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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쿠데타란 걸 인정하지 않으면, 쿠데타는 성공한다”

道雨 2025. 3. 28. 09:29

“이게 쿠데타란 걸 인정하지 않으면, 쿠데타는 성공한다”

 

 

 

역사에 등장한 미친 권력자 중에,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는 아마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비정상이었다.

말(horse)을 집정관으로 임명하려 했다.

그 칼리굴라가 요즘 미국에서 심심찮게 회자하고 있다.

로마제국 최고의 스타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소환되고 있다.

 

공화당의 재선 하원의원 안나 폴리나 루나가 지난 1월 튀는 법안을 냈다.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 4명의 대통령 얼굴을 암벽에 조각해 놓은 국가기념물이 사우스다코타주 러시모어산에 있다.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에이브러햄 링컨이 그들이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의 얼굴도 조각해 넣자는 아이디어다.

 

2월에는 같은 당의 4선 하원의원 클라우디아 테니가 트럼프 추앙 대열에 합류해, 트럼프 대통령의 생일을 연방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법안을 냈다. 트럼프가 미국의 황금시대를 열고 있으므로,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탄생일을 법정 공휴일로 정한 선례를 따르자는 게 이유다.

 

재선의 공화당 하원의원 앤디 오글스는, 트럼프가 3선에 도전할 수 있도록 아예 헌법 개정을 주장한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결성한 ‘3선 프로젝트’란 모임도 있다.

이들이 지난 2월에 열린 보수정치행동회의(CPAC)에서, 트럼프를 카이사르에 비유하는 배너 입간판을 곳곳에 세웠다. 카이사르 이미지를 차용해 만든 트럼프 얼굴 밑에 ‘2028을 향해, 그리고 그 너머’(For 2028…And Beyond)라고 적어놨다.

미국 헌법에선 중임만 가능하므로 2028년 대선에 트럼프는 출마할 수 없다. 따라서 2028년 운운은 3선 개헌을 의미한다. ‘그 너머’는 카이사르가 받았던 종신독재관을 함의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1기 정부에서 백악관 수석전략가를 지낸 스티븐 배넌은, 이날 행사에서 노골적으로 “우리는 2028년 트럼프를 원한다”라고 외쳤다.

 

그냥 측근이나 지지자들의 낯뜨거운 아부 경쟁에 불과할까.

비록 농담조이긴 하나 트럼프 본인도 3선 출마를 여러차례 언급했다. 그는 스스로를 왕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뉴욕주가 추진한 혼잡통행료 부과 방침을 취소시킨 뒤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이렇게 올렸다.

“혼잡통행료는 이제 죽었고, 맨해튼과 모든 뉴욕이 구원을 받았다. 왕 만세(LONG LIVE THE KING).”

 

백악관은 한발 더 나갔다.

공식계정에 트럼프의 이 포스팅을 인용하면서, 이미지를 하나 첨부했다. 트럼프가 왕관을 쓴 모습에 ‘왕 만세’라는 문구가 적힌 이미지였다.

 

트럼프는 법원 판결조차 무시하면서까지 불법 이민자 추방을 강행했고, 그 판결을 내린 판사의 탄핵까지 언급했다. 헌법상 출생시민권을 부정하는 행정명령까지 발동했다.

헌법 입안자들이 미국 민주정의 대원칙으로 장착시켜 놓은 견제와 균형을 대놓고 무시하고 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하는 일은 불법이 될 수 없다.”


황제 나폴레옹이 했던 이 말을 트럼프가 언급하는 걸 보면, 그는 진심으로 자신을 전제군주로 여기는 듯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경고음이 들린다.

저서 ‘폭정’으로 유명한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 티머시 스나이더는, 미국에서 쿠데타가 진행 중이라면서 “이게 쿠데타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으면 그들의 쿠데타는 성공할 것”이라 경고했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는 그를 칼리굴라에 비유하면서, 트럼프를 ‘혼돈의 황제’로 불렀다. 그러면서 칼리굴라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했던 말을 상기시켰다.

“잊지 마세요. 누구에게든, 무슨 행동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Remember, I can do whatever I want to whomever I want.)

 

지금의 미국은 트럼프 군림 천하다.

“트럼프는 법과 논리를 초월한 존재로 군림하며, 모순되고 비합리적인 행동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방식으로 무제한적인 권력을 과시한다.”(슬라보이 지제크)

 

행정권력에다, 고분고분하다 못해 굴종에 몸이 단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하고 있다. 게다가 사법부마저 대통령에게 거의 절대적 면책 특권을 부여했다.

