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림의 '인간 대동여지도'
혼맥지도를 팔았다며 만든 술자리에 끼었던 기억
우리나라 신문 중에서 그 역사의 뿌리를 일제 식민지 시절에 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업자들은 친일파이다. 중앙일보는 해방되고 15년이나 지난 60년대에 창업했지만 현 소유주 홍석현 회장의 부친 홍진기 역시 친일 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이 자는 일제 식민지 시절, 면사무소 직원 정도가 아니라 판사라는 까마득한 고위직을 지냈고, 해방 후 이승만 정부 때에는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지내면서 4‧19혁명 때 발포 명령을 내렸다.
만수산 드렁칡 같은 언론족벌 혼맥
동아일보 창업자 김성수의 증손자인 현 김재호 사장의 부인은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권을 거치면서 줄곧 여당 소속으로 여섯 번이나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됐고 김대중 정권 때는 자민련 소속으로 국무총리까지 지낸 당대의 정계 실력자 이한동의 둘째 딸이다. 그 언니는 GS그룹에 시집갔다. 김재호 사장의 동생 김재열 씨의 부인은 삼성그룹 이재용 회장의 여동생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다.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 아들 방준오 씨의 부인 허유정 씨의 친정은 삼양인터내셔널그룹이고, 허유정 씨의 남동생 허서홍 씨는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의 딸 홍정현 씨의 남편이다. 방상훈 사장의 차남 방정오 씨의 부인은 비리 사학재단으로 이름을 날렸던 수원대 이인수 총장의 장녀다. 방상훈 사장의 부인은 친일파 거두 윤치호의 증손녀로 알려져 있다.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은 고 이건희 삼성 회장 부인 홍라희 씨의 동생이며, 홍 회장의 부인 신연균 씨는 옛 박정희 시절 검찰총장 법무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유신독재정권의 본당 신직수의 장녀이다. 광주고검장 시절 삼성 X파일의 ‘전달책’으로 명성을 떨쳤던 홍석조 씨 등 홍 회장 동생들은 보광그룹에 폭넓게 포진해 있다.
남의 집 족보를 이야기하는데 왜 공연히 가슴이 떨리는지 모르겠다. 이렇듯 평범한 사람이 입초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떨리는 어마어마한 집안들이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있는 사연을, 나는 신학림 기자가 쓴 ‘대한민국 혼맥지도’를 통해 알게 됐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저술을 읽고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신 기자가 어떤 노동조합에서 행한 한 공개특강을 듣고 알게 된 것이다.
그때의 내 메모 일부가 남은 건데, 신 기자의 ‘혼맥지도’에는 훨씬 더 어마무시한 대한민국 기득권층의 족보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 강의를 듣고 나서 나는 한동안 무력감에 빠졌었다. 대한민국 기득권 세력이 참으로 넓고 깊다는 것, 민주세력이 한두 번 정권을 잡았다고 쉽게 개혁을 성취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희망인지를 눈치챈 것이다.
“그래, 한두 번 민주정권으로 어려우면 세 번, 네 번 정권을 잡으면 되지. 그때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개혁하며 나아가면 되지.”
그런 생각으로 절망감을 추스린 것은 신 기자의 강의를 듣고 한참이 지난 후였다.
혈연의 확장 ‘혼맥’을 평생 연구한 기자
대한민국의 기득권은 지연(출신 고교), 학연(대학), 혈연을 중심으로 생성되고 강화되는데, 그중에서도 혈연은 생물학적으로 배타적이고 수적으로 지극히 한정적이어서, 그만큼 공동체 내에서 그들이 조성하는 불공정과 불평등의 벽이 높고 강고할 수밖에 없다. 혼인은 그런 혈연을 최대한 확장해 나가면서, 특혜와 반칙으로 공동체를 더욱 멍들게 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나는 신 기자가 십수 년 전 이에 관한 취재와 연구를 시작한 것은 이런 문제의식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중에서도 조중동, 그중에서도 조선일보라는 족벌언론(들)이 어떻게 대한민국에서 헤게모니를 가지게 됐는지, 그 뿌리를 궁구하다가, 그 대상이 기득권 전체로 확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또 하나의 (장 씨) 족벌언론이었던 한국일보 출신이다. 그때 노조 간부로서 펼쳤던 편집권 수호 투쟁이, 장차 전국 언론노조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전 언론계로, 더 핵심 문제로 관심의 영역을 넓혀 나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신 기자가 자신의 활동 역량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 십수 년을 이 작업에 바치면서, 오로지 공익을 위한다는 초심을 지켰을 리 없다고 본다. 만일 그랬다면 그것은 성인이거나 바보, 둘 중의 하나다.
