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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종대왕은 과학적 풍수가

道雨 2007. 10. 3. 15:10

세종대왕은 과학적 풍수가

 

풍수 신봉 불구 '청계천 하수 허용' 등 현실적 대처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 강연

 


세종은 풍수를 신봉하는 풍수의 대가였으나, 풍수를 맹신하지 않고 현실주의적으로 대처한 군주라는 평가가 나왔다. 최창조 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는 9일 경기 여주군민회관에서 열리는 훈민정음 반포 561돌 기념학술행사에서 ‘
세종대왕과 과학풍수’ 를 주제로 이 같은 내용의 강연을 한다.

세종23년(1441) 며느리이자 단종모인 권씨의 장지인 소릉의 입지논란이 대표적인 사례. 안산 고읍에 장지가 정해졌으나 노비출신 풍수가 목효지가 ‘끊어진 곳이 많아 후손이 끊길 흉지’ 라고 주장하며 논란이 불거진다. 조사 끝에 목효지가 틀렸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세종은 “목효지의 말은 취할 바가 없으나 그 극진한 마음이 가상하다” 며 목효지가 글을 올린 지 3일 만에 면천시켜줬다.

이 같은 파격조치에 조정의 반발이 일었지만 세종은 “목효지가 공이 있어서 상을 준 것이 아니라 아직 젊어 풍수를 더 배울 수 있기 때문에 면천한 것” 이라며 더 이상의 논의를 금지시켰다. 세종은 풍수를 신봉했으나 그것을 맹신하지 않고 실용적사고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는 게 최 교수의 주장이다.

세종 26년(1444) 풍수상 도성 안을 흐르는 개천(청계천)을 맑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세종은 개천에 더럽고 냄새나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풍수를 신봉하지 않는
집현전 교리 어효첨이 도읍은 사람들이 번성하게 사는 곳이라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 쌓이기 마련이며 백성을 위해 하수를 흐르게 하자고 상소를 올리자 그를 ‘참 선비’ 라 칭하며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밖에도 사후 여주로 이장되기는 했지만 자신의 묫자리를 정할 때, 풍수상 흉지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효심을 발휘해 아버지 태종의 헌릉 인근으로 자신의 묫자리를 고집하는 등 풍수설에 동요되지 않았다. 최 교수는 “여러 태도로 보건대 세종은 땅의 길흉으로 모든 것을 탓하는 것은 사람의 책임전가라고 생각한 것 같다”며 “풍수를 과학적으로 이해한 진정한 풍수의 고수”라고 평가했다.

한편 학술행사에서는 보편주의적 전문가로서의 세종의 가치를 평가한 베르너 삿세 함부르크대교수의 ‘우리 세종대왕의 정신을 되살려야합니다’ , 위기관리 리더십 측면에서 세종을 고찰한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의 ‘세종은 삶의 질을 어떻게 높였나’ 등의 논문도 발표된다.

****************************** <한국일보/이왕구기자 2007.9.30>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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