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
--- 당쟁에 휘말려 평생을 유배 속에서 산 명필, 원교 이광사
▣ 이덕일 역사평론가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는 서예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중국과 다른 우리나라의 독특한 서체인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서예가이자 <원교필결>(圓嶠筆訣)과 <원교서결>(圓嶠書訣)이란 서예이론서를 저술한 이론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부는 그를 박하게 평가하는데 대부분 추사 김정희의 악평(惡評)에 기반한 것이다. 전남 해남 대흥사(大興寺)의 초의(草衣) 선사에게 쓴 편지에서 김정희는 이광사가 쓴 대흥사 대웅전(大雄殿) 편액(扁額)에 대해 혹평했다.
“원교가 쓴 대웅편(大雄扁)을 다행히 관람하며 지나쳤는데 이는 후배의 천박한 자들이 판별할 만한 것은 아니나 만약 원교가 자처하는 것으로 논한다면 전해들은 것과 같지 않아 조송설(趙松雪·조맹부)의 형식(?臼) 속으로 타락했음을 면치 못했으니 나도 모르게 아연하며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초의에게 드립니다’, <완당집>)
@ 김정희는 왜 이광사를 비웃었나
김정희는 ‘잡지’(雜識)에서도 “옛 선백(禪佰)이 이른바 ‘지붕 밖에 푸른 하늘이 있으니 다시 이를 보라’는 말도 있는데, 동쪽 사람들이 원교의 필에 묶여 있고, 또 왕허주(王虛舟·청나라 서예가) 등 여러 거장이 있는 것을 모르고 함부로 붓을 일컫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한 번 웃음이 나온다”라고 비판했다. 왕허주를 예로 든 데서 알 수 있듯 청나라를 자주 드나들었던 김정희는 청에서 습득한 서예이론으로 이광사를 비평했던 것이다. 또한 이광사는 소론이었던 데 비해 김정희는 노론으로서 반대 당파에 대한 당파심도 개재되어 있었다. 8년간의 유배생활을 제하면 순탄하고 화려한 인생길을 걸었던 추사로서는 전 인생이 쓰라렸던 이광사의 삶을 이해할 수 없었고, 삶을 이해하지 못하니 글씨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광사는 조선 2대 임금 정종이 성빈 지(池)씨 사이에서 낳은 10남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으로서 조부는 호조참판을 지낸 이대성(李大成)이고 부친도 대사헌을 지낸 이진검(李眞儉)인 명가였으나 당쟁에 휘말리면서 집안이 요동쳤다.
경종이 즉위하자 거대당파 노론은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강요하고 나아가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라고 압박하는 무혈 쿠데타를 자행했다. 경종의 왕위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자 소론 강경파였던 김일경(金一鏡)이 소두(疏頭·상소문의 우두머리)로서 세제 대리청정을 강요하는 이이명(李?命) 등 노론 사대신을 사흉(四凶)으로 모는 강경한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광사의 백부였던 이진유(李眞儒)가 박필몽(朴弼夢)·서종하(徐宗廈) 등 여섯 명과 함께 소하(疏下·상소문의 연명자)가 되었다. 신축소를 계기로 소론이 정권을 잡으면서 이진유는 사헌부 대사헌,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으나 경종이 독살설 끝에 세상을 떠나고 노론이 추대하는 영조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영조 즉위 뒤 김일경은 사형당하고 이진유는 귀양길을 전전하다 영조 6년(1730) 서울로 끌려와 다시 국문을 받는데 <영조실록>이 “곧 역적 김일경의 소하의 역적들이었다”라고 쓴 대로 경종의 충신이었던 그는 영조에게는 역적이 되어 곤장을 맞다가 물고(物故)하고 만다. 글씨에 뛰어났던 이광사의 부친은 영조 즉위 뒤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었다가 영조 3년(1727) 죽고 말았다. 이후 이광사 가문에는 ‘역적 집안’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가문 몰락의 계기가 된 영조 즉위(1724) 당시 이광사는 만 19살이었다. 역적 집안으로 몰리면서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지지 않자 이광사는 과거를 포기하는 대신 학문에 몰두했다. 그는 영조 8년(1732)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를 찾아 강화도로 가는데, 정제두는 유일사상이던 주자학에 맞서 양명학을 공부한 학자였다(639호 ‘어느 양명학자의 커밍아웃’ 참조). 