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도덕적 이분법으로 구성된 노동윤리, 도움이 필요한 자를 부도덕한 이들로 그려내는 방식

道雨 2021. 8. 30. 10:59

‘좋은 난민’과 거부의 이유

 

지그문트 바우만은 <새로운 빈곤>에서 소비사회 시대의 빈자들이 그 어느 시대의 빈자들보다 사회에 요구하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바우만은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소비사회의 노동윤리’를 지적한다.

소비사회에서 노동윤리가 지배하는 것은 실상 기이한 일이다. 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미덕은 열심히 일하는 것과 무관하게 소비력을 갖추는 것이다. 이 사회에선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하더라도 충분히 소비력을 주지 못하는 노동은 존중받지 못한다.

그런데도 왜 소비사회에서 노동윤리가 이토록 강조되는 것일까?

 

바우만에 따르면, 노동윤리야말로 사회적 도움이 필요한 빈자들을 배제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선이요 그렇지 않은 것은 악이라는, 도덕적 이분법으로 구성된 노동윤리에는, 누군가가 가난하다면 그가 게으른 자이기 때문이라는 의미가 내재해 있다.

이 윤리를 내면화하다 보면, 자연스레 빈자들은 게으름이 몸에 밴, 노동윤리가 미치지 못하는 부도덕한 자들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이런 노동윤리가 미치지 못하는 자들을 사회가 도와준다고 생각해보라. 그 결과는 뻔하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사회에서 빈자들이 남은 양심이라도 지키고 있다는 걸 보이려면, 사회에 아무런 도움도 요청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소비사회에선 ‘존재감 없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빈민이야말로 착한 빈민’이다.

송파 세 모녀 사례를 돌이켜보자. 우리가 그들을 진심으로 동정했던 것은, 그들이 사회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소비사회는 이렇게 노동윤리를 통해 빈자들을 부도덕한 존재로 그려냄으로써,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도덕적 책임감에서 벗어난다.

 

미군이 아프간에서 철수를 했다. 빈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왜 뜬금없이 아프간이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화제를 돌린 이유는, 탈레반의 억압을 피해 탈출을 택한 난민들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아프간인들 수용 문제를 두고 찬반 논의가 무성하다. 찬반은 자유다. 다만 수용 반대의 논리를 들여다보면, 바우만이 지적한, 도움이 필요한 자를 부도덕한 이들로 그려내는 방식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아프간 난민들은 이슬람이다. 이슬람은 폭력적이다. 그렇기에 이들을 수용하면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라는 식이다. 근본이 부도덕한 자들이기에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도덕성이 있는 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겠다고 말할 때는, 이에 합리적 이유를 제시할 필요를 느끼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생명이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없는 합리적 이유란 어떤 것이 있을까? 생명이 인간의 최상위 기본권이라면,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생명을 보호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여야 한다.

결국 그 합리적 이유는 이들의 존재를 부도덕하게, 보호의 가치가 없을 만큼 부도덕하게 묘사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그 부도덕의 정도는 ‘이들의 목숨을 구해주면 목숨을 구해준 우리를 해하게 될 것이다’는 데까지 이른다.

 

그뿐만이 아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이들을 거절해야 할 합리적 이유를 찾는 일은, 때로 이들이 가진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난민들이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 이게 무슨 난민이냐’는 식이다. 제주도에 예멘 난민들이 들어왔을 때 우리에게도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당대의 난민에게 스마트폰은 필수품이었다. 낯선 먼 길을 떠난 난민에게 스마트폰만큼 갈 곳을 정확히 알려주고, 고국의 가족들과 연락망을 유지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합리적 이유를 찾다보니, ‘도움이 필요하다면 모든 것을 잃어야만 한다’는 발상에까지 이른 경우다.

 

한차례 이미 언급했지만, 난민 수용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인간으로서 극한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겠다는 내게도 합리적 이유가 있다’는 발상은 한편으로 인간적이다.

하지만 자신이 도덕적 책임감을 지닌 사람이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부도덕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닥친 현실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고달프다. 때론 ‘존재감 없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난민이 좋은 난민이다’라고 말하는 게, 그들을 수용하지 말아야 할 합리적인 이유를 찾는 것보단 인간적인 변명일 수 있다.

 

 

김만권ㅣ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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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09608.html#csidx1a5bbf2dbd64eb9b4de54959c3d051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