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 44년 만에 들이닥친 전두환 쿠데타군
김성수 감독 이제야 해낸 12.12 심판
아프고 더러운 역사 얘기 역설적 재미로 풀어 반추케
장태완 사령관 분루 알면서도 손에 땀쥐는 서스펜스
언해피엔딩에도 정의가 끝내 승리하리란 믿음 시사
중량급 배우들의 조·단역 마다않은 연기 투혼도 빛나
영화감독 김성수가 역(逆)쿠데타에 성공했다.
그는 자신의 신작 '서울의 봄'으로 이제서야 전두환의 반란군을 진압해 냈다. 실로 44년만의 일이다. 김성수는 당시 반란의 수괴 조직인 하나회의 실체를 낱낱이 들춰내고 그동안 우리 사회와 정치가 해내지 못했던 역사의 심오한 심판을 내렸다.
영화 속 모든 배역은 가명이지만 명백하게 전두환 노태우(이상 육사 11기) 일당의 만행을 폭로해 낸다.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차규헌(육사 8기), 황영시(육사 10기), 박희도 박세직(이상 육사 12기), 최세창(육사 13기), 장세동(육사 16기), 김진영 허삼수 허화평(육사 17기) 등 군 범죄자들의 진상을 철저하게 가려낸다. 영화가 역사를 바로 세웠다. 놀라운 일이다. 다만 지금의 관객과 언론, 사회와 정치가 어떻게 반응해 낼지가 관건이다.
영화 '서울의 봄'은 지루한 역사서가 아니다. 흥미진진한 대결의 서사를 펼치고 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10.26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12.12 사태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이 같은 현상은 1980년대생 이후에서 두드러진다. 사건의 복잡성, 전후맥락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사안인 만큼 12.12를 2시간여 만에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기란 다소 어려운 일이다. '서울의 봄'은 이를 전두광(황정민)과 이태신(정우성), 두 인물의 대결 구도로 풀어내며 그 대립의 서사, 선과 악의 싸움으로 상업영화가 갖는 재미를 꽉 붙들고 나아간다. 아프고 더러운 역사의 얘기지만 영화 '서울의 봄'은 역설적으로 매우 재미있다. 그 재미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그 재미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당시 사건을 반추하게 만들며, 그 재미를 통해 사람들에게 그 시대의 통한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상업영화가 지녀야 할 진정한 덕목, 재미에서 의미로 이어지는 좁은 협곡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을 주저없이 진행시킨다.
* 11월 22일 개봉되는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재미로 붙들어 맨 통한의 군사반란 이야기
전두환은 박정희 정권 후반기에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 경호실에서 근무하다 (경호실장 차지철의 천거로) 보안사령관에 발탁된 직후 터진 10.26 사건으로 기회를 잡는다. 그는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을 맡아 권력을 틀어쥐기 시작한다. 그런 그를 견제하기 위해 1980년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극중 이름은 정상호, 배우 이성민役)은 갑종 출신의 장태완 준장(이태신, 정우성役)을 소장으로 진급시켜 수도경비사령부(지금의 수도방위사령부)의 사령관직을 맡게 한다. 나날이 권력이 확대돼 가고 있는 전두환(전두광, 황정민役)과 노태우(노태건, 박해준役)의 군대 내 사조직 하나회에 맞서 수도와 육본, 국방부를 지킬 수 있는 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두환 등은 자신들이 곧 보직 해임돼 한직으로 쫓겨날 것이 확실시 되자 모처럼 잡은 권력을 잃고 군 수뇌부에서 숙청될 것을 우려해, 그리하여 순·전·히· 권·력·욕· 하나로, 상관인 육참총장을 체포해 납치하고 군부를 장악한다. 바야흐로 정치권력 전면에 나서려 한다. 나라 전체를 뒤흔들어 엎어 버린다.
영화 '서울의 봄'이 특이한 것은 1979년 12월 12일에서 다음날 새벽으로 넘어가는 10시간 동안 한남동 참모총장 공관과 용산 국방부 청사, 육군본부가 어떻게 탈취되고 어떤 불상사와 총격전이 벌어졌는지를 시간대별로 촘촘하게 전개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 면밀한 기록이 만들어 내는 긴장과 서스펜스가 상당하다. 사람들은 이미 전두환의 승리를 잘 알고 있고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분루(憤淚)를 흘리게 될 것임을 알고 있지만 마음 속으로는 제발 영화에서만이라도 정의의 편이 승리할 것을 기원하게 된다.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서울의 봄'은 서스펜스의 드라마이며 사건을 추적해 가는 과정을 매우 흥미롭게 진행시킨다. 당시 역사에 대해 무지하거나 혹은 애써 무시하고 살아가려는 사람들, 심지어 당시 사태의 주동자들조차도, 흥미롭게 볼 수 있는 드라마이다.
