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검경, 공권력, 공공 비리

‘정치 총장’과 검찰의 쇠락

道雨 2020. 11. 11. 10:17

‘정치 총장’과 검찰의 쇠락

 

 

“김도언 전 검찰총장이 민자당 지구당 조직책에 내정됐다는 말을 전해들은 일선 검사들은 대다수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몇몇 검사들은 몇차례나 사실 여부를 되물은 뒤 사실로 확인되자 낙담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중략) 젊은 검사들은 분개하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했다.”(<한겨레> 1995년 9월20일치)

 

검찰총장이 퇴임 뒤 곧바로 정치판에 뛰어든 25년 전 9월,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비분강개하는 검사들의 표정이 읽힌다. 검찰 동우회보에는 전직 검찰 간부들의 비판 글도 실렸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아픔을 느낀 것은 나 혼자만이었을까?” “더 높은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중략) 총장의 모범상을 세워달라.”

이 사건을 계기로 검찰총장은 퇴임 뒤 2년 동안 공직 취임과 정당 가입을 못하도록 하는 검찰청법 조항이 여야 합의로 통과됐다. 이에 검찰 고위 간부들이 기본권 침해라며 위헌 소송을 내자, 한 일선 검사는 언론 기고를 통해 “검찰총장의 공직 취임 금지 규정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과 임명권자의 인사권 남용 방지를 위한 것이지, 총장 개인의 기본권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쓴소리를 했다.

 

당시의 검찰이 정치적 중립을 잘 지키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래도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나마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들이 있었고, 직전 총장의 도를 넘은 행위가 이를 격발시킨 게 아니었나 싶다. 이런 결기조차 없다면 검사가 아니라 생계형 직장인에 다름아닐 것이다.

하지만 긴 세월에 풍화된 것일까. 윤석열 검찰총장이 공식석상에서 퇴임 뒤 정계 진출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는데도 검찰 내부의 우려와 비판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헌재는 당시 검찰청법 조항에 대해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검찰총장을 비롯한 모든 검사가 이에 대한 확고한 소신 아래 구체적 사건의 처리에 있어 공정성을 잃지 않음으로써 확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해당 조항은 국공립대 교수를 포함한 ‘모든’ 공직 취임을 금지하는 것이어서 과도한 측면이 분명 있었지만, ‘더 나은’ 자리를 향한 인간의 욕망을 제도가 아닌 소신으로 제어해야 한다는 건 법률가의 사고가 아니다.

유럽에서도 검찰의 중립성과 검찰총장의 퇴임 뒤 행보가 무관치 않다는 원칙이 자리잡고 있다. 유럽연합 국가들에 사법체계에 관해 자문하는 기구인 베니스위원회는, 검찰총장이 다른 공직에 지원하지 못하도록 일괄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반대하면서도, 일정한 제도적 제한을 권고한다.

“검찰총장이 임기 뒤 다른 자리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려면 임명 전에 이를 분명히 해둬야 한다. (퇴임 뒤 자리를 주선할) 정치인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일으켜선 안 되기 때문이다.”

 

막강한 검찰권을 위임한 주권자 국민은 그 권한이 공정하게 사용되는지 의심할 권리가 있고, 이런 의심을 초래할 때 검찰권 행사의 정당성은 훼손되는 것이다. 이를 부인한다면 윤 총장이 강조하는 ‘국민의 검찰’은 헛구호에 그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윤 총장의 정계 진출 시사 발언은 ‘작심 발언’이란 클리셰로 뭉뚱그려 넘어갈 성질이 아니다. 검찰의 생명인 중립성에 대한 믿음을 허물어뜨렸기 때문이다. 검찰이 어떤 수사를 하든 정치적 수사 아니냐는 물음표를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런 와중에 검찰은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결정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감사원은 고발도, 수사 요청도 아닌, 수사참고자료 송부라는 가장 낮은 단계의 조처를 취했는데, 야당의 고발을 빌미로 전격적·대대적 수사에 나서는 건, 평소 같아도 과도하다는 평을 받을 만하다. 정책 결정 과정까지 검찰이 재단하겠다는 의도가 읽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윤 총장 발언의 맥락 속에서 보면, 정치적 동기에 대한 의심은 피할 도리가 없다.

최근 이어지는 윤 총장의 정치적 언행은 그동안 누적돼온 검찰의 편향성과 우월주의가 자체 제어될 수 없는 임계점에 다다랐다는 징표처럼 보인다. 검찰이 맡아온 주요 수사 기능을 공수처라는 새로운 기구에 넘기는 게 필연임을 검찰 스스로 웅변하는 듯하다. 단풍이 타오르는 건 또한 쇠락의 전조이듯, 지금 검찰의 질주는 위태로움을 품고 있다.

 

 

박용현 ㅣ 논설위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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