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이 겪은 황당한 일... 노벨문학상이 한국사회에 준 교훈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의 역학: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말해주는 것
▲ 2023년 11월 14일 서울 양천구 목동 한국방송회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한강 작가 모습.연합뉴스
한국 작가 중 최초로 한강 작가(아래 호칭 생략)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서 많은 분석, 평가 기사가 나오고, SNS에도 후기가 봇물 터지듯 넘친다.
여러 가지로 우울한 시대에 오랜만에 나온 반가운 소식이라서 그럴 것이다. 나도 같은 마음이다.
한강은 나도 주목한 작가였고 언젠가 한국문학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면 유력한 후보라고 생각해 왔지만, 내 예상보다는 빠른 수상이었기에 놀랐다.
한강의 수상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평론가이자 독자로서 살펴보고 싶다.
노벨문학상은 특정한 작품 하나가 아니라, 수상 작가가 그동안 쌓아온 문학적 성취를 평가해서 준다. 아직도 더 많은 작품을 쓸 시간이 많이 남은 작가이지만, 한강이 지금까지 쌓은 작품 세계에 대한 평가로는 노벨문학상 위원회의 선정 사유가 핵심을 짚는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을 쓴 한국 작가 한강에게 수여합니다. 한강은 자신의 작품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고, 각 작품에서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합니다. 그녀는 신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결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갖고 있으며,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되었습니다."
역사적 트라우마, 인간 삶의 연약함, 강렬한 시적 산문 등이 열쇳말이다. 평론가도 개인적 취향이 있기에, 나는 그간 나온 한강 작품 모두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인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관통하는 주제가 "인간 삶의 연약함", 혹은 최근 한강이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하는 생명의 연약함과 그것을 위협하는 폭력의 문제라는 건 분명하다.
폭력의 기원이 <채식주의자>처럼 사적인 가족 관계에서 연유하든, <소년이 온다>나 <작별하지 않는다>처럼 광주 민주화 운동이나 제주 4.3 항쟁 같은 역사적 상황에서 오는 것이든, 작가는 폭력이 희생시키는 존재에 관심을 기울인다.
작가는 한국 현대사에 깊은 상처를 남긴 "역사적 트라우마"를 끄집어내 기억하고, 치유의 길을 모색한다.
통상 "시적 산문"이라고 평가하는 한강 문체의 특징은, 통상 '시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현란한 비유, 독특한 이미지, 리듬감 있는 문체 등의 형식적 문제라기보다는, 시적 서술자(poetic narrator)를 떠올리게 하는, 낮지만 강인한 목소리가 작품에 스며 있기 때문이다. 어떤 서술 시점을 택하든 그런 시적 서술자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제시하는 좌표
나는 한강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이런 열쇳말은, 향후 한국문학이 가야 할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고 판단한다. 물론 문학에 유일한 정답이나 정해진 길은 없다. 하지만 한강의 이번 수상은 문학에서 지역성과 보편성, 민족성과 세계성의 관계를 살펴보는 또렷한 좌표를 제시한다.
노벨문학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20세기 현대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일랜드 작가인 제임스 조이스는 오래전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언제나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 관해 쓰고 있는데, 더블린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면 세계 모든 도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특수성에는 보편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한강은 한국의 가족 관계에서 벌어지는 몰이해와 폭력, 광주민주화운동, 제주 4.3 항쟁이라는 "특수성" 속에서 "보편성"을 발견했다.
한국문학이 세계화되는 경로는, 추상적 보편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현실의 뿌리를 탐구하는 것이라는 걸 한강의 수상은 확인해 줬다. 나는 이 점이 앞으로도 한국 작가가 잊지 말아야 할 지점이라고 판단한다.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도 비슷한 문화적 맥락에서 나온 성과다. 이 작품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한국사회의 지역성 속에서 현 단계 인류 문명의 어떤 구멍을 드러냈다.
한강 작품이 천착하는 한국 사회의 역사적 트라우마는 지나간 일이 아니다.
권력은 입만 열면 "자유"를 외치고 있지만, 한강이 걸어온 길에는 자유의 억압이 만든 트라우마가 새겨져 있다. 내가 그의 대표작이라고 보는 <소년이 온다>는, 2014년 세종도서 문학 나눔 3차 심사에서 탈락한 사례가 있다.
"책에 줄을 쳐가며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을 검사해, 사실상 사전 검열이 이뤄지는 것으로 보였다"라는 증언이 있다. 소위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이다.
작가는 2016년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했다. 이런 경우 대통령은 축전을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2023년에는 <채식주의자>가 유해도서로 분류돼, 일선 학교 도서관에서 폐기된 일이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이런 황당한 일은 한강에게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박찬욱, 봉준호, 황동혁 등, 칸 영화제, 오스카상, 에미상 등 국제적인 예술상을 수상해 한국 문화계에 크게 이바지한 감독들이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것이 밝혀졌다. 우습게도 블랙리스트 목록이 유력한 해외 예술상 수상 리스트라는 씁쓸한 평가가 나오고 있다.