* 9일 오후 서울 강남구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열린 영화'서울의 봄' 기자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성수 감독, 배우 김성균, 정우성, 황정민, 이성민. 2023.11.9. 연합뉴스
많은 할리우드 영화의 컨벤션(관습과 관행)은 다수의 악당이 활개를 치고 소수의 정의로운 사람들, 혹은 홀로 이에 맞서는 주인공으로 서사 구조를 짠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악의 편으로 넘어 가거나 그쪽에 줄을 선다. 정의는 늘 외롭다. 예컨대 서부극의 전설 '하이눈'을 생각하면 된다. 마을 사람들은 악당들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 다들 문을 닫아 건다. 보안관만이 외롭게 대결을 준비한다. '서울의 봄'에서도 1공수와 3공수, 5공수 쿠데타군이 서울 진격에 나서자 육본의 많은 장성들이 어떻게 돌아섰고 또 얼마나 무력한 모습을 보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 단순한 대립 구도, 캐릭터들의 이분화가 당시의 복잡했던 사건, 쿠데타의 전후 과정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도와 준다. 감독이 영리한 선택을 한 셈이다.
참군인들의 분투, 언해피엔딩인데도 통쾌해지는 영화
영화 속에서 이태신=장태완 사령관이 홀로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눈물겹다. 그가 단신으로 행주대교 중간에 서서 몰려 오는 5공수 부대를 막아 내려는 장면은, 얼마나 윤색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영화가 만들어 내는 영웅주의가 비록 허구라 할지라도 올바르게 작동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한다. 5공수는 이태신 앞에서 회군하는데 쿠데타에 반대했던 특전사(육군 특수전 사령부) 정병주 사령관 휘하의 9공수와의 접전을 피하는 척, 급습을 노려 성공한다. 정병주 사령관(정만식)이 습격을 받는 장면과 그의 부관인 오 소령(원래는 김오랑 소령, 배우 정해인役)이 사살되는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12.12 사건의 분기점이다. 영화도 이 장면 이후 비극의 능선으로 넘어가게 된다. 9공수의 방어가 실패하고 정병주가 체포됨으로써 이태신과 수도경비사령부는 더욱 더 고립된다. 영화 속에서 정우성은 황정민에게, 이태신은 전두광을 향해, 장태완은 전두환에게, 울부짖는다. "너는 군인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다"라고. 정우성은 이를 간다. 사람들도 이를 갈게 된다. 그 울분의 비수가 가슴 곳곳을 찔러 댄다.
대개의 상업영화가 갖는 이야기 구조는 정의가 끝내 승리한다는 것으로 짜인다. 영화가 주는 쾌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현실과는 정반대의 틀을 짜곤 한다. 영화의 리얼리즘을 의도적으로 축소시킨다. 그럼에도 사람들, 관객들은 그 허구의 판타지를 받아들이려 애쓴다. 그게 삶을 편하게 하니까. 슬프고 어두운 얘기를 영화에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반면에 영화 '서울의 봄'은 어쩔 수 없이 언해피엔딩이다. 사실을 왜곡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이라도, 그러니까 44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정의가 승리하고 있고, 승리 중이며, 끝내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느끼게 해준다. 그런 맥락에서 '서울의 봄'은 궁극의 해피엔딩이다. 상업영화가 만들어 내야 할 영화적 쾌감을 느끼게 해준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면 대체로 분할 것이다. 치가 떨릴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역설적으로 통쾌해질 것이다. 이제서야 역사의 진면목을 생생하게 공유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 김성수 감독이 9일 오후 서울 강남구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열린 영화'서울의 봄'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3.11.9. 연합뉴스
악의 무리 전두광 노태건 일당과 3인의 '협객' 이태신과 김준엽 헌병감(김진기, 김성균役), 특전사 사령관의 대립 구도와 대결의 서사가 리드미컬하게 구성돼 있다.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노재현(김의성役)이 펼치는 비열하고 비루한 에피소드조차 이 영화에 볼거리와 얘깃거리,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준다. 비겁한 배신자 연기로 김의성만한 배우가 없다. '서울의 봄'에는 중량감있는 수많은 배우들이 조단역으로 단 몇 컷의 장면에 스치듯 나온다. 배우들의 스스럼없는 연기 투혼이 빛나는 작품이다.
