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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통일신라 미륵불의좌상(磨崖佛倚坐像) 보는 방법

道雨 2009. 6. 10. 11:18

 

통일신라 미륵불의좌상(磨崖佛倚坐像) 보는 방법

 

- 왕건청동나체좌상은 통일신라 미륵불의좌상의 연장선에서 보아야 -

 

 

 

 

통일신라시대에 의자에 앉은 미륵불의좌상이 발견되었다는 오늘자 뉴스기사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역사적 의의'가 큰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러한 발견은 발견 초기에 뉴스가 될 때 언급이 되어야 그 인식과 의미 해석에서 뜻이 있게 된다.

필자가 여기에 그 '역사적 의미'를 제시해놓고자 하는 것은 이번 발굴로 고려시조 왕건의 정통성이 통일신라를 잇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미륵불상이나 아미타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많이 있지만, 의자에 앉은 의좌상이 없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어떻게 부여해야 할까? 필자에게 먼저 떠오른 것은 1993년에 발굴되어 몇해 전에 서울에서 전시까지 되었던 왕건나체좌상이다.

 

북한에서 야심차게 서울전시까지 허용하여 온국민이 뉴스를 통하여 본 왕건나체좌상은 그 당시 고려의 시조가 나체좌상이란데서 '나체'에 모두 관심을 집중했다. 필자는 당시에 <역사산책: 북한 문화재 고려시대 왕건 '나체좌상'과 앙코르와트의 나체좌상>이라는 왕건의 '나체' 의미에 대한 해석을 한 글을 쓴 바 있다.

 

http://cafe.chosun.com/club.menu.bbs.read.screen?page_num=1&p_club_id=dreamview&p_menu_id=2&search_field=title&search_query=%EC%99%95%EA%B1%B4&message_id=318340

 

그때 당시의 뉴스 기사 보도들은 의좌상이 아닌 단지 '좌상'으로 표현했지만, 왕의 조각상을 나체상으로 만든 것은 '동아시아에서 유일무이한 것'이었다고 화제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필자는 당시 위의 글에서 유일무이가 아니라 앙코르와트에도 나체좌상이 분명히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지금도 필자의 글은 왕건나체좌상 해석에 있어서 인터넷에서 많이 알려져 있는 글의 하나가 되어 있다.  

 

그런 왕건의 '나체상'에 대한 해답은 분명해진다.

미륵불이나 불상들이 나체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남방불교의 경우 여성적 보살상의 경우에까지 유방을 드러내는 등의 나체 여래상 나체미륵상을 만들기 때문에 나체미륵상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의좌상과 나체상은 불교의 불상 및 미륵상의 조영에서 당연한 결과이다.

 

그런데 어떻게 불상도 아닌데 고려 시조에 나체상이며 의좌상인가 의아해 할 것이다.  그것은 고려창건 당시의 사회적 인식이 왕건을 불교적 미륵에 견주어 인식했기 때문으로 필자는 판단한다.

 

왕들은 왕좌에 앉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왕건 청동상을 만들면서 왕관과 함께 의자에 앉도록 했으며 나체상이 되게 한 것은 나체미륵불 의미로 숭상하고자 한 의미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미륵은 이 세상에 왕림하여 세상을 바로잡는다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이른바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개혁자' 이미지를 가졌던 미륵신앙이었다.

 

왕건신화에서 보듯이 그 당시의 왕들은 신화적인 존재이며 '미륵'이라고 자칭했던 궁예의 경우를 보더라도 왕건의 청동좌상은 그 시대의 '지도자 = 미륵'이라는 숭배를 받는 시조로서 나체의좌상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디지틀 조선일보 포토 재인용)

 

왕건나체의좌상의 의자에 앉은 '권위'를 북한사람들은 아마도 고구려의 영향으로 보려고 할 것지만, 고구려 불상이나 미륵상에서는 의좌상은 없다.

경주 삼화령에서 발굴된 고신라 때의 미륵세존 의좌상이 삼국시대의 유일한 의좌상이다. 거기에 고려시대의 것인 법주사의 마애석불도 의좌상이다. 

