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통에 무슨 잔치" 한강의 칩거가 던지는 메시지
'역사' 직시한 작가 넘어 '현재' 호흡하는 세계 지식인
기자회견, 공적‧사적 축하 행사 죄다 이례적인 자제
"이기는 전쟁 시나리오는 없다" NYT 기고문 긴 울림
여전한 일각의 어깃장, 뭐 어쩌랴 표현의 자유인 걸
"(작가에게) 감사한다. 지난 몇 달 동안 한반도 긴장과 관련해 전 세계에서 출판된 그 어떤 글보다도 기억에 남을 걸작이다. 누군가 이 글의 원고를 구해 미국 행정부의 손에 쥐어주었으면 한다. 그들이 (한반도 긴장에) 무엇이 걸려 있는지 잊지 않도록…."
7년 전 소설가 한강의 뉴욕타임스 기고문에 달린 독자의 댓글이다.
대한민국이 한강을 앓고 있다. 한국인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뒤 급속히 퍼지고 있는 열병이다.
온, 오프라인 언론과 소셜네트워크(SNS)는 물론 서점가는 온통 한강을 찾는다. 모처럼의 낭보가 '파국적 평형상태'에서 침몰하던 국가를 일시적으로나마 띄워 올린다.
그런데 정작 한강은 나흘째 집에서 칩거하고 있다. 기자회견은 물론, 어떠한 축하 행사도 열지 않고 있다. 집 대문 앞에 이웃과 독자들이 갖다 놓은 꽃 화분과 축하 편지도 거두지 않고 있다. 은둔형 외톨이여서도, 거대한 축하의 물결 속에서 잠시나마 정적을 찾으려고 해서도 아니다.
11일 문학동네 편집부를 통해 밝힌 소감문에서 "수상자로 선정해 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하루 동안 거대한 파도처럼 따뜻한 축하의 마음들이 전해져 온 것도 저를 놀라게 했다.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라며 예를 표했다.
칩거는 자기 밖의 이유에서다. 아버지 한승원 작가가 딸을 대신해 전한 이유가 울림을 준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이 치열해서, 날마다 모든 죽음이 실려 나가는 데 무슨 잔치를 하고, 기자회견을 할 것이냐고 했다. 양해를 구한다."
85세의 아버지는 딸이 얼마나 자랑스럽겠나. 그러나 딸의 뜻을 좇아 고향 지인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을 애써 다독이고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지난 10일 소설가 한강을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하면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마주하며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다"라고 밝혔다. 각국 언론이 봇물 터지듯 내놓는 논평에서 빠지지 않는 한 줄이다.
한강 작품의 역사성은 12살 때 아버지의 책상 위에서 본 5.18 사진첩에서 비롯돼 제주 4.3에 이르렀다. 작품으로는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와 제주 4.3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가 산자와 망자의 입을 빌려 내놓은 증언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한강의 '칩거'는 죽어가는 이들에 대한 예의에서였다. 이 땅에 머물지 않고 세계를 호흡하고 있었다. 처절한 비극을 쓴 작가일지라도 노벨문학상 수상 낭보가 전해진 뒤 하루 이틀이라도 마음껏 자축했을 터. 그의 예외적인 칩거가 현재를 호흡하는 '지식인 한강'의 추억을 떠올린다.
한반도에서 당장이라도 전쟁이 날 것 같은 불온한 기운이 넘치던 2017년 10월 8일. 한강은 뉴욕타임스에 '미국이 전쟁을 말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While the U.S. Talks of War, South Korea Shudders)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각국 언론에 한반도 전쟁위기설이 전염병처럼 번지면, 세계는 한국인들의 '태연한 일상'을 궁금해한다. 한국의 학교와 병원, 서점, 꽃집, 카페가 평상시처럼 문을 연다. 한강은 추석즈음 현금꾸러미를 잃어버린 70대 노인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다시 전쟁이 난다고 하니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를 겪은 노인은 손주의 학자금으로 쓸 요량으로 넣은 적금을 헐었다. 전쟁위기설 속 한국인들의 무관심한 일상, 그 밑동에 전쟁의 상흔이 깊이 새겨져 있음을 미국 독자들에게 알렸다. 2024년 10월, 더욱 심화되고 있는 한반도 위기다.
