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과 이동원
정지용의 시를 읽을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 정지용은 북한으로 간 ‘빨갱이 작가’로 찍혔다. ‘시는 정지용, 문장은 이태준’이라고 할 정도로 그의 시는 빼어났지만, 이데올로기는 문학에 족쇄를 채웠다. 정지용의 시 대부분이 금서였다. 출판사도 출판을 꺼렸다.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1988년 민주화되면서 그해 7월에서야 금서 목록에서 풀렸다.
‘향수’는 정지용의 대표적인 시다. 이 시 제목을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고향’이란 제목의 정지용 시가 따로 있다. 정지용은 ‘향수’를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 교지 <요람>에 선보였고, 1927년 종합잡지 <조선지광>에 정식으로 발표했다.
‘향수’는 민주화 이전에는 읽을 수도 없었지만, 지금은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나온다. 수능에서 가장 많이 나온 시 가운데 하나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맛깔스럽게 쓴 데다, 뛰어난 감각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여서 그럴 것이다.
‘향수’는 노래로 다시 태어났다. 시가 해금된 지 1년 만이었다. 가수 이동원은 1989년 낸 앨범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에 ‘향수’를 실었다.
이동원은 정지용의 시가 해금된 뒤 ‘향수’를 읽고 매료돼, 노래로 만들기 위해 작곡가 김희갑을 찾아갔다. 김희갑은 곡을 붙이기에 너무 어렵다며 거절했지만, 이동원이 끈질기게 요청해 10여개월 뒤 노래가 나왔다.
이후 이동원은 서울대 음대 교수인 테너 박인수를 찾아가 같이 노래를 부르자고 제안했다. 박인수는 이동원과 함께 이 노래를 부른 뒤 클래식계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다. 국립 오페라단에서 제명당하기도 했다. 클래식 성악가가 ‘딴따라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동원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그를 떠나보내면서 정지용과 닮은 점이 떠올랐다. 이데올로기가 정지용의 문학을 짓눌렀다면, 장르의 배타성이 이동원의 노래를 억압했다. 하지만 정지용의 시는 교과서에 실렸고, 이동원의 노래는 대중가요와 클래식을 접목하는 ‘크로스 오버’의 문을 열었다.
장르를 넘나드는 크로스오버는 이젠 대세다. 국악과 팝을 접목한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의 인기가 그걸 증명한다.
정지용과 이동원은 이데올로기로 작품을 재단하고, 장르로 구분 짓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보여주고 떠났다.
정혁준 문화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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