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주한미군의 존재론적 위기

道雨 2025. 4. 4. 09:25

주한미군의 존재론적 위기

 

 

 

냉전이 시작된 이래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대규모 군사기지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해왔다.

수만명의 대군이 주둔하는 미국령 괌, 필리핀의 수비크만 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기지, 일본의 요코스카 해군기지와 오키나와 공군기지, 한국의 평택 지상군기지와 군산의 공군기지 등은 냉전 시대 건설된 대규모 군사 거점이다.

필리핀 미군 기지는 1990년대에 폐쇄되었지만, 나머지 기지들은 냉전 이후에도 미국의 힘의 상징으로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왔다.

 

이 기지들은 동아시아에서 대규모 전면전을 감당하기 위해 사전에 배치된 물자와 장비와 인력을 뜻하는 거대한 ‘강철 산’(iron mountain)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중·장거리 미사일이 보편화한 21세기에 이야기는 달라진다.

 

중국의 둥펑 계열의 미사일은 이 기지들을 언제든 타격할 수 있지만, 현재 이 기지들은 미사일방어 체계가 지극히 취약하다. 만일 중국이 공격을 가하면, 거대한 미군 기지들은 표적이 되어, 다량의 미사일 공격으로 수천명의 사상자를 비롯한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게다가 미국은 동아시아에 단 한발의 핵무기도 갖고 있지 못하며, 유사시를 대비한 핵무기 저장 시설과 핵 운용 요원도 없다.

또한 미국의 동아시아 기지에는 중국을 타격할 수 있는 중거리 미사일도 없다. 1기 도널드 트럼프 정부에서 미국은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탈퇴하여 동아시아 기지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할 권리를 확보했지만, 미국의 동맹국들은 자국에 미국의 미사일을 배치하는 데 극도로 난색을 표명해왔다.

미국 미사일을 거부하는 한국과 일본 같은 동맹국들도 중·장거리 미사일을 보유한 국가가 아니다. 핵과 미사일이 없이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억제한다는 게 어쩐지 공허해 보인다.

 

 

해군력에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미국 샌디에이고의 3함대에서 항공모함이 동아시아로 출동하면, 중국은 그 즉시 인공위성으로 이를 포착한다. 항모의 모든 운항 과정을 추적하는 중국은, 1만마일 사정거리의 지대함 미사일을 언제든 투입할 수 있다.

거대한 항모라고 해서 안전할 수 없는데다, 미국의 항모 태반은 선령이 30년을 경과한 노후화한 모델들이다. 이런 항모가 미군의 동아시아 기지에 무사히 도착할지도 의문이다.

 

반면 동아시아 미군은 무인 잠수정이나 스텔스 함정, 네트워크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군집 드론과 같은 신속하고 은밀한 현대화된 전력들을 아직도 준비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질문이 떠오른다.

이 기지들이 중국을 억제하는 데 효과적이지 않다면, 돈만 소모하는 냉전형 기지들을 왜 운용해야만 할까.

특히 중국 억제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지상군을 주축으로 한 주한미군은 어디에 써먹을 것인가.

 

때마침 미국 언론들은 피터 헤그세스 국방부 장관이, 전세계 미군의 전투사령부를 구조조정하고, 해외 미군을 감축할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3월 중순에 배포된 헤그세스 장관의 ‘임시 국가 방어 전략 지침’은, 미국 국방부 인력과 자원의 제약을 고려해 ‘여타 지역에서의 위험을 감수할 것’이며, 미국은 오로지 중국 억제에 집중하기 위해, 유럽·중동·동아시아의 동맹국들이 스스로 안보를 책임지도록 하겠다는 입장이다.

동맹국의 안보 부담을 떠맡지 않겠다는 트럼프 정부의 자국 우선주의가 반영된 셈이다.

 

때마침 조 바이든 전임 대통령이 추진했던 주일미군의 구조개편과 확충이 중단될 조짐에 일본 정부는 비상이 걸렸다. 주한미군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만, 북한으로부터 한국을 방위하는 역할을 감소시키고, 중국을 억제하는 역할로 그 성격이 변화될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지침은 북한에 대한 억제보다 대만 방어가 우선이라는 점을 적시하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국방 지침을 동맹국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미국이 일방적으로 추진한다는 점이다. 이런 일방주의는 동맹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미국으로부터는 방위비 분담금 증액과 대만 안보에 대한 부담을 강요받고, 중국으로부터는 미국에 협조하지 말라는 압력에 노출된 대한민국은 심각한 안보 딜레마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 상황을 돌파하려면 강대국의 압력을 버텨내면서, 우리가 주변 정세를 주도하겠다는 자주적인 생존의 길을 개척하는 결기 있는 정부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강대국이 흔든다고 흔들릴 나라가 아니라는 점, 높은 자존감에 바탕을 둔 평화의 당사자라는 점을 제대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김종대 |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