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지배를 위한 패권 다툼, 펠로폰네소스 전쟁
* 발생 : 기원전 431년
* 종결 : 기원전 404년
목차
그리스 제국을 꿈꾼 아테네
페르시아는 비록 페르시아 전쟁에서 패했지만, 여전히 그리스를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 탓에 페르시아가 다시 쳐들어올까 두려워하던 소아시아(아시아의 서쪽 끝에 있는 흑해, 에게 해, 지중해에 둘러싸인 반도)의 폴리스들과 에게 해의 섬에 있는 폴리스들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478년에 결성된 이 동맹을 ‘델로스 동맹’(동맹 국가들이 내는 기금을 델로스 섬의 아폴론 신전에 보관한 데서 이름 붙임)이라 한다.
원래 델로스 동맹을 만든 명분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대비하고, 페르시아의 지배에 있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독립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나라가 참여했다.
델로스 동맹이 맺어지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47년 동안, 아테네는 페리클레스1) 의 통치 아래 민주 정치의 꽃을 피웠다. 또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학문·예술의 중심지가 되어 최고의 황금시대를 누렸다. 이 시기를 흔히 ‘아테네 제국 시대’라고도 한다.
아테네는 기원전 454년 델로스 동맹 본부와 델로스 섬에 보관하고 있던 돈을 아테네로 옮겨 오고, 몇 년 뒤에는 아테네가 페르시아와 평화 조약(칼리아스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그로 인해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절대적인 힘을 갖게 된 아테네는, 동맹을 맺은 폴리스들에게 동맹 기금을 바치도록 강요할 정도까지 되었다.
펠로폰네소스 동맹, 드디어 반기를 들다
그리스 폴리스들 사이에서는 아테네의 지나친 성장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 불만을 터트린 결정적인 사건은 케르키라와 코린토스(코린트. 상업 무역으로 가장 번영을 누리던 그리스 중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도시 국가)의 싸움이었다. 기원전 433년에 코린토스의 식민지였던 케르키라가 독립 전쟁을 일으키자, 아테네가 케르키라를 지원하고 나섰다. 코린토스는 곧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고, 펠로폰네소스 동맹2) 에 속한 나라들은 회의를 열어 아테네와의 전쟁을 결의하였다.
이로써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겉으로는 아테네가 코린토스와 케르키라의 전쟁에 간섭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힘이 커지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서 일으킨 것이다.
최강의 육군을 자랑하는 스파르타와 풍부한 재력과 막강한 해군력을 갖춘 아테네가 그리스 지배권을 놓고 27년 동안이나 싸웠던 이 전쟁이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기원전 404년)’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작-아르키다모스 전쟁(기원전 431~기원전 421년)
기원전 431년 스파르타 왕 아르키다모스는 육군을 거느리고 아테네를 공격하였다. ‘10년 전쟁’이라고도 부르는 첫 번째 전쟁에서 아테네의 페리클레스는 성문을 굳게 닫고, 최강의 힘을 자랑하는 스파르타의 육군과 정면으로 싸우지 않고 성을 지키는 전술을 폈다. 그 대신 스파르타의 육군이 아테네에 머무는 사이, 해군을 동원해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을 습격하여 스파르타 군에 타격을 주려고 했다.
처음에는 페리클레스의 작전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이듬해 아테네에 페스트가 퍼지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페스트로 인해 1만 4천 명에 이르렀던 아테네 육군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고, 페리클레스 역시 이 병에 걸려 세상을 떴다.
그렇지만 아테네는 어려워진 상황에서도 스파르타와 계속 싸웠다. 아테네 군이 계속 밀고 들어오자, 기원전 425년에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화해를 제안했다. 그러나 클레온(페리클레스가 죽은 뒤 뽑힌 아테네의 지도자)은 이 제안을 거절하고, 오히려 스파르타의 시민 120명을 잡아 아테네로 끌고 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스파르타의 장군 브라시다스의 활약으로 승리의 기운은 스파르타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브라시다스 장군은 북쪽으로 진군하여 엠피폴리스와 티로네를 점령하고, 아테네 군을 계속 공격하였다. 그 과정에서 기원전 423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휴전을 맺었다. 그런데 브라시다스는 공격을 멈추지 않고,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있는 폴리스들을 계속 무너뜨렸다. 결국 브라시다스를 저지하기 위해 클레온이 직접 나섰고, 기원전 422년 엠피폴리스에서 충돌한 이 둘은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죽은 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서로 점령했던 지역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기원전 421년 ‘니키아스 평화 조약’을 맺고 휴전을 하게 되었다.
페리클레스가 아테네 군 장례식에서 한 추도 연설
페리클레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과정에서 전사한 아테네 군인들을 국립묘지에 안장하면서,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 연설을 했다. 내용은 대부분 아테네의 역사가인 투키디데스가 쓴 것으로, 아테네의 힘과 자신들의 체제에 대한 자부심,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바치는 찬사들이다. 역사에 길이 남는 명연설로 평가받고 있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직접 참여한 장군이었지만, 전투에서 패배한 탓에 20년 동안 망명 생활을 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전쟁을 목격한 사람들을 찾아가 전쟁에 대한 정보를 모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라는 책을 완성했다.