한국 역사를 진화시키는 영화의 반란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에 한국에서는 과연 어떠한 일이 벌어졌었는지, 군인들의 부당하고 무모한 반란이 이후 5.18 광주에서는 어떤 학살로 이어지게 됐는지, 그 역사의 상흔은 제대로 치유됐는지에 대해 묻고 있는 작품이다. 과거는 미래이고 미래는 과거이다. 과거의 진상을 올바르게 파헤치지 않으면 미래를 향해 한 걸음도 나아가기가 힘들다. '서울의 봄'은 가히 혁명적인 영화이다. 김성수 감독이 일으킨 역사적이며 올바른 의미의 쿠데타, 그 영화의 반란은 과연 성공할 것인가. 그건 다분히 관객의 몫이자, 언론의 사명이며, 국민들이 선택할 부분이다. 다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지금의 한국 역사는 영화와 문화가 진화시키고 있는 중이라는 점이다. '서울의 봄'은 11월 22일 개봉된다.
오동진 영화평론가mindle@mindlenews.com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
************************************************************************************************
'서울의 봄' 시사회서 터져 나온 탄식... 기억해야할 군인 둘
12.12의 두 전사자, 고 김오랑 중령과 정선엽 병장... 김 중령 묘비명 아직 수정되지 않아
지난 16일 밤, 서울 삼성동 메가박스 코엑스점에서 열린 <서울의 봄> 시사회. 스크린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정훈채 목사는 두 눈을 잠시 감더니, "아"하는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영화는 1979년 12월 12일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을 주축으로 한 정치장교들의 사조직 '하나회'가 일으켰던 군사쿠데타를 다루고 있다. 쿠데타 세력은 자신들을 방해할 것으로 예상되는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군본부 헌병감을 부하 장교 진급 축하연을 빙자해 연희동의 한 요정으로 유인한 다음, 정승화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을 불법 연행했다.
이렇게 시작된 쿠데타는 다음날 새벽 반란군이 수도경비사령부를 장악할 때까지 9시간가량 진행됐다. 12월 13일 자정을 넘긴 시각, 쿠데타에 동원된 육군 특수전사령부(특전사) 예하 제1공수여단 병력이 국방부 B-2 벙커 점령을 시도할 때 끝까지 저항하던 한 초병이 반란군들의 총기 난사에 쓰러지는 장면에서 정 목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영화에서는 가명으로 처리됐지만, 당시 반란군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은 병사는 국방부 제50헌병중대 소속 고 정선엽 병장, 바로 정 목사의 친동생이다. 광주 조선대학교를 다니던 정 병장은 당시 제대를 석 달 정도 남겨 놓고 있던 말년 병장으로, 1979년 12월 13일 새벽 국방부 B-2 벙커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정 목사에게 선엽은 집안을 책임질 믿음직한 동생이었다. 어려운 형편 탓에 비록 자신은 상고를 나와 은행원으로 근무하고 있었지만, 착하고 똑똑했던 동생의 뒷바라지는 능력이 닿는 한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숨지기 일주일 전 통화에서도 "유학을 가고 싶다"며 전역 후 진로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았던 동생이었다(관련 기사 : "전두환 반란군과 싸우다 죽은 동생, '전사'로 바로잡아야" https://omn.kr/1wcre).
그날 새벽 반란군에 목숨 잃은 정선엽 병장·김오랑 중령
대법원의 12.12 군사반란 판결문에 따르면 박희도 1공수여단장(육사 12기)은 12월 13일 새벽 오전 1시 35분경 국방부와 육군본부(육본)가 있던 용산 삼각지에 도착한 후 먼저 육본 근무 헌병들을 무력으로 제압한 후 무장을 해제시켰다. 이후 국방부 청사 점령과정에서 경계 병력과 반란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신군부는 쿠데타 성공 직후 작성한 상황일지에서 지하벙커 입구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헌병 근무자 2명 중 1명을 체포했지만, 나머지 1명은 "반항 사격과 함께 벙커로 도주 중 사살됨"이라고 기록했다. 그가 정선엽 병장이다. 가슴 부위에 3발, 목에서 머리로 관통한 1발 등 모두 4발의 총탄을 맞고 정 병장이 현장에서 숨진 시각은 13일 새벽 2시께. 이날 새벽 반란군에게 목숨을 잃은 군인은 한 사람 더 있었다. 바로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이었던 고 김오랑 중령(당시 소령·육사 25기)이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육군 특수전사령부를 장악하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최세창 3공수여단장(육사 13기)은 예하 병력을 동원해 특전사령부 외곽을 포위했다. 13일 새벽 0시 15분께, 3공수여단 15대대 병력이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를 시도했다.
