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대학살의 재현을 거부하며

道雨 2025. 3. 25. 12:06

대학살의 재현을 거부하며

 

 

 

영현백과 종이관

 

 

"군은 계엄 몇 달 전, 시신을 임시 보관하는 영현백을 대량으로 사들이고, 종이로 만든 관 구매도 문의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앵커가 긴장한 표정으로 뉴스를 전달하고 있었다.

‘영현백’과 ‘종이로 만든 관’이란 단어는 일상생활에서 거의 쓰지 않는다. 사전을 검색한 후에야 영현백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 물건인지 정확하게 알게 됐다.

이 두 개의 단어를 써야만 하는 상황이란, 누군가의 죽음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뉴스를 보는 동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뉴스는 명확하게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알려 준다.

12·3 계엄령 발표 이전, 이미 실제로 군이 시신을 임시로 보관할 영현백을 대량 구매한 것이다.

또 한 가지는 군이 종이관을 구매하기 위해, 업체에 가격과 생산 기간을 구체적으로 문의한 점이다.

추미애 의원은 17일 페이스 북에 사진 자료를 첨부해 ,군이 보유한 영현백의 현황을 세상에 알렸다. 이 자료에 의하면, 군은 2023년 12월까지 영현백 1,800여 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2024년 추가로 3,000 여개의 영현백을 조달해, 12월 기준 총 4,940개를 보유하게 된다.

맥락상 군이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2024년 영현백을 대량 조달한 것은 12·3 계엄과 무관할 수 없다.

추미애 의원은 이 자료를 공개하며 끔찍한 살기가 보인다고 적었다.

 



대량 학살을 예고한 12·3 비상계엄령

12·3 당시 군은, 국제조약에 따라 사용이 금지된 산탄총용 슬러그탄 HP(할로 포인트)형 30발도 준비했다. 이 탄환은 몸 안에서 팽창하도록 특수 제작됐다. 일반 탄환에 비해 총을 맞은 사람에게 더 큰 상처를 내면서 고통을 극대화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다. 비인도적인 특수 무기다.

계엄세력이 반드시 죽여 없애고 싶었던 사람에게 사용하려고 이 특수 탄환을 준비한 것으로 추측된다.

군은 이 외에도 실탄과 공포탄 등 총 75,806발, 투척물과 폭발물 418개 등으로 무장하고, 12·3 당일 밤 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투입됐다.

위의 자료 또한 12월 중순 경, 군이 추미애 의원실에 제출했고, 언론이 이를 보도했다. 하지만 우리는 12·3 당일 군이 소지했던 무기의 총 규모를 아직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군이 일부 자료를 비공개 처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황상 군이 소지했던 무기의 규모가, 지금까지 밝혀진 것보다 훨씬 더 많았을 거라는 합리적인 추측이 가능하다.

군이 제출한 자료들은, 12·3 비상계엄령이 대량 학살을 전제하고 기획됐다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해 준다. 그러니까 계엄을 선포한 후, 대량의 무기를 사용해 3,000여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한 후, 시신 처리를 위해 영현백과 종이관까지 치밀하게 준비한 것으로 이해된다.

윤석열이 12·3 비상계엄포고령을 통해, 저는 지금까지 패악질을 일삼은 망국의 원흉, 반국가세력을 반드시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한, 이 ‘반드시 척결’이라는 추상적인 단어가 군에 의해 다량의 살상용 무기와 시신을 처리할 영현백과 종이관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결국 12·3 비상계엄령의 본질은, 윤석열이 다수의 정치적 반대파와 비판적인 시민들을 절멸시키기 위해 진행해 왔던, 거대한 집단 학살 계획을 세상에 알리는 예고편으로 이해된다.

 

                             *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벌어진 국가폭력의 참상.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 날의 공포

12·3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던 날 공포심에 온 몸을 떨었다. 공황상태에 빠져드는 내 자신을 통제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계엄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5·18 광주에서 공수부대의 총칼에 피를 흘리며 죽어간 시민들의 흑백 영상이 떠올랐다.

6월 항쟁 당시 최루탄으로 범벅이 된 아스팔트 위를, 백골단이 광기에 사로잡혀 인간 사냥을 위해 몽둥이를 들고 날뛰던 영상도 떠올랐다. 머릿속에서 두 개의 영상이 동시에 교차하면서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그 야만적인 타락한 국가폭력이, 무방비 상태에서 당했던 그 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이 시대에 다시 재현될 수도 있다는 공포는, 무엇으로도 내 자신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군의 총칼에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한 맺힌 굵은 눈물과 부모를 떠나보낸 어린 아이의 생기 잃은 슬픈 눈동자가, 학살로 인한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극대화 시켰던 시간이기도 했다.