정제두의 아들 정후일(鄭厚一)이 이광사의 부친과 친했던 세교(世交)가 있어 이광사도 정제두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광사는 정제두에 대해 “나는 학식이 얕아서 선생이 이르신 도가 어느 지경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분은 밖의 유혹은 떨쳐버리고 실리(實理)만을 간직했을 뿐 그 밖의 경지는 없다”라고 존경의 마음을 드러냈다. 그는 양명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영조 12년(1736)에 온 가족을 이끌고 강화로 향했으나 갑곶이 나루(甲津)에 이르렀을 때 정제두의 부음을 들었다. 그 뒤 이광사는 영조 28년(1752) 정제두의 막내손녀를 자신의 막내아들 이영익(李令翊)의 아내로 맞아 사돈관계로 발전시켰다. 이광사가 동국진체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당대의 명필이자 동국진체의 계보였던 백하(白下) 윤순(尹淳)이 정제두의 아우 정제태(鄭齊泰)의 사위이자 정제두의 문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 나주벽서 사건에 연루되자 부인 자결
과거를 포기한 채 양명학과 서예에 몰두하던 그는 만 50살 때인 영조 31년(1755) 발생한 나주벽서 사건에 연루됨으로써 위기에 빠진다. 나주 객사에 영조의 치세를 비판하는 벽서가 붙으면서 시작된 것이 나주벽서 사건인데, 벽서의 작성자 윤지(尹志)는 곧 체포되고 만다. 윤지는 영조 즉위 뒤 소론 강경파로 몰려 김일경과 함께 죽은 훈련대장 윤취상(尹就商)의 아들로서 연좌죄에 걸려 31년째 유배생활을 하던 인물이었다. 이 사건에 분노한 영조는 수많은 관련자를 사형시키는데, 윤지는 물론 그의 아들 윤광철(尹光哲)도 능지처참했고, 이미 사망한 소론 강경파 대신들에게 역률을 추가하고 이미 죽은 소론 온건파는 관작을 삭탈했다. 이광사는 윤지의 아들 윤광철과 몇 차례 서신을 주고받은 것 때문에 의금부에 하옥되었는데, 나주벽서와는 전혀 무관한 내용들이었으나 이성을 잃은 국문에서 그의 목숨은 풍전등화였다. <영조실록> 31년 3월6일자는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이광사 등을 신문하였는데, 그들이 윤지와 서로 교통한 자취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광사는 이진유의 조카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이광사는 이사상(李師尙)의 손자 이수범(李修範)이 국청에서 맞아죽기 전 “윤광철과 이광사는 서로 뜻이 맞는 절친한 사이였다”라고 자백했으므로 살아날 가망이 거의 없었다. 그가 3월6일 체포되자 그달 12일 부인 문화 유씨가 마흔둘의 나이로 두 아들 긍익(肯翊)·영익과 일곱 살짜리 딸 하나를 두고 자결한 것도 이런 절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3월30일 이광사를 감사(減死)해 유배형에 처한다. 다음날 대간(臺諫)에서 “죄인 이광사는 역적 이진유의 조카로서 여러 차례 역적의 공초(供招·자백)에 나왔고, 윤광철과 서로 얽히고 친밀한 정상은 또한 윤광철의 일기에도 실려 있다”며 국문을 계속해야 한다고 요청했으나 영조는 거부했다. 영조가 그를 왜 살려주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종친의 후예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겨우 살았다고 좋아할 것도 없었다. 친형제와 종형제 대부분이 유배형에 처해져 가문이 풍비박산 났기 때문이다. 이광사의 다섯 형제 중 막내형 이광정(李匡鼎)만이 살아 있었는데 이광사가 체포되자 그는 금오문(金吾門·의금부) 밖에서 울부짖었으나 그도 투옥되었다가 동생의 생사를 모른 채 함경도 길주로 귀양 갔다. 길주에서 이광정은 매일 새벽 하늘에 절하며 동생의 목숨을 건져달라고 빌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이광사가 함경도 부령에 유배되면서 길주에서 상봉하기도 했다. 이광사는 유배를 떠나며 ‘죽은 부인을 애도함’(悼亡)이란 시를 써서 부인의 영혼을 달랬다.
“내가 비록 죽어 뼈가 재가 될지라도/ 이 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 내가 살아 백번을 윤회한대도/ 이 한은 정녕 살아 있으리/ …/ 천지가 뒤바뀌어 태초가 되고/ 해와 달이 빛을 잃어 연기가 되어도/ 이 한은 맺히고 더욱 굳어져/ 세월이 흐를수록 단단해지리라/ …/ 내 한이 이와 같으니/ 당신 한도 정녕 이러하리라/ 두 한이 오래토록 흩어지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 만날 인연 있으리.”
