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20년 만의 탈레반 재집권, 아프가니스탄의 교훈

道雨 2021. 8. 17. 09:18

20년 만의 탈레반 재집권, 아프가니스탄의 교훈

 

* 15일(현지시각) 무장한 탈레반 지휘관들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대통령궁을 차지하고 앉아 있다. 카불/AP 연합뉴스

아프가니스탄 무장조직 탈레반이 15일(현지시각) 수도 카불의 대통령궁을 장악한 뒤 “전쟁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9·11 테러 직후인 2001년 10월 미국의 침공으로 시작된 아프간 전쟁이 20년 만에 막을 내렸다. 이제 아프간에선 탈레반이 20년 만에 재집권을 눈앞에 두고 있다. 국제사회는 미국이 막대한 비용과 희생을 치르고도 왜 아프간에서 패배했는지 교훈을 새길 필요가 있다.

 

미국 공화당 의원들은 1975년 베트남전이 남베트남의 패배로 끝날 때, 미국인들이 헬기를 타고 사이공(현재 호찌민)을 긴급 탈출하던 장면에 빗대 조 바이든 대통령을 거칠게 비판했다. 하지만 외신 보도를 보면, 철군 결정이 문제라기보다는 바이든 대통령이 철군 이후 아프간 상황에 대해 오판했고, 대비책 마련도 허술했다는 비판이 많다. 여론조사에서 아프간 철군 찬성 응답이 70% 이상 나올 만큼, 미군이 아프간에 발이 묶여버린 상황 자체에 미국인들은 비판적이다.

 

아프간 사태는 비극적인 9·11 테러 직후 미국이 시작한 대테러 전쟁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취약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은 9·11 테러 주범인 알카에다를 보호하고 있다는 이유로,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전쟁 시작 두달 만에 탈레반을 카불에서 축출했지만, 미국은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테러 거점을 완전히 제거하려면 아프가니스탄에 ‘정상적인 국가’를 세우는 게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는 아프간 국민들 처지에선 서방 기준의 민주주의 국가를 일방적으로 이식하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종교와 부족이 복잡하게 얽힌 아프간 역사를 고려하면, 이런 식의 국가 건설(Nation Building)은 불가능할 것이란 우려에, 미국 정부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 결과가 20년 만의 탈레반 재집권이고, 지금 카불에서 벌어지는 대혼란일 것이다.

아프가니스탄과 함께 대테러 전쟁의 목표가 됐던 이라크 역시 오랫동안 비슷한 혼란을 겪는 건 마찬가지 이유에서일 것이다.

 

과도한 종교적 신념으로 특히 여성과 소수자 인권을 억압하는 탈레반이 아프간을 잘 이끌어가리라 누구도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외부에서 특정 이념과 가치를 이식하려는 시도 또한 성공하기란 매우 어렵다.

국제사회에선 보편적 가치도 중요하지만, 그 나라의 운명은 그 나라 국민이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아프간 사태는 새삼 일깨운다.

 

[ 2021. 8. 17  한겨레 사설 ]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1007897.html#csidxcbe92efce03e6d0abc691564698a6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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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아프간 완전 장악… 가니 대통령 해외 도피, 미국인들 탈출 러시

 

탈레반 대변인, “전쟁은 끝났다. 새 이슬람 정부 구성할 것”… 여성 억압 정책 재현 우려도

 

아프가니스탄 무장정파 탈레반이 아프간 수도 카불을 비롯해 전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은 해외 도피했고, 외교관을 비롯한 미국인들도 마지막 탈출 러시를 이뤘다.

AP통신을 비롯한 주요 외신 보도에 따르면, 탈레반은 15일 아프간 수도 카불에 진입해 별다른 큰 무력 충돌 없이 대통령궁까지 완전히 장악했다.

가니 대통령은 해외로 즉각 도피했고, 예상보다 빠르게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점령하자, 남아있던 미국 외교관들도 중요 기밀문서를 소각하고 대사관에 걸려있던 성조기를 내린 후 공항으로 마지막 탈출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앞서, 아프간 대부분의 주도를 장악한 탈레반은 전격적으로 이날 카불로 진격했다. 하지만 정부군 대부분이 도망쳤고 미군도 자국민 대피에만 치중해 탈레반은 쉽게 권력을 장악했다.

 

탈레반 대변인은 대통령궁을 장악한 뒤 “아프간에서 전쟁은 끝났다”면서 “개방적이고 포괄적인 이슬람 정부를 구성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탈레반은 “모든 주민과 외교 사절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로이터통신은 탈레반이 수도 카불에 진격하는 과정에서 곳곳에서 폭발음이 들렸다고 보도했다. 또 외교관들이 탈출 러시를 이룬 공항 근처에서도 총격이 들렸다고 전했다. 하지만 대규모 무력 충돌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탈레반은 대통령궁 점령을 발표한 직후 곧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에미리트’ 국가 설립을 선포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때 기존 아프간 정부가 탈레반에 권력을 이양하고 과도 정부를 구성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으나, 가니 대통령의 도주 등으로 탈레반이 직접 새 정부 설립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예상보다 빠르게 탈레반이 수도 카불에 진격해오자 충격과 경악감을 감추지 못한 채, 일부 남아있던 외교관들이 기밀문서 등을 소각하고 전부 공항을 통해 탈출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앞서, 전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미국인들의 안전한 탈출을 위해 해병대 병력 5천 명을 아프간에 파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1996년 집권에 성공한 탈레반은 2001년 9·11테러를 명분으로 미군이 아프간을 침공하면서 권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20년에 걸친 내전 끝에 미군 철수를 기점으로 다시 권력을 장악한 셈이다. 미국은 천문학적인 비용과 인명 희생을 무릅쓰고 아프간을 침공했지만, 결국 패전국으로 남게 됐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바이든 대통령의 이번 (철수) 결정으로, 우리는 치욕적인 ‘1975년 사이공(베트남 호찌민) 함락’의 속편이 되었고, 심지어 상황이 그때보다 나쁘다”라며 바이든 행정부의 미군 완전 철수를 비난했다.

