기회균등이었다. 하지만 롤스는 기회가 아무리 균등하게 보장된 사회라 할지라도 부당한 불평등을 온전히 막을 수는 없다고 보았는데, 대개의 사회에서 더 나은 보상과 명예를 성취할 기회 역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라는 용어를 만든 마이클 영은, 롤스야말로 “공정한 기회가 비정한 능력주의 사회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인정하는 저자”라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롤스는 불평등한 분배가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최소수혜자들’의 삶의 질과 인생 전망을 개선해야만 한다‘차등원칙’이란 두번째 조건을 내걸었다. 불평등의 허용이 불평등한 상황을 개선해야 한다는 이 조건은 모순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알고 보면 자원의 분배가 소수에게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사회적 약자의 처지를 악화시키는 불평등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롤스가 내건 이 두 조건은 1970년대 후반부터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그 계기는 지구적 시장의 형성과 디지털 기술의 폭발적 성장이었다.

경쟁을 미덕으로 삼는 지구적 시장에서, 더 나은 보상과 명예가 주어지는 기회에 대한 균등한 보장은, 개인들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삶의 조건이 되었다. 지구적 시장은 이 기회균등의 원칙과 함께 능력주의 사회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 기회균등의 원칙과 함께, 소수에게 집중 분배하는 성향이 있는 디지털 기술이 떠받치는 ‘능력주의 사회’는, 영의 표현처럼 비정했다.

이 새로운 질서에서 차등원칙은 사회보장체계의 쇠퇴 속에 철저히 무시되었고,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극단적 자원의 독점을 허용하는 승자독식과 각자도생의 원칙이었다.

 

이 원칙들을 품은 세계는 그 어느 시대보다 극심한 ‘부와 소득의 양극화’로 치닫고 있다. 그사이 부자들이 ‘슈퍼리치’가 되고, 그들이 ‘울트라리치’로 재탄생하는 동안, 한편에선 중산층조차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에 떠는 처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다행이라 해야 할까? 그 와중에 대다수 사람들은 ‘내가 열심히 살면 어떻게든 되겠지’란 희망은 간직하고 있었다.

 

한데 2020년 갑자기 몰아닥친 팬데믹은 그 막연한 희망마저 산산조각 내버렸다. 다른 재난과 달리 장기간의 팬데믹은 수많은 사람들의 경제활동 그 자체를 멈춰버렸다. 이 멈춤의 속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롤스가 보호하려 했던, ‘기회균등의 원칙이 지켜내지 못한 사회적 약자들’일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지난 5월 한국은행의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소득 하위 20% 가구는 2~4분기 정부지원금을 뺀 소득이 17.1% 줄어, 상위 20% 가구 감소율보다 11배나 높았다. 소득 최하위 20%에 비대면으로 일하기가 어렵고 고용이 불안정한 임시·일용직 가구, 양육 부담이 큰 여성·유자녀 가구가 몰려 있기 때문이다.

반면 통계청 자료에선 2020년 4분기에 상위 20%만이 팬데믹임에도 유일하게 이전보다 소득이 증가했음을 볼 수 있다.물론 이런 현상이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시장과 기술이 지구적 차원에서 하나로 묶여 있는 탓이다.

 

옥스팜은 지난 1월 보고서에서, 팬데믹으로 인해 빈곤층이 급증했으며, 이들의 삶이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는 데 10년이 넘게 걸릴지 모른다는 예측을 내놓았다.

반면 상위 억만장자 1000명의 자산은 9개월 만에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이미 회복되어 있었다. 더불어 세계 10명의 울트라리치들의 자산은, 팬데믹이 시작되고 9개월 동안 5400억달러, 우리 돈으로 595조원이 증가해 있었다.

참고로 2020년 우리나라 예산이 512조였다. 옥스팜은 이 10명의 자산 증가분으로, 전세계 모두에게 백신을 접종하고, 아무도 빈곤층으로 전락하지 않게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것이 차등원칙이 사라지고 기회균등만 남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습이다.

 

김만권 ㅣ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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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06054.html#csidx84e4df4fca54718b0936e749a49b98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