 

이번의 통일신라시대의 고석사 미륵불의좌상이 발굴됨을써 고려왕조의 시조 왕건의 의좌의 권위는 통일신라의 의좌권위를 이어받은 것이 된다.  

 

그렇게 볼 때, 왕건나체 '의좌상'은 통일신라시대 전통에 있었어야 한다. 

 

고려왕조 시조로서 왕의 위치에 있었지만 왕건은 그당시에 미륵의 위치와 같은 권위를 가졌다는 것은 궁예가 자신 스스로를 미륵이라고 말했던 기록에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왕건의 나체의좌상은 통일신라시대의 미륵의좌상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서 발굴된 고석사 미륵불의좌상 이전에도 의좌상이 발굴되었다. 다만 고신라의 것이었다는 면에서 고려가 계승하는 통일신라 의좌상의 의미는 약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확실히 중간 고리를 찾아내게 된 셈이다.

 
 

통일신라 미륵불의좌상
(서울=연합뉴스) 경북 포항시 장기면 방산리에 소재하는 대한불교 조계종 고석사(주지 종범스님)의 보광전에 봉안된 소위 '마애불의좌상'(磨崖佛倚坐像)이 미래불인 미륵부처가 의자에 앉은 모습을 형상화한 불상인 '미륵불의좌상'으로는 첫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밝혀졌다. 왼쪽은 석고를 제거하기 전이며 오른쪽은 그 후 현재의 모습이다. 2009.6.4 < 문화부 기사참조, 불교문화재연구소 제공 >


포항 고석사에서 이번에 발견된 '마애불 의좌상'(磨崖佛倚坐像)은 높이 222㎝에 무릎 폭 95㎝다. 그런데 이 아매불의좌상은 일제시대 때 발랐던 석고를 뜯어내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석고 상태에서는 약사여래불이라고 여겼으나 약합이 없는 것이 확인이 되었다.

다가오는 6월 13일 동국대 서울캠퍼스 덕암세미나실에서 이번 미륵불 의좌상의 역사적 의의를 분석한 연구성과 발표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 가볼 수도 없는 이국 땅에서 필자는 필히 이번 통일신라시대 마애불 의좌상이 왕건나체 의좌상에 영향을 미쳤을 의미 부여를 필해 해주기를 당부한다.  

 

그리고 중국에는 의좌상이 많은데 우리나라의 불상 미륵상이 의좌상이 없다는 것은 또한 권위적인 의미 차이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점을 지적해놓고자 한다.

 

의자가 대단하게 보이는 것은 마치 '출세한 회전의자' 이미지만큼이나 권위적인 것으로 평가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볼 일이 아니다. 불상이나 미륵불의 의자는 그 시대 법당의 히팅시스템과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는 온돌의 나라이다. 온돌방과 장판으로 된 법당에서 방석을 깔고 예불을 하는 승려들이 모시는 불상은 주로 단 위에 방석과 같은 연화대의 좌대에 모셔지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니까 온돌이 없는 중국의 경우 침대와 의자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불상들 의좌상이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의좌상이 없다고 해서 우리의 고대 불상 미륵상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시각으로 자유스럽게 우리는 중국의 의좌불상 또는 의좌미륵상을 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아래에 중국 불교의 의좌상들을 참고해서 보기를 바란다. 특히 우리의 국보 등에도 있는 반가사유상도 의좌상의 하나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그런면에서 지나치게 '중국 의좌상'에 대한 의미가 지나치게 강조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06/04/09 오두)

 

                  (출처 : blog.chosun.com/namsanodu 오두의 꿈꾸는 풍경/오두방정 시리즈 글)

 

 

*부록: 미륵불의좌상(磨崖佛倚坐像)과 여타의 의좌상들.

