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부른 개헌론, 내란세력에 면죄부 주려는가
우원식 의장 대통령중임제 등 개헌 주장 제기
"지금 시급한 것은 개헌보다 내란 수사와 종결"
"위헌 세력에 정치적 면죄부 주는 결과 될 것" 비판
졸속 개헌 추진보다 헌법유린 세력 청산이 우선
우원식 국회의장이 6일, 대통령 윤석열의 파면으로 치러질 조기 대선에 맞춰, 개헌 국민투표까지 동시에 실시하자고 제안한 것이, 개헌론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지금은 개헌을 얘기할 때가 아니며, 먼저 해야 할 일은 내란 사태의 종결과 내란 세력의 청산이라는 지적이 빗발쳤다. 먼저 청산해야 할 것은 내란이지 현행 헌법이 아니라는 것, 섣부른 개헌론으로 자칫 위헌 세력에 정치적 면죄부를 주고, 복권 기회를 주는 것일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과연 지금 시점에서 개헌을 운운하는 것이 온당한가, 라는 반발이 거세다.
87헌법의 개정 필요성에 대한 오래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헌정 질서를 유린한 내란 행위자들에 대한 단죄와 청산이 선결과제라는 것이 압도적 다수의 민심이기 때문이다.
헌법을 바꾸기 전에 헌법을 파괴한 세력부터 바로잡는 것이 민주주의 회복의 출발점이라는 얘기다.
추미애 의원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지금 (얘기되는) 개헌은 프레임"이라면서 "우리 스스로 '개헌'이라는 익숙한 프레임에 빠져들 때가 아니며, 개헌보다 시급한 것이 내란 특검을 통한 내란 실체의 수사와 근원적 종결이다"고 말했다.
"지금의 개헌 논쟁은 민주 공화국 공동체를 파괴하려 한 세력이 숨어들 수 있는 공간만 제공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한인섭 서울대 명예교수도 페이스북 글에서 "우원식 의장의 개헌 제안, 한마디로 반대한다"면서 "5년 단임제라는 국민적 쟁취물을 졸속으로 바꿀 수 없으며, 시간상으로도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 두 사람의 말에 개헌 주장에 대한 반대의 논리의 요지가 들어 있다.
주권자 혁명을 이끈 촛불행동도 긴급 성명을 내고 "개헌논의의 순서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성명은 "윤석열 파면 이후 내란세력의 책동을 완전히 진압하고 척결하는 일이 최우선인데, 이 무슨 뚱딴지같은 주장인가? 국회의장이 내란세력에 대한 척결의지가 이렇게 박약하고, 안이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매우 우려스럽다"면서 "개헌론은 내란세력이 숨어들 공간만 확보하게 해주고, 이들을 척결할 수 있는 국가적 역량을 분산, 약화시킬 뿐이다. 개헌을 내란세력과 협치로 처리하겠다는 작정인가"라고 물었다.
성명은 "개헌은 반드시 필요하나 그 시기는 내란세력 척결과 민주정부 건설 이후, 내란세력을 배제하고 차분하게 국민적 논의를 통해 하는 것이 마땅하고, 개헌논의에 내란정당 국힘당이 관여하게 해서는 절대 안 되며, 이들 내란조직을 해체하는 것이 급선무"라면서, 우원식 의장에게 '자중'을 요구하는 한편, 제 정당들에게도 이 논의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표명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더불어민주당 내에서도 지도부와 여러 의원들로부터 "내란 종식이 우선"이라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언주 최고위원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인 정청래 의원, 이인영 의원 등은 즉시 페이스북 등을 통해 반대 의견을 밝혔다.
"윤석열 파면이 엊그제고 아직 관저 퇴거도 안 한 상태인데 국민이 공감할지 의문"
"지금 국가적인 최우선 과제는 내란 진상을 철저히 규명해 그 책임을 묻는 일"
"개헌은 당위적으로 맞지만 지금은 내란 종식에 총단결·총집중할 때다"
"개헌? 내란수괴가 아직 감옥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다. 내란 뿌리부터 당장 뽑아야 한다"
"지금은 개헌 논의할 때가 아니다. 불가능하다. 대선을 앞두고 개헌 논의를 잘못하면 계엄과 탄핵으로 이어진 민의를 왜곡한다"
촛불행동의 성명과 민주당 의원들의 말에는, 개헌 논의에 몰두하는 순간, 사태의 책임자인 윤 전 대통령과 그 추종세력의 과오가 물타기되고, 단죄가 흐트러질 수 있다는 우려가 들어 있다.
