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신라의 금귀걸이

道雨 2021. 11. 2. 18:55

신라의 금귀걸이

 

귀걸이의 부분 명칭

 

 

 

시기별 귀걸이의 모습

 

 

 

굵은고리 귀걸이(太環耳飾)

 

                                  * 경주 황오리 52호묘(6세기) 출토 : 보물 제455

 

 

                                 * 창령 출토

 

 

                              * 경주 보문리 부부총(경주 보문동 합장분 : 普門洞合葬墳) 출토 : 국보 제 90

*** 참고로 경주 보문동 부부총은, 부부가 아닌 두 명의 여성이 묻힌 합장분으로 밝혀짐에 따라, 경주 보문동 합장분으로 명칭이 바뀜.

 

 

 

                                  * 양산 북정리 금조총 출토 : 보물 제 1921호

*** 양산 북정리 금조총은 1990년에 택지 조성 사업중에 발견되어,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다. 양산 북정리 금조총 출토유물을 일괄(금제 새다리, 금동관, 금제 귀고리, 팔찌, 은제 허리띠, 청동제 자루솥 등 금속공예품 6건 40점)하여 2016년에 보물 제 1921호로 지정하였음.

 

가는고리 귀걸이(細環耳飾)

 

                                       * 가는고리 귀걸이의 상세도 

 

 

                                 * 경주 서봉총 출토

 

                  * 경주 금령총 출토

 

                                 * 경주 보문리 부부총(보문동 합장분) 출토

 

                                 * 경주 금관총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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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의 귀에 맺힌 화려함, 금제이식

 

 

'황금의 나라'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나요?
바로 신라입니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도 화려한 금속 장신구를 많이 제작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신라의 화려한 장신구는 신라의 왕족, 귀족의 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장신구로 금관, 유리, 옥석, 금관, 관모, 허리띠, 반지, 신발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신라의 장신구 문화는 고분의 발달과 더불어 4세기 후반부터 나타납니다. 본문에서는 신라의 장신구 중에서도 화려한 금귀걸이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신라 귀걸이의 종류는 다양한데, 그 중에서도 화려함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는 국보 제 90호의 경주 부부총 출토 금귀걸이와 보물 제455호인 경주 황오동 52호분에서 출토된 금귀걸이의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신라 귀걸이 ⓒ 경남 이야기

 

요즘도 귀걸이는 가장 기본적인 장신구 중 하나로, 전체적인 장식 효과에 있어서 포인트를 주는 중요한 아이템입니다. 그런데 신라의 귀걸이는 현대의 시각에서 봐서도 상당한 세련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라 귀걸이의 재료로는 은, , 금속 등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금을 가장 많이 활용했습니다.
  고대 신라의 귀걸이는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주환(귓불에 직접 다는 고리)과 중간식(샛장식)과 최단부의 수하식(드리)을 연결하는 형태입니다. 그리고 중심고리 아래에는 유환(노는 고리)를 거는데, 이를 통해 전체 귀걸이가 길어져보이는 효과를 갖게 됩니다. 귀걸이 각 부분을 연결하는 장치인 연결금구는 금사나 금판을 이용하였습니다. 이 같은 연결 금구의 형태는 고구려의 금제이식의 각부가 땜으로 연결하는 것과 차이점을 보입니다. 

옥전 고분군 출토 금귀걸이 ⓒ 홍승연

   

 

금귀걸이는 한자로 금제이식(金製耳飾)이라고 표기합니다. 금제이식은 주환의 크기에 따라서 장식이 단순한 태환이식(太環耳飾), 장식이 화려한 세환이식(細環耳飾)으로 나뉩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살펴보게 될 부부총 출토 금귀걸이와 황오리 52호분 출토 금귀걸이는 중심고리가 마치 도넛모양으로 생긴 태환이식에 해당됩니다. 태환의 가운데를 빈 공간으로 한 것은 전체 귀걸이의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추정됩니다. 태환은 반원형의 금판 2개를 접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표면에 접합선이 확인됩니다. 태환의 끝은 금판으로 막았으며, 접합하는 과정에서 접합부가 터지지 않도록 구멍을 작게 뚫었습니다. 이 같은 형식은 신라의 귀걸이 제작 과정에서만 나타나는 것으로, 경주 외의 지방에서 발견되는 귀걸이와는 또 다른 특성을 가집니다.

보문리 부부총 금제이식 ⓒ 문화재청

 

 

경주 보문리 부부총에서 발견된 금귀걸이는 국보 제90호로, 신라 귀걸이의 화려함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태환에는 거북등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육각형으로 나누어서 금실과 금을 이어 붙여 이파리무늬(초엽문)을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중간 고리 아래에도 화려한 나뭇잎 장식이 걸려있습니다. 또한,  37개의 하트모양 달개가 매달려 있습니다. 황남대총 남분 귀걸이보다 상대적으로 크기가 많이 커지는데, 이는 소형에서부터 대형으로 귀걸이의 형태가 변화하는 경향성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 태환이식의 양식은 6세기 중엽으로 편년됩니다.

황오동 52호 무덤 출토 금귀걸이 ⓒ 문화재청

 

 

황오동 52호 무덤에서 발견된 보물 제455호 금귀걸이는 외형이 펜촉모양을 띠고 있으며, 펜촉 모양의 금판 2매를 수식으로 이어 붙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둥근 고리에는 금실로 긴 심엽형 영락을 달았습니다. 영락(瓔珞)이란 신라의 귀걸이의 큰 특징 중 하나로, 구슬 장식입니다. 이 외에도 금령총이나 금관총에서 발견되는 금제이식은 유리를 녹여서 신라의 귀걸이를 장식했습니다. 이 같은 장식적인 요소는 신라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정교한 신라시대의 세공 기술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신라에서 황금을 통한 장신구가 발달하게 된 효시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현재는 고구려나 선비족의 영향이라고도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한편 금제 장식은 대부분 큰 규모의 고분에서 부장되고 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했을 때, 제의 흔히 황금문화의 정점에 해당하는 유물로써, 귀걸이를 소유하는 계층은 높은 위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신라의 금귀걸이는 대부분 경주의 공방에서 전문 장인으로부터 제작되었다고 추정됩니다.

신라 귀걸이 ⓒ 홍승연

 

 

신라의 금제 장신구를 대표하는 신라 귀걸이는 그 형태와 특징을 기반으로 할때 정점에 오른 신라의 황금 문화를 표상합니다. 또한 신라 최고의 공예 기술이 적용된 장신구를 통해 당시 지배층의 문화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신라의 황금 문화는 6세기 이후 조금씩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신라의 귀걸이의 존재 양태를 통해 신라 사회의 변화를 추정할 수 있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출처>
중앙문화재연구원. (2014). 신라고고학개론 하. 진인진
한병삼. (1983). 국보 1. 예경산업사.
경남 이야기 http://news.gyeongnam.go.kr/?p=40244

 

<9기 문화재청 대학생 기자단 홍승연 기자(stian96@hanmail.net)> 

 

[출처] 신라인의 귀에 맺힌 화려함, 금제이식|작성자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