 

집권 당시 여성의 외부 출입까지 금지하며 엄격한 이슬람 강경주의 정책을 내세웠던 탈레반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면서, 국제사회는 여성 인권이 제약되고 비인도적인 처사가 만연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하지만 탈레반 대변인은 이런 우려를 의식해, 히잡을 쓴다면 여성도 학업과 일자리에 접근할 수 있고, 혼자서 집밖에 나서는 것도 허용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탈레반은 이날 카불에서 국영 TV를 장악한 뒤, 국민들의 혼란을 우려해 평정심을 유지하라고 촉구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 김원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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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쟁, 미국의 패배가 주는 교훈

 

2001년 시작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이 미군의 철수와 함께 종지부를 찍는다. 20년 만이다.

미국은 9·11 사건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갔고, 민주 정부를 세웠다고 자부했지만,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그 민주 정부는 탈레반에 항복했다. 20년간 미국이 쌓아왔던 공이 모래성처럼 사라지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상황은 반세기 전 베트남에서 있었던 상황을 재현하는 듯하다. 프랑스가 포기한 베트남을 분단하면서 미국이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 1954년이었다. 1965년부터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도 전투부대를 파병했다. 20년간 미국은 남베트남 정부를 지키기 위해 경제원조와 함께 군사적으로 개입했지만, 미군이 철수하고 2년 만인 1975년 남베트남 정부는 무너졌다.

 

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개입과 철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우선 내전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미국이 적으로 삼고 있는 세력들이 해당 지역에서 더 우세한 상황이었다. 미국이 개입하면서 단기적으로는 성과가 나는 듯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미국에 불리하게 진행되었고, 결국 미국의 군사적 목적은 궁극적으로 달성되지 못했다.

 

베트남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미국은 ‘명예로운 철수’를 위해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한 지 각각 2년3개월, 1년6개월 만에 미군이 수립한 정부가 무너졌다. 북베트남과 탈레반은 탈출하는 사람들을 막지 않겠다고 공언하(였)지만, 20여년간 진행된 전쟁이 피의 보복을 일으킬 것이라는 점은 명약관화하다.

 

평화협정 체결의 당사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평화협정에는 탈레반과 미국이 직접 협상을 하면서 미국의 지원을 받는 정부가 소외되었다. 베트남에서는 북베트남, 베트콩과 협상을 하면서 막상 미국이 지키고자 했던 남베트남 정부는 평화협상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만큼 미국이 지원한 두 정부는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미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정부였다. 미국은 자신들이 몰아내려고 했던 세력들과 평화협정을 맺었고, 그 세력들은 결국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물론 미국이 수행했던 두 전쟁 사이에 차이점도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는 미국이 개입할 명분이 없었다.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공산화될 위험이 있다는 도미노 이론을 통해, 동남아시아 전체가 중국의 영향권하에 들어가는 것을 막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막상 미국은 중국과 베트남, 그리고 더 나아가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과 달리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9·11 테러를 자행한 세력들과 함께 더 이상 테러리스트들이 활동할 수 없도록 그 배후를 차단하겠다는 직접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평화조약에는 탈레반이 미국을 공격 대상으로 하는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평화조약을 맺었음에도 전투가 끝나지 않았고, 결국 미국이 지원한 정부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 내용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켜질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1975년까지 20년간 베트남이라는 늪에 빠졌던 미국은, 대외정책에서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경험했다. 반전운동과 수정주의는 성찰의 산물이었다. 유럽도 68혁명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라는 또 다른 늪에 빠졌다.

 

한국도 베트남에 참전한 경험이 있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한국에 대해 앞으로 국제사회는 한반도를 넘어선 국제안보에서의 역할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은 이미 1991년 걸프전과 2003년 이라크에 파병을 했던 경험이 있다. 베트남 참전으로부터 전쟁 특수 외에는 교훈을 얻지 못했던 한국 사회는, 이라크 파병을 앞두고 주판알을 두드리기에 바빴다.

 

베트남 전쟁을 되돌아보건대, 인도주의적 측면에서의 개입이 불가피한 경우에도 몇가지 부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가 도와주려는 측이 민주적이면서 해당국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가? 우리 군인들에게 큰 피해는 없을 것인가? 해당 지역 국민들과 불필요한 접촉을 할 가능성은 없는가? 개입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 큰 피해 없이 빠져나올 수 있는가?

1975년 사이공 대탈출 시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철저한 대책을 강구해야 할 때다.

 

박태균|서울대 국제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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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07978.html#csidxeeb6a2fff1be20a96e3ce4d7bcbdfc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