비상계엄군의 무자비한 총칼이 내 몸을 향해 돌진해 올 수 있다. 지인의 몸을 향할 수도 있다. 길을 걷던 나도 죽고 밥을 먹다가 네가 죽을 수도 있다. 연이어 이렇게 끔찍한 상상이 압도해 왔다.

대학살이 재현됐다면 4·3과 5·18이 그랬듯이, 계엄군의 총칼이 나와 너의 몸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다. 끝내는 우리를 무차별적으로 피 흘리는 죽음의 세계로 내몰았을 것이다. 이 시퍼런 공포는 새벽에 국회가 비상계엄령을 해제한 후 무장한 계엄군이 국회를 떠나기 전까지 지속됐다.

수거, 인격의 사물화

12·3 비상계엄의 주요 설계자이자 비선이었던 노상원은 수첩에 빼곡하게 자필 메모를 남겼다. 그의 수첩에서 눈에 띄는 단어는 ‘수거’였다.

노상원은 윤석열이 말한 반국가세력 즉, 윤석열의 정치적 반대자들과 그를 화나게 만들었던 수십 명을 수거 대상으로 일일이 호명했다. 수첩에는 수거대상 처리방법 연구라는 제목으로, 사후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과 과정도 적혀 있었다. 윤석열이 반드시 척결이라고 한 말이 암시하듯, 수첩에 적혀있던 사람들은 체포와 처단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각 나라의 언어에는 공통적으로 문화적 규범이 있다. 어떤 나라의 언어든 품사가 같더라도 예외적으로 사람 대 동물·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단어를 구분해 사용하는 규범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사망, 소천, 식사 등은 사람을 대상으로만 사용한다. 이 단어들은 동물을 대상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수거는 사람을 대상으로 쓰이는 단어가 결코 아니다. 쓰레기 분리수거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수거라는 단어는 사물을 대상으로 쓰인다.

노상원이 작성한 수첩에서,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수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봤을 때, 당혹감을 느꼈었다. 처음에는 이 단어를 시신을 수습이 아닌 수거라고 표현했다고 이해했다. 반복적으로 뉴스를 보면서, 나중에서야 수거라는 단어가 살아있는 사람 그 자체를 대상으로 쓴 말로 이해됐다.

계엄세력은 수거라는 단어를 사람을 대상으로 썼다. 사람의 인격을 사물화 한 결과다. 비극은 살아있는 사람·생명을 비인격화해 사물화 한 그들의 인식에서 시작됐다. 노상원이 수거라는 단어를 수첩에 옮겨 적기 이전의 과정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상대진영과 비판적인 정치인에 갖는 윤석열의 지속적인 광기와 히스테릭한 반민주적인 의식을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다.

 

*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특별수사단이 확보한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수첩에, "NLL에서 북의 공격을 유도"라는 내용이 적혀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MBC 뉴스 화면 캡처)

 

 

 

숨을 쉬며 살아 움직이는 사물

계엄세력 사이에서는 이미 21대 국회에서 정치적 반대진영에 대해 혐오를 증폭시키고 절대적으로 배제시키려고 시도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국회는 2023년 9월 이재명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가결시켰다. 그들이 얼마나 광적으로 정치의 장에서 이재명을 배제하고 제거시키려고 몰두 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재명에 대한 체포는 실패했다. 하지만 계엄세력은 국가 권력을 이용한 이해관계의 실현을 포기할 수 없었다. 방해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배제보다 한층 수위를 높여 대응하고 싶은 욕망을 절제하지 못했다. 마침내 정치적 반대진영 모두를 수거대상으로 제거해야할 사물로 인식하는 지경까지 도달했다. 그 결과가 바로 12·3 비상계엄령 선포였다.

계엄세력은 이재명을 정점으로 한 야당 정치인들뿐만이 아니라, 비판적 지식인들과 종교인들까지 빨갱이·반국가세력이라는 프레임으로 의식의 재구성을 완성 시켰다. 마침내 12·3을 기점으로 이들을 절멸시켜야할 대상으로 낙인찍었기 때문에, 수거라는 말도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계엄세력에게 상대 진영의 정치인과 비판적인 시민들은 모두 수거의 대상으로, 숨을 쉬며 살아 움직이는 사물일 뿐이었다.