시칠리아에서 다시 맞서다
니키아스 평화 조약은 6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기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 양측은 전쟁의 상처를 회복하는 데 힘을 기울이면서, 작은 폴리스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애썼다. 이때 아테네는 아르고스, 엘리스, 만티네이아(펠로폰네소스 반도 중앙의 아르카디아 지방에 있던 고대 그리스 도시)와 새롭게 동맹을 맺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418년, 아테네가 만티네이아의 영토에서 스파르타와 싸웠지만 크게 지고 말았다.
아테네의 장군 알키비아데스는 이 전투에서 진 것 때문에 도편 추방3) 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니키아스(아테네의 정치가)와 결탁해 히페르볼로스(클레온의 후계자)에 맞섬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 나라 사이의 평화 조약은 깨지지 않았다.
니키아스 평화 조약은 기원전 415년에 아테네가 시칠리아를 공격하면서 결국 깨지고 말았다. 알키비아데스 장군은 올림피아 제전(고대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4년마다 초여름 5일간에 걸쳐 제우스 신을 위하여 지내던 제사)을 통해 다시 명성을 얻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먼저 손에 넣은 다음 스파르타를 공격하겠다는 작전을 세워, 200척의 대함대를 이끌고 시칠리아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그 틈을 타 본국에 있던 반대 세력이 그를 몰아내려고 했다. 아테네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은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로 도망갔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 계획을 스파르타에 알렸고, 기원전 413년에 스파르타는 그의 도움으로 시라쿠사(시칠리아 섬 남동쪽 해안에 있는 항구 도시)에서 아테네 함대를 거의 전멸시킬 수 있었다.
아이고스포타미 전투로 막을 내리다
시라쿠사에서 패배한 후 아테네의 정치는 과두 정치(몇몇 사람이 국가의 지배권을 장악한 독재 정치) 지배자들에게 권력이 넘어갔다. 그 결과 아테네는 다시 민주 정치를 회복하기까지 정치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그렇지만 아테네는 그 사이 해군을 재건하여, 헬레스폰투스 반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스파르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의기양양해진 아테네 지도자들은 스파르타가 제의한 평화 조약을 거부했다.
이에 스파르타는 전에 아테네가 세웠던 작전을 본떠, 에게 해를 장악하여 아테네의 보급로와 무역로를 차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아테네의 막강한 해군력에 맞서기 위해 페르시아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페르시아는 소아시아의 식민 도시들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아테네의 보급로인 흑해 방면을 차단해 주었다.
스파르타의 해군 장군 리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아, 기원전 406년에 노티움 전투에서 아테네 해군을 무찔렀다. 하지만 아테네는 여전히 스파르타와의 평화 조약을 거부했다. 그러자 기원전 405년, 리산드로스 장군은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막기 위해 해안 도시 람프사코스를 점령했다.
스파르타의 행동에 당황한 아테네에서는 코논 사령관이 108척의 함대를 이끌고 아이고스포타미 강(발칸 반도 동부 트라키아 지방에 있는 강) 하구로 급히 갔다. 리산드로스는 4일 동안 아테네 군을 초조하게 대기시킨 뒤, 대부분의 병사들이 상륙한 틈을 타 아테네 함대를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결국 코논 사령관은 겨우 20척의 배만 이끌고 도망쳤고, 3~4천의 아테네 병사들은 포로가 되고 말았다.
아테네가 아이고스포타미 전투에서 패한 뒤, 델로스 동맹국은 아테네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결국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워진 아테네 시민들은 기원전 404년에 아테네로 진격한 스파르타의 리산드로스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27년 동안 벌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 아테네의 수호 여신이기도 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항복 후 아테네는 함대를 스파르타에게 인도하고, 델로스 동맹을 해산하였다. 또 리산드로스의 압력으로 ‘30인 정치(과두 정치)’를 수립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는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폴리스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영광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스파르타의 강압적 지배에 불만을 품은 테베·코린토스 등이 아테네를 앞세워 ‘코린토스 전쟁(기원전 395~기원전 386년)’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패한 뒤 전력이 약해진 스파르타는, 기원전 371년에 테베가 주도하는 보이아티아 연맹군과의 레욱트라(지금의 레브크트라 근처) 전투에서도 패했다. 결국 스파르타는 테베에게 그리스 지배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코린토스 전쟁에서 이긴 아테네는 에게 해의 여러 폴리스들과 제2차 해상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또다시 여러 동맹 도시들의 불만을 사서 ‘동맹시 전쟁(기원전 357~기원전 355년)’을 겪게 되었다.
이 무렵 그리스 북쪽에서 마케도니아가 등장하여, 기원전 338년에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을 공격하였다. 아테네와 테베 등 폴리스들이 다시 연합하여 싸웠으나, 마케도니아에 패배하였다. 그 결과 폴리스들의 자치와 독립은 인정받았으나, 아테네는 완전한 자주독립은 하지 못한 채 역사를 마감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지배권을 놓고 다퉜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결국 고대 그리스의 분열과 쇠퇴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차이
구분 | 아테네 | 스파르타 |
종족 | 이오니아 인 | 도리아 인 |
정치 | 귀족 정치 → 민주 정치 | 과두 정치 |
군사 | 해군 중심 | 육군 중심 |
외교 | 개방적(무역 발달) | 폐쇄적(쇄국주의) |
경제 | 상공업 발달 | 농업 중심 |
사회 구성 | 시민(귀족·평민)(8만 5천~12만 명) | 시민(귀족)(7천~9천 명) |
외국인(2만 5천~5만 명) | 반 자유인(4만~6만 명) | |
노예(6만~10만 명) | 노예(14만~20만 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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