15대대장 박종규 중령(육사 23기)이 이끄는 10여 명의 체포조가 특전사령관 집무실로 난입할 때 권총 한 자루로 반란군에 맞서 상관을 지키려던 김 중령은 목 아래와 복부, 허벅지 등에 6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정 사령관 역시 왼쪽 팔에 총상을 입은 채 주저앉았다. 반란군은 부상당한 정 사령관을 끌고 갔다. 피를 흘리며 현장에 쓰러져 있던 김 중령은 한동안 그대로 방치되었고, 뒤늦게 의무대로 후송됐지만 끝내 절명했다.
43년 만에 바로잡힌 그날의 진실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배우 정해인씨가 김 중령을 모티브로 한 오진호 소령 역을 맡아 비극적 장면을 재연했다. 김오랑 중령의 평전 <역사의 하늘에 뜬 별 김오랑>을 쓴 김준철(학군28기·특전사 대위 전역)씨는 목격자들의 진술을 근거로 김 중령의 맥박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면서 좀 더 신속한 조치가 취해졌다면 그를 살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고 아쉬워했다.
'참군인 김오랑 기념사업회' 사무처장(현 대한군인기념사업회장)을 맡아 김오랑 중령에 대한 추모사업을 진행하던 김준철씨는 지난 2000년 초부터 여러 해 동안 국회를 쫓아다니며 군사반란에 끝까지 저항하다 목숨을 잃었던 두 군인에 대한 명예회복 운동을 벌였다. 이런 노력으로 지난 2013년 4월 '고 김오랑 중령 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촉구 결의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후 정부는 국무회의를 거쳐 고 김오랑 중령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추서하는 영예 수여안을 의결했다.
2014년 4월 1일 특전사 창설 56주년을 맞아 열린 훈장 전수식에서 고인의 형님인 태랑씨는 '훈장이 너무 늦게 수여된 것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디고 느려 보이지만 이렇게라도 동생의 의로운 죽음을 알아주는 세상이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관련 기사 : 특전사, 고 김오랑 중령에 훈장 전수 https://omn.kr/7ndl).
아울러 고 정선엽 병장의 추모사업도 진행하던 김준철씨는 막다른 벽에 부딪쳤다. 정 병장 모교인 조선대학교에 요청해 명예졸업장 수여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김오랑 중령과는 달리 장교가 아닌 병사 신분이었던 정 병장의 공적기록이 없어 좀처럼 진전이 없었던 것이다. 고민하던 김씨는 지난 2021년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에 정 병장 사망의 진상을 규명해 고인과 유가족의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는 취지로 진정했다.
그동안 정 병장의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계엄군과의 오인사격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하지만 위원회 조사 결과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몸싸움을 벌이면서 벙커 진입을 막았던 정 병장이 '상관의 명령 없이는 총기를 내어줄 수 없다'고 끝까지 버티자 반란군이 M-16 소총을 발사했다는 목격자 진술을 확보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반란군은 이미 총탄을 맞고 쓰러져 있던 정 병장의 목 부위에 권총을 쏴 확인 사살까지 했다는 새로운 사실도 확인했다(관련 기사 : '오인사격 사망' 12·12 국방부 초병, 실제론 권총 확인사살됐다 https://omn.kr/1xzzy).
위원회는 정선엽 병장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오랑 중령 사건도 직권으로 조사했다. 고인의 형인 김태랑씨가 "(김 중령이) 직속상관인 사령관을 지키고, 군과 국가의 체제 수호를 위해 반란군에 대항하다 피살되었으므로 전사자임이 명백함에도 현재까지 사망원인이 순직에서 전사로 변경되지 않고 있어, 이를 바로잡아 고인의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 지난 2022년 9월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고 김오랑 중령의 사망구분을 순직에서 전사로 변경해 달라고 국방부에 요청했고, 국방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현행 군인사법은 '전사자'를 "'적과의 대항 또는 적의 행위로 사망한 사람', '무장폭동, 반란 또는 그 밖의 치안교란을 방지하기 위한 행위로 인하여 사망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위원회는 지난 2022년 3월과 9월, 각각 정선엽 병장과 김오랑 중령에 대해 사망구분을 순직에서 전사로 변경해 달라고 국방부에 요청했고, 국방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현행 군인사법은 '전사자'를 "'적과의 대항 또는 적의 행위로 사망한 사람', '무장폭동, 반란 또는 그 밖의 치안교란을 방지하기 위한 행위로 인하여 사망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반란군에 대항하다 목숨을 잃은 김오랑 중령과 정선엽 병장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는 결론이었다.
