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한-중 수교, 동북아를 근본 재편하다
이제훈의 1991~2021 _10
한국은 소련에 이어 중국과 수교해 ‘냉전의 족쇄’를 풀었다. 남북관계만 개선된다면 대륙과 해양을 잇는 가교국가로 거듭날 수 있다. 중국은 남·북 모두와 ‘가장 중요한 관계’를 맺은 국가가 돼 ‘지역 패권국’의 지위를 다졌다. 북은 소련 해체 이후 중국에 생존을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미국으로 가는 길’을 뚫으려 생존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북-미 사이의 끊긴 길에 쌓인 스트레스가 동북아 네트워크 전체를 블랙아웃의 위험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 1992년 8월24일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한-중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에 서명한 뒤 대한민국 이상옥 외무장관(왼쪽)과 첸치천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장(오른쪽)이 건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1992년 8월24일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서로한테 총을 겨눈 한국전쟁을 포함한 냉전기의 40여년 적대를 뒤로하고,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은 것이다.
한국은 오랜 벗인 ‘자유중국’(대만)과 맞잡은 손을 슬며시 놓았고, 중국은 한국전쟁을 함께 치른 ‘혈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망연자실을 못 본 체했다.
한-중 수교는 1990년대 초반 동북아시아 비대칭 탈냉전 과정의 마지막 전략적 선택이었다. 중국은 한-소 수교(1990년 9월30일)→남북 유엔 동시·분리 가입(1991년 9월17일)→남북기본합의서 체결(1991년 12월13일)→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합의(1991년 12월31일)(→북-미 및 북-일 관계 정상화 실패)의 과정이 끝날 때까지는 한국의 공식 친구가 되기를 미뤘다. 1334㎞에 이르는 긴 국경을 맞댄 북을 의식한, 거대한 몸짓만큼이나 느린 행보였다.
중국이 판단도 늦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소련보다 빨랐다. 1985년 4월, 중국의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은 한-중 관계를 발전시키는 게 필요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첫째, 장사를 할 수 있다. 이는 경제에 좋은 것이다. 둘째, 한국과 대만의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다.” 한-중 수교의 중국 쪽 공식 창구인 첸치천 당시 외교부장이 회고록 <열가지 외교이야기>에 기록한 덩샤오핑의 지침이다.
중국은, 시기를 아무리 늦춰 잡아도 전두환이 대통령 노릇을 하던 1985년 봄 이전에 한국과 공식 외교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을 했다는 뜻이다. 냉전 종식의 주역이자 상징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 3월1일에야 소련의 최고지도자인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사실을 고려하면, 덩의 판단이 얼마나 빨랐는지 알 수 있다.
중국은 1986년 가을, 북의 반대를 외면한 채, 적성국의 수도인 서울에서 열린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9월20일~10월5일)에 참가해, 한국을 금메달 한개 차로 따돌리고 1위를 차지하는 방식으로 덩샤오핑의 지침을 따랐다. 1986년 한-중 무역 총액(12억8900만달러)은 이미 북-중 무역 총액(5억1천만달러)의 2.5배를 넘어섰다.
덩샤오핑은 1988년 5~9월 사이 외빈을 만난 자리에서 여러 차례 한-중 관계는 “유익무해”(有益無害)하다고 했다. “경제적으로 쌍방 발전에 모두 유리하고, 정치적으론 중국의 통일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중국은 1988년 서울올림픽에도 북의 반대를 뿌리치고 참가했다.
그럼에도 중국은 한국과 공식 외교관계 트기에 속도를 내지 않았다. 아주 굼떴다. 역시 덩샤오핑의 지침이 있었다. 덩은 한-중 관계가 “매우 민감한 문제”이니, 북의 이해를 구해가며 “매우 신중하게 일을 진행”하라고 했다.
첸치천은 <열가지 외교이야기>에 이렇게 적었다.
“중국과 한국 수교의 난점은 양국 관계에 있는 게 아니라, 중국과 북한의 관계에 있었다. 북한에 어떻게 이런 중국의 외교 정책상의 조정을 이해시키고 받아들이게 하는가였다.” 한-중 수교가 불필요해서가 아니라, 북을 설득하는 데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중국이 북의 눈치를 보느라 우물쭈물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오해다. 실상은 그 반대다. 1992년 4월13~17일 방북한 양상쿤 중국 국가주석은 김일성 주석을 만나 “국제 정세와 우리의 대외관계를 분석할 때, 중국은 한국과 수교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사실상 한-중 수교 방침을 통보했다고 첸치천은 전했다(<열가지 외교이야기>, 162쪽). 김일성의 80회 생일상을 앞에 두고, 폭죽 대신 ‘폭탄’을 터트린 것이다.
양상쿤이 평양에 도착한 4월13일은, 첸치천 외교부장이 베이징 댜오위타이(조어대)에서 이상옥 한국 외무장관과 단독회담 중에 한-중 수교 교섭 비밀 개시를 정식으로 제안한 날이었다.
앞서 중국은 1991년 5월3~6일 리펑 총리가 방북했을 때, 북에 두개의 ‘폭탄’을 안겼다. 리펑은 “한국이 유엔 단독 가입을 신청하더라도 더는 반대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남북 유엔 동시·분리 가입을 “민족의 분열을 영구화·합법화하려는, 천추에 용서 못할 대죄”라던 북이, 급작스레 태도를 바꿔 ‘외교부 성명’(1991년 5월27일)으로 ‘유엔 가입 방침’을 밝힌 결정적 이유다.