전후세대인 작가는 휴전선 넘어 북한이 초현실적 신기루이지만, 많은 한국인은 무관심과 긴장이라는 모순적 감정에 어쩔 수 없이 익숙해졌을 뿐임을 설명한다. 그러나 초현실뿐 아니라 현실에도 살고 있다. 평양이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라는 지리적 사실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두렵다. 아직 (살아남아) 맞고 싶은 날들이 있고, 우리 옆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남쪽에 5000만 명이 살고, 그중 70만 명의 유치원생이 있다. 우리에겐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해 추석 연휴는 '북한의 완전한 파괴'를 다짐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느닷없이 '폭풍전의 고요'를 언급, 어수선한 가운데 시작됐다. 9월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북한은 미국령 괌에 핵미사일을 발사하겠다고 경고했다. 한강의 글은 워싱턴을 들락이던 어떤 외교안보 고위당국자도 전하지 못한 한국민의 마음을 특유의 아름다운 문체에 실어 전달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은 몇 개의 시나리오로 제2의 한국전쟁을 입에 올린다. "전쟁이 나면 매일 2만 명의 한국인이 죽을 것이다" "결국은 우리가 이긴다" 등. "(핵무기를 사용하는 순간) 북한이 절멸될 것'이라는 장담은 지금도 되풀이된다. 상원 군사위 핵심 린지 그레이엄 의원(공화, 사우스캐롤라이나)은 NBC방송에 나와 태연하게 북한이 미국을 공격하기 전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걱정할 것 없다. 전쟁이 나도 거기서 벌어지지, 여기(미국)에서 벌어지지 않는다"라면서 걱정하는 앵커들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한강은 자신이 <소년이 온다>를 준비하면서 2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 보스니아 내전, 아메리칸 인디언 학살을 조사한 결과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subhuman)로 여길 때 잔혹 행위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소개했다. "한반도에서 또 다른 대리전을 절대적으로 원치 않는다"라면서 "평화적이지 않은 해법과 승리는 공허하고, 터무니없으며, 불가능한 슬로건"이라고 못을 박았다. 새삼 들춰보니 한강의 기고문에는 285개의 댓글이 달렸다, "한국 방위는 한국인이 하라"는 주한미군 철수론도 있지만, 한반도 전쟁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됐다는 반응이 많았다. 어느 고위공직자나 정치인, 학자가 쓴 글보다 깊고 넓은 반향을 일으켰다. 한강이 '글로벌 지식인'으로 존재를 알린 글이었다고 본다.
당시 국내 일각에서 나왔던 '잡음'이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국민적 경사에도 반복되고 있다. 징한 생명력이다. 주로 한국전쟁을 '대리전'이라고 규정했다는 이유로 어깃장을 놓았다. 노벨상 낭보가 터지자, 당시 쓴 한강 비판 글을 다시 게시하고 있다고 한다. 주로 조갑제닷컴이나 전광훈 TV 등이 서식지다. 한 '여성 작가'는 SNS에 한강 소설은 역사 왜곡이라며 중국 작가가 받았어야 했다고 우긴다. 뭐, 어쩌랴. 그것도 표현의 자유임을. 다만 그런 주장을 NYT에 기고, 논의를 글로벌 차원으로 넓히거나, '골방의 글쓰기'로 영국 맨부커상, 프랑스 메디치상, 노벨문학상에 도전해 볼 것을 정중히 권한다. 혼탁한 풍경과 일각의 소음 속에 더욱 빛나는 한강의 칩거다.
김진호 에디터gino777@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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