여기서 얻는 교훈은, 정치적 탄압은 문학예술의 목소리를 억누르지 못하고, 제대로 된 평가를 가릴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전 세계적으로 네트워크가 연결되어 있고, 실시간으로 정보 공유와 평가가 이뤄지는 시대에는.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20세기 후반부에 출간된 문학 연구서 중 빼놓을 수 없는 책이고, 비교문학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이바지한 파스칼 카자노바의 <세계문학공화국>이라는 책이 있다. 최근에 한국어 번역도 나왔다.
이 책은 각 국가의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관계를 수많은 사례에 기대 분석한다.
세계문학 공간은 평등한 세계가 아니다. 현실 세계와 마찬가지로 세계문학 공간에도 중심부와 주변부가 있다. 한국어와 한국문학은 그 공간에서 아직까지 주변부 혹은 반주변부에 위치한다. 그리고 카자노바가 아일랜드 문학 사례를 통해 보여주듯이, 주변부 작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중심부 문학에 도전하고 세계문학 공간의 지형을 바꾼다.
예컨대 독립 후 오랫동안 미국문학은 영국문학의 그늘에서 자기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분투했다. 카자노바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 소설의 탄생은 1884년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이 출간되면서, 미국 문학에서만 가능한 독특한 구비전승을 발견하면서 이뤄졌다. 트웨인 이후의 미국 문학이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화하는 통속어의 노골성, 폭력성, 반순응주의를 통해 영국의 문학 규범과 다른 길을 간다.
미국 소설은 "영국 문학이 강요하는 문어(文語)의 굴레와 규범에서 해방된, 미국적인 특수한 언어의 표방을 통해 차이"를 만들어냈다.
나는 시적 산문으로 표현되는 한강 작품의 고유성은, 한국문학 전통에서 강하게 힘을 행사해 온 창작의 "굴레와 규범"에서 작가가 배울 건 배우고 깨야 할 것은 깨면서, 한국적인 "특수한 언어의 표방을 통해 차이"를 만들어낸 데 있다고 판단한다. 요컨대 뛰어난 문학의 기준은 어떤 차이와 특이성을 보여주는 데 있다. 그리고 그런 차이와 특이성은 작가 개인의 역량만이 아니라, 그가 속한 국가와 언어가 지닌 문화적 역량이 축적될 때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한강의 수상은, 지난 기간 동안 한류, K-컬처가 확산되고 성장하면서, 한국영화와 드라마가 유력한 국제예술상에서 수상하고, BTS를 비롯한 대중음악이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퍼지는 것으로 드러나는, 한국문화의 체급이 올라간 기반 위에서 이뤄진 것이다.
많은 경우 문학예술상은 운이 따라야 하지만, 그런 운도 역량의 온축과 문화적 발언권의 힘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다.
한국 작가의 두 번째 노벨문학상을 기대하며
노벨문학상 발표 전날 <뉴욕타임스> 온라인에는 서평 담당 기자인 A.O 스콧이 노벨문학상에 관해 쓴 글이 실렸다. 특히 이런 구절이 눈길을 끈다.
"위대함은 인기와 같지 않습니다. 심지어 인기와는 정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위대한 책이란 그 정의상 재미로 읽는 책이 아니며, 비록 일부 책이 재미있었고 재미를 의도한 바가 있었다고 해도, 위대한 작가는 대부분 죽었기 때문에, 독자가 좋아하는 작가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책은 읽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을 느껴야 하는 책입니다. 위대한 작가는 독자가 읽었는지 아닌지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작가입니다."
위대함이 인기와 동일시되고, 특히 눈에 보이는 가치인 돈과 영향력이 위대함으로 여겨지는 시대이기에 새겨둘 만한 말이다. 20세기 문학, 아니 인류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작가인 제임스 조이스, 프란츠 카프카, 마르셀 프루스트, D.H. 로런스, 버지니아 울프, 조셉 콘래드 등은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고 널리 읽히지도 않는다. 그들의 이름은 유명하지만 그들의 작품은 지금도 소수의 사람이 읽는다. 예컨대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은 독자가 극소수라고 해서 그 작품과 작가의 위대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건 별개 문제다.
이번 수상으로 한강 작품이 한동안 불티나게 팔리고 한국문학 전반에 관한 관심이 올라가는 건 반갑다. 하지만 한강 작품을 실제로 읽어보면, 술술 읽히는 작품이 아니라는 걸 금방 알 것이다. 피상적인 재미와도 거리가 멀다. 훌륭한 작품은, 쉽지 않고 찬찬히 읽으면서 인간과 세계를 돌아볼 것을 요구하기에, 종종 "인기"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런 작품은 "읽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게 만든다. 한강이 이번 수상에서 비롯되는 압박이나 외부의 시선을 접어 두고, 앞으로도 한국적 특수성 속에서 인류적 보편성을 드러내는 작품을, 그만의 고유한 형식과 문체로 표현해 주길 기대한다. 다른 작가에게도 같은 기대를 한다.
그런 작품이 쌓여서 두꺼운 한국문학의 지층을 이루게 되면, 오래지 않아 우리는 두 번째, 세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만나게 될 것이다. 다시 한번 수상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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