이런 판이니 트럼프로선 뭐하러 주저하고 누굴 눈치 보랴.

 

최근 ‘주식회사 독재정치’란 책을 낸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인 앤 애플바움은, 트럼프가 권위주의 체제로의 ‘체제 변경’(regime change)을 시도하고 있다며, 주의를 환기하고 나섰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병들어 기능 부전에 빠졌다는 지적은 이미 익숙한 서사다.

2013년 스탠퍼드대학의 프란시스 후쿠야마 교수가 이를 “비토크라시”로 불렀다.

“연방 거버넌스 구조에서의 이념적 양극화로 인해, 원래는 지나치게 강한 행정부 권위를 제어하기 위해 고안된, 견제와 균형의 미국 시스템이 비토크라시로 전락했다.”

상대에 대한 견제권 남용으로 국가의 기능이 사실상 멈춰버린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한 개념인지라 널리 사용되었다.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루칸 웨이는, 트럼프의 미국을 ‘경쟁적 권위주의’로 명명한다.

“권위주의는 헌법적 헌정 질서의 파괴 없이도 가능하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파시스트나 일당독재가 아니라, 경쟁적 권위주의, 즉 정당들이 선거에서 경쟁하기는 하지만, 현직자가 권력남용을 통해 경쟁자에게 불리하게 만든 기울어진 운동장 체제다.”

이 권위주의 체제는 정부 관료제를 정치·무기화한다. 한때 비판적이었던 실리콘밸리 최고경영자들이 앞다퉈 트럼프에게 기부·아첨하고, 만나려고 안달하는 현상(‘거대한 투항’)도 이 때문이다.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의 바버라 월터 교수의 개념은 ‘아노크라시’다. 그는 시리아, 레바논 등에서 일어난 내전에 대해 30년 넘게 연구한 학자다.

그는 200년도 넘는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미국이, 매우 위험한 상태, 즉 아노크라시에 진입했다고 진단했다.

아노크라시는 민주주의와 독재 중간의 무질서 상태를 의미한다. 민주적 요소들이 형식적으로 작동하기는 하지만, 견제와 균형을 무시하는 지도자로 인해 광범위한 무질서가 생겨나고, 심지어 내전 발생의 가능성이 가장 큰 위험한 체제다.(월터,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미국이 왕정으로 바뀌진 않을 것이나, 망가지는 건 분명한 추세다.

문제는 그 정도다.

어떤 이의 전망처럼 우파 독재국가로 전락할 수도 있다.

 

이런 우려와 퇴행이 우리에게도 들이닥쳤다.

군사력을 통한 친위 쿠데타를 감행한 유아독존 대통령과, 그를 극구 감싸면서 ‘윤석열화’되고 있는 국민의힘, 내란수괴와 그 수하들에 대해 온정을 넘어 동조하는 듯한 정치 검찰, 국회 추천 헌법재판관 미임명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조차 대놓고 무시하는 대통령 권한대행, 그리고 윤석열 구속 취소와 김성훈·이광우에 대한 영장 기각 등 삿된 기운마저 느껴지는 법원의 어처구니없는 판결까지, 우리는 지금 아노크라시의 작태와 혼란에 가슴이 터질 듯하고 치가 떨린다.

 

‘나라 꼴이 이게 뭐냐’는 탄성이 무성하다. 시대 우울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엉망진창의 나라 꼴이 무려 100일 넘게 지속되니, 태연한 게 되레 이상할 터다.

비토크라시를 넘어 아노크라시에 이른 최악의 형국이다.

우리의 민주주의, 과연 안녕한가? 지금의 대한민국, 진정 민주공화국인가?

 

로마 공화정의 몰락에 대해 다룬 자신의 책 ‘독재의 탄생’ 한국어판 서문에서,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 역사학과 에드워드 와츠 교수는 이렇게 충고했다.

“로마의 실패는 정치인들이 대중의 분노를 본인의 경력을 쌓는 데 이용하기로 작정했고, 또 그럼으로써 자신들을 공화국보다 우선한 탓이다. … 로마인들과 달리,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가 손상되지 않도록 제도와 구조, 정치 지도자들의 건전성 유지를 최우선 과제로 삼음으로써 이미 쟁취한 자유를 계속 지키길 희망한다.”

 

마음 굳게 먹고, 다시 신들메를 단단히 조여 매야 하겠다.

 

 

 

[ 이철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