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당포해전의 경과와 승리 요인

道雨 2023. 7. 7. 12:29

당포해전의 경과와 승리 요인

[이봉수 칼럼]

 

1592년 5월 30일(이하 음력) 거북선을 앞세운 이순신함대는, 사천해전에서 승리한 후, 모자랑포(사천군 용현면 주문리)에서 1박 하고, 사량(통영시 사량면 진촌리)으로 향하였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왼쪽 어깨에 적탄을 맞고 큰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6월 2일 오전 8시경 사량 해상에서 휴식 중이던 이순신 함대는, 적선이 당포(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선창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순신은 바로 출발하여 10시경 당포 앞바다에 도착했다.

당시 당포에 머물고 있던 적병은 약 300 명이었다. 이들은 당포성 안에서 노략질을 하며 민가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당포 선창에는 21척의 적선이 정박하고 있었으며, 이순신함대가 접근하자, 성 밖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철환을 쏘아댔다.

 

대선 위의 높은 누각에는 붉은 비단을 두르고 있었으며, 붉은 일산을 쓴 적장 구루시마 미치유키(來島通之)가 두려워하지 않고 서 있었다.

 

이순신은 탐망선을 바깥 바다에 배치하여 후방으로부터의 기습에 대비하고, 거북선을 선두로 공격해 들어갔다. 거북선은 적장이 탄 누각이 있는 대선 밑으로 접근하여, 용머리에서 현자철환을 쏘고, 이어서 지자철환과 대장군전도 쏘면서 누각 대선을 깨트려 버렸다. 뒤따르던 전선들은 철환과 편전, 승자총통 등을 계속 발사하면서 거북선을 엄호하였다.

왜군들은 조총으로 맹렬히 반격하였으나, 거북선은 총탄을 맞으면서도 끄떡없이 돌격을 계속했다. 누각 대선이 깨지면서 왜병들은 점차 사기를 잃기 시작했다.

이때 중위장 권준이 적장을 명중시켰으며, 사도첨사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적 대장선으로 뛰어올라, 화살을 맞고 떨어진 적장 구루시마 미치유키의 목을 베어버렸다.

이를 본 왜병들은 겁을 먹고 배에서 내려 육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순신함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선 21척을 불태우거나 격파해버렸다.

이순신은 군사들을 상륙시켜 적을 추격하려 했으나, 마침 바깥 바다에 배치해 둔 탐망선으로부터 왜군 대선 20여 척이 많은 소선을 거느리고 부산 쪽에서 당포로 향하고 있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이순신은 육지로의 추격을 멈추고 함대를 바깥 바다로 이동시켰는데, 그때 당포로 향하던 왜선들은 이순신함대를 보고 놀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순신 함대가 추격을 했으나 날이 저물어 야간전투는 피하고, 안전한 창신도(남해군 창선도)로 물러나 하룻밤을 지냈다. 

이날 전투에서 소비포 권관 이영남은 왜선 안에서 울산 출신 여자 종인 억대(億代)와 거제도 출신 소녀 모리(毛里)를 찾아 구해 내었다.

전투 중 노획한 물품 중에는, 좌별도장 이몽구가 적장이 탄 대선에서 찾아낸 금부채가 하나 있었다. 부채 중앙에는 ‘6월 8일 수길(六月八日秀吉)’, 오른쪽에는 ‘우시축전수(羽柴筑前守)’, 왼편에는 ‘구정유구수전(龜井琉求守殿)’ 이라고 씌어 있었는데, 이 부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메이 코레노리(龜井玆矩)를 유구(琉求, 오키니와)의 영주로 봉하면서 선사한 것이었다. 

하시바(羽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있을 때 사용했던 성(姓)이고, 치쿠젠노카미(筑前守)는 그 당시 직위이다. 도요토미(豊臣)는 후에 바꾼 성이다.

이런 사정을 이순신 장군이 정확히 몰랐기에, 당포파왜병장에서 노획한 금부채는 “히데요시(平秀吉)가 치쿠젠노카미(筑前守)에게 보낸 것"으로 보고, “이번에 목을 벤 왜장은 필시 치쿠젠노카미일 것”이라고 조정에 보고하는 실수를 했다.
 

가메이 코레노리는 이날 부채를 버리고 도망쳐서 구사일생으로 살았으며, 후에 일본으로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주군으로 섬기게 된다.

금부채에 새겨진 글의 해석을 잘못하여, 당포해전에서 전사한 적장을 가메이 코레노리라고 서술한 기록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당포해전에서 전사한 적장 구루시마 미치유키(來島通之)는,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의 형이다.


                                                 * 당포해전지, 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창신도에서 하룻밤 휴식을 취한 이순신함대는, 6월 3일 새벽부터 전날 놓친 왜선을 찾기 위해 개도(통영시 산양읍 추도) 일대를 수색했으나 적의 종적을 찾을 수 없어, 근처의 고둔포(통영시 산양읍 수월리 고둔개)로 가서 1박 했다.

다음 날인 6월 4일 아침 다시 당포 앞바다를 수색했는데, 오전 10시경 토병 강탁이 와서 도망간 적은 거제도 쪽으로 갔다고 알려 주었다.

이 말을 듣고 적이 도망간 쪽으로 출발하려는데, 멀리서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다가오자, 원군을 만난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순신, 원균, 이억기의 연합함대  51척은 그날 밤 착량(경남 통영시 미수동) 바다 가운데서 진을 치고 1박 하고, 6월 5일 거제도민 김모(金毛) 등로부터 적이 거제를 지나 고성땅 당항포로 갔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곧장 당항포로 향했다.

당포해전의 승리 요인은, 당포에 적이 있다는 정보를 이순신 장군이 숙영지인 사량도에서 미리 수집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탐망선을 활용하고, 지역민이나 지역의 토병들로부터 첩보를 수집 가공하여 정확한 정보를 생산한 후, 이를 바탕으로 작전계획을 수립한 것이 주요한 승리 요인이다.

거북선을 이용하여 전투 개시 초반에 지휘선인 적 대장선을 공격하여 최고 지휘관을 사살한 것도, 최대의 승리 요인 중 하나다. 지휘관이 눈앞에서 비참하게 죽자, 적은 오합지졸이 되어, 배를 버리고 당포성으로 올라가버렸다. 이 틈을 이용하여 조선수군은 적선 21척을 모조리 불태워 없앨 수 있었다.

깊숙한 포구인 당포로 진입하여 본대가 전투를 하고 있을 때, 바깥 바다에 탐망선을 띄워 혹시 나타날지 모를 적의 후속 부대를 경계한 것은, 후방의 안전을 도모한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전술로 볼 수 있다.

 

착량(鑿梁, 판데목)에서 바다 가운데 진을 치고 밤을 새운 것은, 육지로부터 예상되는 적의 공격을 방지함과 동시에, 병사들의 탈영을 예방하는 비책으로 보아야 한다.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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