개헌 논의와 추진 과정에서 헌정 파괴 세력의 부활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개헌은 국회 재적 3분의 2 이상의 동의가 필요한 만큼 여야 합의가 필수적이다. 우 의장은 조속한 시일 내 국회 헌법개정 특위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곧 내란 행위를 방조하거나 옹호했던 정치 세력까지 협력 파트너로 인정하게 된다는 뜻이다. 정청래 의원의 말처럼 "개헌 논의를 하게 되면 개헌특위가 구성될 테고, 그럼 해산해야 할 내란당이 동등하게 논의 테이블에 앉게 돼, 개헌 논의의 50%를 '저들'이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우 의장은 "민주당뿐 아니라 여러 당 지도부와 다 얘기를 했다"고 밝혔지만, 우 의장의 개헌 제안이 이재명 대표 등 민주당 측과 사전에 공감대를 이룬 상태에서 나온 것인지 의문이 제기된다.
개헌론은 한국 정치가 위기나 전환 국면을 맞을 때마다 제기된 이슈였다. 제왕적 대통령제, 삼권분립의 미비, 정당 정치의 경직성 등을 이유로, 마치 모든 해법이 개헌에 달렸다는 식으로 제시됐다.
그러나 이번 윤석열 내란 사태가 보여준 것은, 섣부른 개헌론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1987년 헌법에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개헌을 논하기 전에 헌법을 먼저 지켜야 한다는 상식을 확고히 하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윤석열 탄핵 파면은 헌정 유린과 내란 음모에 대한 심판이었다. 헌재는 탄핵 결정문에서 비상계엄 선포와 국회 활동 방해, 중앙선관위 장악 시도 등 일련의 행위를 명백한 헌정 유린으로 인정했고, 법치 수호를 위해 파면이 불가피함을 천명했다
윤석열 파면은 헌법을 문란케 한 내란 음모에 대한 헌정 수호적인 행위였다.
이 같은 탄핵 파면 과정이 주는 메시지는, 헌법을 수호하려는 노력으로써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헌법을 성급히 고치기 이전에, 헌법을 짓밟은 사람들을 제대로 처벌하고 합당한 책임을 물어 헌법을 제대로 수호하는 것이다.
한인섭 교수의 지적처럼, 윤석열이 현행 헌법의 취약점 때문에 내란계엄을 도발한 게 아니고, 내란계엄을 단죄한 게 현행 헌법이었다.
개헌보다 우선 필요한 것은 헌법을 지켜내는 일이다.
이번 사태에서 헌법이 흔들린 이유는 헌법 조항이 완벽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헌법을 무시한 권력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 의장의 개헌론은 역대 국회의장들이 들고 나왔던 개헌론의 맥을 잇는 것이기도 하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재임 중 여러 차례 개헌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2022년 7월 취임 직후부터 개헌 주장을 꺼냈고 이후에도 개헌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최고의 정치개혁'이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김 의장의 개헌론이 당시 윤석열 정권의 폭정과 실정에 대한 분노가 높아지고 있던 대다수 국민의 민심과는 동떨어진 주장인 탓에 외면을 받았다.
이번 우 의장의 개헌론 주장이 그와 달리 일정한 호응을 얻을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우 의장의 제안은 촛불로 표출되는 시민혁명을 개헌으로 완성하자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개헌은 시민혁명의 완성이라기보다는 시민혁명의 위력으로써 이뤄지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시민혁명의 토대를 굳건히 하는 것이다.
개헌이 필요하다는 원론에는 다수가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섣부른 개헌 시도는 촛불 시민이 만들어낸 민의의 흐름을 거스르고 왜곡하는 것일 수 있다.
국민이 이끌어낸 탄핵의 의미는, 헌정질서 수호와 민주주의 복원이다. 이를 완수하기도 전에 권력구조 개편을 논하는 것은, 국민이 부여한 과제의 우선순위를 뒤바꾸는 일이다.
국민들은 무엇보다 내란세력의 단죄와 새로운 민주정부 수립을 원하고 있다. 개헌은 새롭게 들어서는 정통성 있는 민주정부하에서, 국민적 합의와 참여를 바탕으로 이뤄져야 마땅하다.
충분한 공론화 과정과 사회적 숙의를 통해 개헌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우원식 의장의 제안처럼 촉박한 일정에 쫓겨 조기대선에 맞춰 개헌 국민투표까지 하려 한다면, 불과 두 달 남짓한 기간에 졸속으로 만들어진 개헌안에 국민들이 동의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 의장의 개헌론 주장이 놓치고 있는 것, 그것은 윤석열 파면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명재 에디터promes6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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