신 기자가 언젠가 인물 데이터베이스 유료 제공으로 수익을 올리는 한 대형 언론사를 상대로, 자신의 저술을 구입할 수 있는가를 타진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내가 전혀 실망하거나 놀라지 않은 것은 그 이유다. 그때 신 기자가 제안한 액수가 10억이라고 들었다.
언젠가는 그의 책을 참고하고 싶어 빌려 보려고 했으나 완곡히 거절당한 적이 있다. 또 언젠가는 “연구만 하면 무슨 소용인가. 왜 책을 내지 않는가”라는 내 채근에 “아직 때가 아니다. 책으로 낼 생각으로 만든 것도 아니다”라고 답변한 적도 있다. 그는 나름대로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오염된 술을 얻어 마셨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신 기자가 자신과 가깝다고 생각하는 언론계 선후배들에게 술 한 잔 사겠노라고 소집한 것이 재작년 9월이나 10월 어느 때쯤이었던 것 같다. 그가 술 한 잔 하자고 가까운 동료들을 소집하는 것이야 다반사로 있는 일이지만, 그날은 의외로 많은 사람이 꽤 좋은 식당에 모여서 이게 도대체 웬일로 얻어먹는 술인지 어리둥절한 상황이었다.
신 기자는 “술 사주는 사연이나 알고 마시자”는 일행에게 “드디어 내가 잘 아는 사업가에게 ‘혼맥지도’를 팔았다”며 “원본 한 권에 5천만 원씩, 1억 5천만 원 받았다”고, 감개무량하게 말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도대체 누가 (가격이 생성되지도 않은) 책을 그런 거금을 주고 샀을까, 궁금해 마지않았지만, 신 기자는 말을 아꼈다.
그때 누군가, 사람들의 그런 속마음을 눈치챈 듯 “그 사업가 친구, 대단한 배포에다가 물건 보는 안목이 있구만. 인간 대동여지도 원판을 고작 1억 5천만 원에 사다니…” 덕담을 던졌다.
“대동여지도 인쇄본이야 별 가치가 없을지라도, 김정호가 직접 새긴 원판의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크지 않겠나”라는, 기자다운 그럴듯한 비유인데, 나는 속으로 “그렇지! 김정호는 조선의 지리를 탐구했지만, 신학림은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인맥을 속속들이 탐구했지!” 한 술 더 떴다.
그 배포 큰 사업가가 김만배 씨라는 걸 이제 알았다. 그렇다면 김만배는 배포 큰 사업가가 아니라, 이제 보니 대단히 쪼잔한 인물 아닌가. 검사 판사들에게 50억씩 집어주고, 서울중앙지검장 부친 집은 19억에 사주고, 한 신문 법조 출입기자에게는 6억을 던져 주면서, 존경하는 선배가 거의 평생을 바쳐 만든 희대의 역작을 고작 1억 6천 5백만 원이라는 헐값에 후려치다니!
그럼에도 “언론은 절대 청정지대가 되어야 한다”는 딸깍발이들은, 1억 6천 5백만 원과 아무 상관도 없는 ‘윤석열 커피’가 오염된 정보라며 개탄해 마지않는다.
그러면 나와 (그리고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언론인은 영락없이 오염된 술을 마셨던 걸까?
강기석 칼럼kks54223@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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