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왕조의 숨결이 살아있는 창덕궁

道雨 2009. 6. 22. 17:06

 

 

 

     왕조의 숨결이 살아있는 창덕궁

 
 
요즘 궁궐 산책이 유행이다. 특히 최근 TV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궁궐 탐험 내용이 소개되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궁궐을 찾고 있다. 사실 도심에 궁궐과 그 주변 이상의 산책로는 없다. 산책 뿐 아니라 볼거리도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특히 창덕궁의 경우 해설사가 꼭 동행하고, 아시아 최고의 정원이라는 비원 코스가 포함되어 있어서 먼 곳에서 일부러 창덕궁을 찾는 사람들도 많다.

창덕궁

500년 세월을 넘는 방법은 너무도 간단하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으로 들어가는 순간, 누구나 왕조의 자취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오랜 시간 속을 거닐 수 있다. 임금이 걸었던 길을 걸을 수 있고, 왕자 가족이 살던 대청마루에 앉아볼 수도 있다. 산길은 고요하고 우거진 숲은 하늘을 가리고도 남음이 있다. 궁궐 몇 채를 보고 언덕길을 넘어가면 후원이 나오는데, 부용지, 애련지 등 이름만 들어도 왕조의 오후 풍경이 떠오르는, '노닐 곳' 천지다.

창덕궁은 다른 궁궐에 비해 엄숙한 분위기다. 해설사 없이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는 목요일의 자유관람 외에는 언제나 해설사의 안내와 설명을 들으며 정해진 루트로만 다녀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창덕궁은 조선 건국 12년 뒤인 1405년에 세워진 궁궐이다.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1408년에 세상을 떴다. 규모가 경복궁 못지않은데다, 후원인 비원까지 있는 곳이라 당시 궁궐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가구, 전등 등을 구경하는 즐거움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창덕궁 또한 다른 궁궐들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한번 불에 타고,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중건했던 것이 또 다시 인조반정 때 불탔으며, 결국 1647년에 또 다시 복원된 영욕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전등이나 빈티지 가구, 차고 등은 조선말에 설치된, 개화기 문물들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은 1997년의 일로, 선정 이유는 원형보존, 조형미, 주변 환경과의 조화 등이었다.


돈화문(敦化門)

돈화문 앞 광장은 왕과 백성이 직접 만나 대화하는 대민 광장이었던 것이다. 영조는 훗날 균역법을 실시할 때도 창경궁 홍화문 앞에 나가 백성과 양만을 초청, 그들의 의견을 듣고, 대신들이 반대했던 균역법(백성의 세금을 깎아주고, 그로 인한 세수 부족분에 대한 연구를 하기 위한 법)을 백성의 뜻을 따라 실시하기도 했었다. 돈화(敦化)는 중용의 대덕돈화에서 가져온 것으로 '큰 덕은 백성 등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1963년에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었다.

금천교((錦川橋)

창덕궁 입구와 인정전 사이에 흐르는 개울에 놓인 돌다리이다. 조선 태종 11년(1411년)에 세워졌다. 다리 소재가 돌이라 임진왜란 방화 때도 불타지 않고 보존되었다. 조선의 궁궐에는 초입부에 풍수지리상 길한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위에 돌다리를 놓았다. 특히 창덕궁의 돌다리는 그 아래 비단 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 하며 비단(錦)에 내 천(川)자를 사용하는 금천교다. 다리 아래에는 해태를 닮은 수호상, 북쪽에는 거북상을 배치하여 궁궐을 지니는 수호신으로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서 아름다운 난간석과 견고하고 장중한 축조 기술이 돋보인다.

진선문

태종은 백성의 목소리를 직접 듣겠다며 진선문에 신문고를 설치했었다. 그러나 중간에 흐지부지 되었던 것을 1771년 영조가 다시 설치, '원통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자는 소장을 내되, 그래도 억울하다면 신문고를 두드려라'-경국대전-라고 신문고를 치는 절차도 명문화했다. 그러나 그 절차가 다소 복잡한데다, 포졸들이 서 있는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까지 가서 신문고를 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인정문과 인정전 (보물 813과 국보 225호)

인정문은 인정전으로 들어가기 위한 통과문으로 왕의 즉위식이 열리기도 했던 곳이다.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진의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가 행해진 궁궐의 대표적 공간이다. 마당 가운데에는 돌로 만든 길이 있는데, 가운데 조금 더 올라온 길이 왕이 걷던 길이다. 조선의 궁궐정전에는 공통적으로 정면에 용상과 나무로 만든 곡병을 두고 뒤에는 일월오악병을 둘렀는데, 일월오악도에는 해와 달, 다섯개의 산봉우리, 폭포, 파도,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봉황 한 쌍이 새겨져 있다. 눈이 띄는 것은 인정전 안의 전등. 1908년 전기시설이 생기면서 인정전 등에 전등이 설치되었는데, 자세히 볼 수 없음이 안타까운 일.