두 사람이 반란군의 총격에 숨진 뒤 43년만이자, 지난 1997년 대법원이 12.12 사건을 군사반란이라고 명확히 규정한 지 25년 만의 일이었다.
두 군인의 죽음을 제대로 기억해야 할 이유
▲ 정선엽 병장의 묘비 뒷면에는 지난 2022년 국방부가 사망구분을 바로잡은 데 따라 전사로 수정되었다.
김준철씨와 함께 지난 14일 오후 국립 서울 현충원을 찾았다. 8묘역 38315번은 육군 병장 정선엽의 묘다. 묘비 뒷면에는 그가 "1979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리고 있다. 지난해 국방부가 정 병장의 사망구분을 순직에서 전사로 바로잡은 데 이은 후속초치다. 그런데 29번 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고 김오랑 중령의 묘비는 아직 수정되지 않은 채 여전히 순직으로 남아있다.
김준철씨는 김 중령의 직계 존·비속이 남아 있지 않은 데서 그 원인을 찾았다. 적극적으로 나서 묘비 수정을 요청하는 유가족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5살의 나이로 숨진 김 중령은 자녀가 없었고, 부인 백영옥씨도 1991년 고인이 됐다. 생전 동생의 명예회복을 간절히 바랐던 김태랑씨도 지난해 12월 육군참모총장 명의 전사확인서를 받기 이틀 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김오랑 중령의 묘비는 여전히 "1979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순직"으로 남아 있다.
▲ 고 김오랑 중령의 묘비. 뒷면에는 여전히 그가 1979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순직한 것으로 나와 있다.
'군인의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하는 문제는 필연적으로 '역사를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란 물음과 맞닿아 있다.
지난 2020년 12월 국방부는 중앙 전공사상심사위원회를 열어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작전에 투입됐다가 숨진 군인 22명을 '전사자'에서 '순직자'로 변경했다. 당시까지 서울현충원 28묘역과 29묘역에 안장된 진압군 22명의 묘비에는 '1980년 5월 OO일 광주에서 전사'로 표기되어 있었다.
정부가 40년 만에 이들의 사망 구분을 전사에서 순직으로 바로잡은 가장 큰 이유는 5.18 당시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내란행위가 아니라 헌정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였다는 1997년 대법원 판결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사망한 진압군을 '전사자'로 규정하는 건 광주시민을 사실상 '적'으로 간주한 것이라는 지속적 문제제기도 큰 몫을 했다.
지난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전두환씨 등 주요 피고인들에게 원심과 마찬가지로 반란 및 내란죄를 적용, 성공한 쿠데타라 할지라도 처벌할 수 있다는 판례를 남겼다. 대법원의 선고는 12·12는 '군사반란'으로, 5·17 비상계엄 확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은 '국헌 문란 목적의 연속된 폭동'으로 규정했던 원심 판결을 유지한 역사적 판결이었다.
쿠데타 관련자들에게 법의 심판이 내려지긴 했지만, 대법원 확정 판결 후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관련자 전원에게 특별사면·복권이 이뤄짐으로써 정치적 거래라는 비판을 자초했다. '사면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자들에게 정치적 부활의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우려는 결코 기우가 아니었다. 전두환씨는 아무런 반성 없이 줄곧 역사 왜곡에 앞장섰고, 사죄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반란가담자 중 일부는 지금까지도 법원 판결을 부인하면서 12.12쿠데타와 5.18유혈진압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김준철씨는 몇 해 전 육사와 국방부 앞에서 김오랑 중령의 추모비를 육사 교정 안에 설치할 것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였다. 육사 생도 신조처럼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 김 중령의 죽음이 군인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역사를 부정하려는 이들의 작태를 그저 바라만보면서, 후세의 평가에 맡기자는 목소리는 무책임하다고 했다. 정의와 불의, 진실과 거짓을 가리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쿠데타를 일으켰던 정치군인들의 행태와 대척점에 서 있었던,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했던 두 군인의 죽음을 제대로 기억해야 할 이유다.
김도균(capa1954)
'독후감, 감상문, 관람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800만 돌파 '파묘', 흥행 뒤에 숨은 '항일 코드' (0) | 2024.03.12 |
---|---|
‘서울의 봄’과 ‘더 킹’… 그 반역의 비참한 최후 (0) | 2023.12.05 |
「조국의 시간」과 <살아서 돌아온 사람> (0) | 2021.07.12 |
한국사 교사조차 부끄럽게 만든 책, 추천합니다. '한 시대 다른 삶' (0) | 2021.03.10 |
신영복의 언약 『처음처럼』 (0) | 2016.1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