김건희가 이재명도 쏘고 나도 죽고 싶다고 했다는 말에서, 중요한 것은 ‘이재명도 쏘고’다. 최고 권력자로서 숨을 쉬며 살아 움직이는 사물 하나 쯤 제거하겠다는데 무슨 문제인가라는 의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발언이었다.

이는 12·3 이후 권력 중심부의 광기가 여전히 극에 달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반란이 종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김건희의 말이 증명하는 셈이기도 하다.

경계 밖 예외적 존재자

12·3 비상계엄을 통해 계엄세력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변종된 파시즘적 광기다.

파시스트는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모든 것을 독점하고 도구화한다. 국가의 자원과 조직을 자신에게 종속시켜, 권한을 가진 자라는 명분을 앞세워 권력행사를 극대화 시킨다. 즉 국가권력의 사유화이다.

파시스트는 자신의 위치를 규범의 경계 밖으로 이탈시켜 고정시킨 후, 스스로를 예외적인 존재자로 인식한다. 이 때 헌법과 법률은 무력화된다.

심우정이 반란수괴 윤석열을 석방한 사례도, 윤석열이 규범의 경계 밖에 위치한 예외적 존재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신 규범의 경계 안에 위치해야만 하는 살아 움직이는 비인격화된 사물은,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된다면 언제라도 죽여 없애도 되는 수거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독재자가 그랬다.

결국 권력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광기에 사로잡힌 윤석열이라는 파시스트가 계획한 12·3 비상계엄은, 살아 움직이는 사물의 수거를 통한 거대한 죽음의 생산이 목적이었다.

계엄군은 죽음을 생산하는 움직이는 기지이자, 수거라는 국가폭력을 착실하게 실행할 도구로 설정돼 있었다. 12·3 당일 밤 국회에 투입된 계엄군은, 죽음을 생산하는 도구가 되라는 권력자의 강요에 소극적으로 저항해 대학살의 재현을 거부했다.

모든 순간이 애도의식이다

올해 2,3월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와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여기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78년이 지나고, 또 45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애도를 끝낼 수 없는 두 죽음들이 거대한 산봉우리처럼 서 있다.

78년 전 제주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경찰은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들도, 산달인지 배가 불러 허리를 짚고 서 있는 여자도…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총살했던 자리는 밤사이 썰물에 쓸려가서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습니다. 이렇게 하려고 모래밭에서 죽였구나라고 한 노인이 증언한다.

또 다른 이는 살 만해진 다음부터 이날까지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 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라고 증언한다.

한강은 1인칭 망자의 시점에서 45년 전의 죽음들에 대해 말한다. 내 배 위로 모르는 아저씨의 몸이 구십도로 가로질러 놓인다. 또 다른 시신이 그 위로 가로질러 놓인다. 머리카락이 닿는다. 몸들이 묵묵히 흔들리며 트럭에 실려 간다. 이 몸들은 벌판 한 가운데에서 거대한 탑으로 쌓이고, 짐승의 사체 같은 것이 된다. 군인들이 몸 위로 석유를 뿌리고 몸을 태운다.

한강은 《소년이 온다》 에필로그에서, 열두살의 내가 사진첩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본 그 여자애는, 뺨과 목이 총검에 찢긴 채, 비스듬히 한쪽 눈을 뜨고 죽어 있었다고 담담하게 서술한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은 모두 팔십만발이었다. 그때 그 도시의 인구는 사십만이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 넣을 수 있는 탄환이 군인들에게 지급됐던 것이다.

2024년 12월 겨울 대한민국은, 78년 전의 죽음들이, 45년 전의 죽음들이 재현될 운명이었다. 이 역사적 사건은 진보 대 보수, 우파 대 좌파의 얄팍한 진영논리 따위로 포장돼서는 결코 안 된다. 이미 낡아빠진 이데올로기들 그 위로 덧칠돼서도 결코 안 된다.

절박하게 우리의 생명·삶을 온전하게 지켜 내느냐.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대학살로 죽음으로 내몰려 절멸 당하느냐의 문제다.

선택의 여지없이 우리의 생명·삶을 온전하게 지켜내는 길로 나가야 한다.

 

한강이 소설에서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한 것을, 다시는 재현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현주mindlenews01@mindlenews.com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