선정전 (보물 814호)

청색 기와가 산책객을 놀라게 하는 곳 선정전은 임금이 국사를 논의하던 편전이다. 기와를 칠한 청색 도료는 우리 전통 도료가 아닌, 1647년 중건 당시 페르시아에서 들어온 신상품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전해진다. 이 건물은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신정전은 왕의 집무를 위한 공간이지만 성종 때는 공혜왕후 한 씨가 이곳에서 양로연(조선의 80세 이상 모인 모두를 초청하는 행사)을 엶으로써 왕비가 사용한 전례를 남기기도 했다. 이에 사관들은 왕비가 편전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비판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희정당 (보물 815호)

임금의 침실이 딸린 편전이었는데 나중에 어전회의실로 사용되었다. 1927년 대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의 건물은 경복궁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다. 내부 응접실에는 쪽마루와 유리 창문, 샹들리에 등을 설치, 서양식 인테리어로 꾸몄다. 가구와 전등을 자세히 보려면 망원렌즈나 망원경이 필수! 한편 상방에는 해강 김규진이 그린 금강산만물초승경도, 총석정절경도가 걸려 있다. 남행각 정문은 훗날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변형되었다.

대조전

창덕궁의 정식 침전으로 왕비가 생활한 곳이다. 대조전은 많은 부속 건물이 에워싸고 있는데, 대조전 오른쪽(바라볼 때)의 홍복헌은 1910년 조선조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고, 그 자리에서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대조전은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왕비의 침전인 서온돌과 임금의 침전인 동온돌로 나뉘어진다.

이 건물은 용마루가 없는데 이는 용으로 비유되는 임금이 잠자는 곳에 또 다른 용을 나타내는 용마루가 있으면 두 용이 충돌한다 하여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1917년 이 건물이 불에 타자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겨다 지었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곳에서 승하했다.

낙선재 (금,토,일요일에만 개방)

낙선재, 석북현, 수강재가 하나의 일곽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통칭하여 낙선재라 부른다. 낙선재는 1847년 헌종 13년에 지어졌다. 이곳은 마지막 황후인 윤황후(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 등이 1963년부터 1989년까지 거처하던 곳이다. 아름다운 화계와 꽃담, 다채로운 창살틀이 돋보인다.

성정각-또는 내의원

삼정각은 세자가 서연(학자들과 유교 경전을 공부)하던 곳이다. 성정각 뒤의 관물헌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원래 내의원은 인정전 서쪽에 있었는데, 1910년대부터 성정각을 내의원으로 이용하였다. 내의원은 궁중의료기관으로 왕과 왕족의 병을 치료하고 약을 조제하던 곳으로 내국이라고도 불렀다. 내의원에는 의녀도 있었는데 이들은 남자 의관에게 진찰받기 어려운 궁중여성들의 치료를 담당했다.

성정각 뒤 느티나무

기록을 통해 추론해 보면 177년은 된 느티나무다. 창덕궁의 근대사를 함께 해 온 어르신이다.

부용지

조선의 궁궐 연못은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사상에 의해서 조성되었다. 부용지도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연못에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만들었다. 연못의 동남쪽 모퉁이 돌에는 뛰어오르는 형상의 물고기 한 마리가 새겨져 있다. 부용점(1792년 건립)은 十자형을 기본으로 하되 남쪽으로 양쪽에 한 칸 씩 보내 다각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정자다. 1795년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에 다녀온 뒤 너무 기쁘고 즐거워서 부용정에서 규장각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주합루와 어수문

주합루는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 창건한 2층 누각인데, 아랫층에는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위층에는 열람실을 겸한 누마루를 만들었다. '규장각(奎章閣)'이란 '문장을 담당하는 하늘의 별인 규수(奎宿)가 빛나는 집'이라는 뜻이고, '주합루(宙合樓)'란 '천지 우주와 통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주합루로 오르는 어수문(魚水門)의 의미도 재미있다. 이는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는 언제나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을 담은 문으로, 정조의 민본 정치 철학을 보여주는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주합루 담장도 눈여겨 볼 만 하다. 이런 방식을 취병(翠屛)이라 불렀다. 취병은 조선시대의 조경 기법의 하나로, 푸른 병풍처럼 만든 울타리를 말한다. 가림막 역할과 공간을 분할하는 담의 기능을 하면서, 그 공간을 깊고 아늑하게 만들어, 생기가 살아있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한다.

