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유일의 승려 조각상 ‘희랑대사좌상’ 국보 지정 예고
북한 ‘왕건상’ 애타게 기다린 ‘희랑대사상’
해인사 고승 희랑대사의 건칠 좌상(보물 999호)
국립중앙박물관의 ‘대고려’ 전에 나온 희랑대사 좌상. 상 안쪽 너머로 북한 개성 출토품인 고려 태조 왕건상을 놓으려 했던 빈 연꽃 좌대가 보인다.
남한의 스승 상은 북한의 제자 상을 간절히 기다렸다. 그러나 만남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2018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고려 건국 1100주년 특별전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이 열린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기다림의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독립된 전시장에서 옆자리를 비워두고 북한에 있는 고려 태조 왕건의 상이 오기만을 기다린 주인공이 있었으니, 바로 10세기 활동한 해인사 고승 희랑대사의 건칠 좌상(보물 999호)이었다.
희랑대사는 918년 고려 왕조를 세운 태조 왕건의 스승이었다. 왕건이 후백제를 물리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업을 이룰 때 해인사 지지 세력인 북악파를 이끌며 정신적 기반을 제공했고, 왕건이 누구보다도 감사하며 존경하던 국사급의 큰 스님이었다.
스님의 사후 후학과 문도들이 생전 모습대로 만들어 해인사에 대대로 봉안하며 예배해온 좌상을 처음 서울의 박물관으로 가져온 것은 이유가 있었다. 1992년 북한 개성 태조 왕건릉에서 출토된 제자 왕건의 청동상과 함께 전시하려는 게 박물관 쪽의 복안이었기 때문이다. 빈 좌대를 대사의 좌상 옆에 놓아두며 왕건상을 기다리는 전시 아이디어가 그렇게 나왔다.
합천 해인사 소장 희랑대사 건칠 좌상의 정면. 지금의 상은 18세기 이후 색과 무늬를 덧입힌 것이다.
희랑대사 상이 기다림의 전시 무대를 펼치게 된 건 사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예상치 않았던 행보가 배경이 됐다. 전시 전인 2018년 9월19일 문재인 대통령이 방북해 정상회담을 하는 과정에서 ‘대고려’전에 필요한 왕건상 등의 북한 고려 유물 출품을 요청했고, 김 위원장이 “협력하겠다”는 화답을 내놓으면서, 애초 예상하지 않았던 왕건상과의 동반전시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박물관은 동반전시의 의미를 살리려고 애를 썼다. 해인사에서 희랑대사상을 서울로 옮길 때 굳이 복제상을 경기도 연천의 왕건 사당에 보내어 만남을 고하는 예식을 치렀고, 전시장엔 지화장 정명 스님이 연꽃으로 장식한 빈 좌대가 전시가 끝날 때까지 놓여 남북의 스승 제자 상의 만남에 대한 갈망을 표현했다.
그해 연말 김정은의 서울 답방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선물로 왕건상을 들고 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장에서 정상이 만나 회담을 하고 두 상을 관람할 가능성이 제기됐고, 실제 박물관에서는 이를 대비한 동선 준비 작업이 검토되기도 했다. 하지만 북미 관계가 경색되면서 김정은의 답방은 실현되지 않았고, 왕건상도 오지 않은 채 2019년 3월3일 전시는 아쉬움 속에 끝났다.
당시 전시를 기획했던 정명희 학예관은 “우리 미술사에서 매우 뛰어난 고려시대 걸작이었으나 잘 알려지지 않았던 희랑대사 상을, 지금 시대 분단과 화합, 통일의 상징성을 담아 새롭게 알릴 수 있었다”면서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전시 연출 자체가 의미 있는 과정으로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21세기 분단 현실의 사연을 덧붙이게 된 걸작이자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승려 모습 조각상인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보물 제999호)에 대해 문화재청이 마침내 국보 지정을 예고했다. 1989년 보물로 지정된 지 31년 만이다. 유물의 역사적 중요성이나 양식적인 희귀성에 비춰 뒤늦은 감이 있지만, 비로소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았다는 점에서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덕이 높은 큰 스님의 상을 나무나 건칠로 사실적으로 묘사해 만든 조각상은 원래 고대 중국의 미라화한 육신 상에 기원을 둔 것으로, 중국과 일본에서 고승(高僧)의 모습을 조각한 조사 상을 중근세까지 다수 제작해 지금도 많이 남아 있지만, 국내에는 거의 작품이 전하지 않는다. 실제 생존했던 고승의 모습을 재현한 유일한 조각품은 사실상 ‘희랑대사상’밖에 없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대고려’ 전 당시 희랑대사상 진열장 옆에 나란히 놓였던 북한 왕건상의 빈자리. 지화장 정명 스님이 연꽃 모양의 좌대 설치작품을 만들어 눈길을 끌었다.
국보 지정 예고는 두 번째 신청 끝에 이룬 결실이다. 2010년 경남도가 국보 지정 신청을 했다가 문화재위원회가 자료 부족으로 부결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그 뒤 2016년 한국미술사학회가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조사의 필요성을 제기해, 4년 동안 문헌 조사와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과학적 분석을 거쳤다. 우선 문헌 조사결과를 통해 ‘희랑대사좌상’은 조선시대 문헌 기록을 통해 해인사의 해행당(解行堂), 진상전(眞常殿), 조사전(祖師殿), 보장전(寶藏殿)을 거치며 수백 년 동안 신앙 대상으로 봉안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게 됐다.
지금처럼 상이 채색되기 전 까맣게 옻칠된 상태를 묘사했던 실학자 이덕무(1741~1793)의 <가야산기(伽倻山記)> 등 조선 후기 학자들의 방문기록이 대거 확인돼, 전래 경위에 신빙성을 더해준다는 게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특히 지정조사 과정에서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이 내부를 광선을 투과시켜 과학 조사 결과, 얼굴과 가슴, 손, 무릎 등 앞면은 건칠(乾漆)로, 등과 바닥은 보강재 나무를 대어 옻칠 등으로 매끈하게 두면을 접착시키며 만들었고, 후대에도 제작 당시 원형을 잘 간직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앞면과 뒷면을 결합한 방식은 보물 제1919호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처럼 신라~고려 초 불상에서 확인되는 제작기법이다.
상의 또 다른 특징은 가슴에 작은 구멍(폭 0.5cm, 길이 3.5cm)이 뚫려 있는 것. 그래서 ‘흉혈국인(胸穴國人)’이란 별명도 갖고 있다.
해인사 설화에 따르면, 대사가 스님들의 수행 정진을 돕기 위해 가슴에 작은 구멍을 뚫어 모기에게 피를 보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고승의 흉혈이나 정수리에 난 구멍(정혈)은 대개 신통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현재 국내에 문헌 기록과 현존 작이 모두 남은 조사상은 ‘희랑대사좌상’이 유일하다.
제작 당시 현상이 잘 남아 있고, 실존했던 고승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면의 인품까지 표현한 점에서 예술적 가치도 뛰어나다는 평가다.
문화재청은 “고려 초 초상조각의 실체를 알려주는 귀중한 작품이자, 대사의 높은 정신세계를 조각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예술‧학술 가치가 탁월하다”고 국보 지정 사유를 밝혔다.
한편, 문화재청은 선조들의 전염병 극복 노력을 보여주는 15세기 한의학 서적 <간이벽온방(언해)>과, 17세기 공신 모임 상회연(相會宴)을 그린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은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희랑대사좌상 등 국보와 보물로 지정 예고된 문화유산 3건은, 앞으로 30일간의 예고 기간 각계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지정 여부가 최종 확정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립중앙박물관·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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