  

唐代  彌勒佛倚坐像  四川石窟
http://www.lyu.org.tw/lyu/home-page_6_01_04.htm

 

煌早期彌勒菩薩交腳像

http://igt.com.tw:3000/domain/show_article/56

 

 

http://igt.com.tw:3000/domain/show_article/56

天龍山石窟倚坐佛及右脇侍菩薩

 

 

인도 아잔타석굴 7窟 施無畏印佛坐像の脇佛

http://www.za.ztv.ne.jp/ebdsaeba/kannon2/2001koma/gal/gal.htm

 

 

http://www.cna.com.tw/vistaphoto/exhibition.aspx?Artc_ID=1741&CatL_ID=K&&CatM_ID=K01

金銅四臂觀音倚坐像

 

乐山大佛

四川省乐山市

 

http://www.lyu.org.tw/lyu/home-page_8_9_01.htm

佛倚坐像    北齊    天龍山東峰第四窟東壁

 

36莫高窟第45 一佛二弟子二菩萨二天王组合 盛唐

http://www.dha.ac.cn/00C6/index.htm

 

38莫高窟第55 中心坛 三佛组合 宋代

http://www.dha.ac.cn/00C6/index.htm

 

http://www.lyu.org.tw/lyu/China_stone_1/enk002.htm

운강석굴

佛坐像第19~2窟 

佛為倚坐像,高8公尺 ,左手撫膝,
右手施無畏印,着褒衣博帶式袈裟。

 

http://aaa.tnua.edu.tw/~ykchen/Bu_net/art/a_ch_3_04.htm

彌 勒 佛 倚 坐 像

漢白玉石 高50.5 cm 北齊(550~577年) 靜雅堂藏

 

 

http://blog.thmz.com/user1/2673/archives/2007/16577.htm

高27米的炳灵寺盛唐弥勒佛坐像
 
弥勒佛坐像 15世纪 西藏黄铜 高23cm
     弥勒高肉髻,大耳下垂,眉目清秀,面呈庄重慈和之相。手结说法印,身披袈裟,
其上以阴纹雕刻十八罗汉像。倚坐于“亚”字形座上,座背面刻蓝查体梵文经咒。
 
 
金身弥勒佛

http://blog.thmz.com/UploadFiles/2007-8/37124.78648708.jpg

 

 

铁彩弥勒佛 http://blog.thmz.com/UploadFiles/2007-8/36707.88834130.jpg

http://blog.thmz.com/user1/2673/archives/2007/16577.htm

 

http://aaa.tnua.edu.tw/~ykchen/Bu_net/art/a_ch_2_05.htm

房□思造彌勒倚坐像

砂岩 高47 cm 北魏孝明帝熙平元年(516年) 石愚山房藏

 

陳□仁造菩薩倚坐像

砂岩 高63 cm 北魏宣武帝延昌四年(515年) 鑫玉堂藏

http://aaa.tnua.edu.tw/~ykchen/Bu_net/art/a_ch_2_03.htm

 

쓰촨 半月山拜大佛

至明代景泰七年(公元1456年)

http://travel.mipang.com/recommend/1046

 

石灰岩 如来倚坐像
(せっかいがん にょらいきざぞう)
唐時代・長安3年(703)

http://www.city.osaka.lg.jp/museum/page/0000021481.html

 

*문수보살의좌상(文殊菩薩坐像)

木雕 高147公分 元代(1279~1368年) 良盛堂藏

http://aaa.tnua.edu.tw/~ykchen/Bu_net/art/a_ch_6_04.htm

 

*고려시대 수월관음보살(水月觀音菩薩) 그림

 

*우리나라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

 

*纽约陈哲敬藏观音游戏坐像

 

 

*광제수하보살반가사유상(卝齊樹下菩薩半跏思惟像)

http://igt.com.tw:3000/domain/show_article/56

 

 

*반가사유상

漢白玉石 高39公分 北周(551~581年) 靜雅堂藏

http://aaa.tnua.edu.tw/~ykchen/Bu_net/art/image/bu206_1.JPG

 

 

http://www.phototime.cn/photo/C37256361.html

 毗卢洞石刻—水月观音(紫竹观音)

紫竹观音“东方维纳斯”

安岳石刻의 대표적인 작품。

 

*정방초상(鄭枋肖像) 김이서(金履恕) 18세기

전신교의좌상全身交倚坐像이다.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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