영화당

영화당은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현재 건물은 숙종 18년, 1692년에 재건한 것이다. 왕족의 휴식공간이지만 이 건물의 앞마당인 춘당대에서는 친히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인재 등용을 위한 과거를 실시했다. 영화당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기호연(의두합)

기오현(의두합)은 효명세자가 지은 건물로 단청을 칠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이다. 효명세자가는 아버지인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를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이때 본보기가 되는 사람이 할아버지인 정조였으므로 주합루 뒤쪽에 집을 짓고 나라 일을 생각하는 장소로 삼았다고 한다.

불로문

하나의 통 돌을 깎아 세운 문으로 임금이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이곳을 지나가면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산책객 누구나 이곳을 지나갔다.

애련지와 애련정

숙종 18년 1692년에 만든 연못과 정자다. 숙종은 애련정기(愛蓮亭記)에서 '내가 연꽃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맑고 깨끗한 것이 군자의 덕과 같다'하며 새 정자의 이름을 애련정이라 했다.

연경당과 선향재

궁궐지에 의하면 1828년 순조 28년 왕세자였던 효명세자가 사대부 집을 모방하여 궁궐 안에 지은 120여 간의 민가 형식의 집이다.

대문인 장락문은 달에 있는 신성의 궁궐인 장락궁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주자가례를 따라 주인 대감의 일상거처인 사랑채와 안주인 등 여성들의 공간이 안채로 나뉘어져 있다. 선향재는 서재로 이용되었는데, 궁궐에서 보기 힘든 동판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어닝)을 설치, 이국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창덕궁 가는 길 (월요일 휴궁)

지하철 1호선 종로3가역 | 3호선 안국역/종로3가역 | 5호선 종로3가역

버스 109 / 151 / 162 / 171 / 172 / 272 / 601 / 7025

주차 무료, 매우 혼잡, 요일제 적용
 
관람방법

창덕궁 관람은 자유 관람, 일반 관람, 옥류천 관람, 낙선재 관람 등 네 가지 방법이 있다. 루트에 따른 분류다.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제일 좋은 코스는 물론 자유 관람이다. 해설사 없이 혼자 돌아다니며 실컷, 자세히 산책을 만끽할 수 있다.

가장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일반 관람은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정해진 코스, 일정한 시간 안에 산책을 마쳐야 한다. 옥류천과 낙선재 코스도 마찬가지. 그래서 창덕궁 전체를 산책하려면 자유 관람을 선택하든지, 일반산책 한번 그리고 옥류천과 낙선재 관람 각각 한번, 그렇게 해야 제대로 산책한 게 된다. 일반 산책의 경우 1시간40분 정도 걸리며, 꼼꼼히 보는 자유 관람을 선택할 경우 하루 종일 궁궐 안에서 보낼 수도 있다.

자유 관람

매주 목요일 0915-1830 1만5000원 / 7500원

일반 관람

화 - 일 / 개별 행동 금지

국어 0915-1715 매시 15분, 45분 입장

1시간 20분 관람

일어 0930 / 1030 / 1230 / 1430 / 1630

영어 1130 / 1330 / 1530

중국어 1130 / 1330 / 1530

3000원 / 1500원

옥류천 관람

화 - 수 - 금 - 토 - 일

10시 음성안내기 청취 4국어

13시, 14시 해설안내

5000원

낙선재 관람

화 - 수 - 금 - 토 - 일

10시 음성안내기 청취 4국어

13시, 14시 해설안내

5000원

가방 보관소

돈화문을 통과하면 금천교 어귀에서 일단 숨 고르기를 한다. 마당 서쪽에 가방보관소가 있는데, 무거운 가방이나 짐이 많은 경우 자유롭게 보관할 수 있다.
 

■ 자료 참조 = 문화재청 창덕궁

[글·사진 이영근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