리펑은 ‘조-중 무역 경화 결제 방침’도 통보했다. 사회주의 우호가격에 따른 물물교환식 교역을 끝낼 테니, 북이 중국 물품을 수입하려면 ‘현금’을 내라는 통보다. 이후 조-중 무역은 1990년대 내내 날개 잃은 새처럼 수직낙하했다.
한국과 중국은 수교 과정에서 각각 오랜 벗을 ‘배신’했다.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은 우더메이 ‘자유중국’ 입법위원한테 “새 친구를 사귀었다고 옛 친구를 버리는 것은 동양의 윤리에 맞지 않는다”고 호언했지만, 결국은 대만과 단교했다.
노 대통령은 왜 그토록 중시하던 “동양의 윤리”를 저버렸을까? “2천만 인구를 가진 대만 시장과 당시 13억 인구의 중국 시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1991년에 우리 철강 산업, 특히 포항종합제철(포스코)을 살리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도 바로 대중국 철강 수출이었다”(<노태우 회고록> 하권, 253~254쪽).
그는 “중국은 한국 경제의 생명선이자, 해외 진출 한국인의 뉴프런티어였다”고 강조했다. 국가 관계에서 ‘우정’은 ‘이익’을 이기지 못한다.
한국과 관계 정상화에 뜸을 들이던 중국이 1992년 봄 수교 협상을 공식화한 데에는, 1989년 ‘천안문 사태’로 국제사회에서 입지가 준 중국의 “하나의 중국” 원칙을 뿌리부터 흔든 대만의 민활한 외교가 자극제가 됐다. 천안문 사태 이후 그레나다·라이베리아·벨리즈·레소토·기니비사우·니카라과와 수교한 대만이, 1992년 2월, 해체된 옛 소련에서 떨어져 나온 라트비아와 수교한 게 결정적이었다.
중국은 아시아에서 홀로 대만과 공식 외교관계를 유지하던 한국이 단교하게 함으로써, 대만의 도발을 응징하기로 결정했다(돈 오버도퍼, <두개의 한국>, 374쪽).
실제 중국은 1992년 5월14~15일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제1차 한-중 수교교섭 예비회담이 열렸을 때 두 가지를 강조했다.
“대만과 단교”는 ‘수교의 전제조건’으로, “북-미 및 북-일 관계 정상화 환경 조성에 한국이 적극 나서달라”는 ‘수교 조건’이 아닌 “요청 사항”으로 제기했다. 늘 그렇듯 중국한테 ‘양안 문제’의 중요성은 ‘조-중 관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치명적 배신의 고통엔 눈물도 울음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북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을 다짐하던 중국의 ‘배신’에 공개 반발하지 않았다. 소련의 ‘배신’에 “딸라로 팔고사는 외교관계” ‘미제의 앞잡이’ 운운하던 때와 판이한 대응이었다.
한-중 수교 직후인 1992년 10월1일 유엔 총회에 참석한 김영남 외교부장은 남 말 하듯 이렇게 말했다. “중국은 자주자립 원칙에 따라 외교를 하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식대로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모든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조-중 관계는 90년대 내내 모든 영역에서 싸늘하게 식어갔다. 조-중 무역은 1993년 8억9900만달러에서 1999년 3억2900만 달러로 급감했다. 1999년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할 때까지, 1993~1998년간 조-중 수뇌부의 상호 방문이 끊겼다.
한-중 수교 이후 한-중 관계는 말 그대로 상전벽해다. 1992년 81억2800만달러이던 양국 무역은, 2020년 2414억5009만달러로 30배 치솟았다. 이는 2020년 한국의 미국(1316억8000만달러)·일본(711억2069만달러)과 무역을 더한 것보다 많다.
한-중 수교는 동북아의 전략 지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했다.
한국은 소련에 이어 중국과 수교해 ‘냉전의 족쇄’를 풀었다.
남북관계만 안정적으로 개선된다면, 한국은 사방이 꽉 막힌 ‘냉전의 외딴섬’에서 벗어나, 대륙과 해양을 잇는 가교국가로 완벽하게 거듭날 수 있다.
중국은 남·북 모두와 ‘가장 중요한 관계’를 맺은 국가가 돼, 미국과 함께 동북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 패권국’의 지위를 다졌다.
북은 “조·중은 한 참모부”(김정은, 2018년 6월19일 조-중 정상회담)라면서도, 소련 해체 이후 중국에 생존을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미국으로 가는 길’을 뚫으려, ‘핵 게임’ 등 광기 어린 생존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네트워크 이론에 비유하자면, 북-미(그리고 북-일) 사이의 끊긴 길에 쌓인 스트레스가, 동북아 네트워크 전체를 무시로 블랙아웃의 위험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중 전략 경쟁은 강대국의 패권 다툼을 넘어, 한반도 8천만 시민·인민의 생명·안전·발전권과 직결된 사태다. 남과 북의 고도의 경각심과 전략적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이제훈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1008728.html?_fr=mt2#csidx610424c1bf3f8d0aead04a1553642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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