이광사는 부령에 유배되었으나 의기가 꺾이지는 않았다. 그는 ‘두만강의 남쪽’(斗滿江之南)이란 뜻의 ‘두남’(斗南)으로 자호(自號)하고 학문과 서예에 정진했다. 부령 근처 갑산에 유배된 종형 이광찬(李匡贊)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에 대해 토론했는데, 이광사가 양명학에 기초해 주자를 비판하자 이광찬은 “공자의 뜻은 주자가 얻었으니 그가 곧 공자이고, 주자의 뜻은 후인이 얻었으니 그가 곧 주자”라고 꾸짖기도 했으나 그는 뜻을 꺾지 않았다.
@ 장남은 <연려실기술> 지은 이긍익
유배지에서 이광사는 늘그막에 낳은 막내딸을 얼마나 예뻐했는지를 절절하게 토로하면서 “아! 이승에서 너를 다시 볼 수 있다면, 헤어진 후의 뒷이야기를 모두 다 들려주겠다”라는 편지를 쓰고, ‘딸에게 주는 편지’(寄女兒言)에서는 식사 예절 등을 자세하게 일러준 뒤 “그런 다음 한글 두 줄과 한자 한 줄을 베껴 쓰는데, 벼루는 항상 같은 자리에 놓아라. 두 오빠에게 문자를 약간씩 가르쳐달라고 하고, 바느질 등 배운 것을 복습하여라”라고 당부하는데, 딸에게도 한글과 한자를 가르치는 데서 기존 가치에 얽매이지 않는 성품이 느껴진다.
그는 영조 8년(1732) 진도로 이배된다. 그의 문집인 <원교집선>의 ‘은혜에 대해 서술하다’(述恩幷序)에 따르면 지평 윤면동(尹冕東)이 장계를 올려 “북쪽 변방에 있는 이광사가 사인(士人)들을 다수 모아 글씨를 가르친다”며 “민심을 선동할 우려가 있으니 작은 절도(絶島)로 이배할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변경의 유배객에게 수많은 문인들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영조실록> 38년(1762) 7월25일자는, “이광사는 진도(珍島)에 안치하고 그 학도들은 부사(府使)로 하여금 곤장을 치게 했다”라고 이광사는 이배되고 그의 제자들은 곤장을 맞았음을 알려준다. 진도를 거쳐 신지도(薪智島)로 이배되면서 다시 친형 이광정을 만나는데, 이것이 형제의 영이별이 되었다. 이광정은 영조 49년(1773) 유배 19년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광사도 정조 1년(1777) 유배 23년 만에 신지도에서 숨을 거둔다.
그의 글씨에 대한 일화는 여럿 남아 있다. 전남 구례의 ‘지리산 천은사’는 원래 이름이 감로사(甘露寺)인데 숙종 때 중건하면서 샘가의 구렁이를 잡아 죽이자 샘이 사라졌다고 해서 ‘샘이 숨었다’는 천은사(泉隱寺)로 개명했다. 그 뒤 원인 모를 화재가 자주 일자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는 구렁이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두려워했는데, 이광사가 물 흐르는 듯한 수체(水體)로 ‘智異山泉隱寺’(지리산 천은사)라고 써준 글을 일주문에 건 뒤부터 화재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고요한 새벽에 일주문에 귀를 기울이면 현판에서 신운(神韻)의 물소리가 들린다고 전한다. 또한 이광사는 글씨를 쓸 때 가객(歌客)에게 노래를 시켜 노랫가락이 우조(羽調)이면 글씨도 우조의 분위기로 쓰고, 평조(平調)이면 글씨도 평조의 분위기로 썼다고 전한다. 그만큼 그는 글에는 온몸과 영혼이 실린 신기(神氣)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광사가 동국진체를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역사를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국조(國祖) 단군부터 두문동에 은거한 고려 충신들의 이야기까지 30가지 일화를 30수로 읊은 ‘동국악부’(東國樂府)를 지었는데, 그와 처지가 비슷했던 정약용은 ‘해동악부(海東樂府) 발문’에서 “문장이 깨끗해서 즐길 만하다”라고 호평했다. 이광사의 장남이 방대한 역사서인 <연려실기술>의 저자 이긍익인데, 연려실(燃藜室)이란 호는 이광사가 서실 벽에 써준 것으로 한(漢)나라의 유향(劉向)이 옛 글을 교정할 때 태일선인(太一仙人)이 청려장(靑藜杖·명아주 지팡이)에 불을 붙여 비추어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이긍익이 평생을 고초 속에 산 부친을 얼마나 흠모했는지 알 수 있다.
* 지리산 천은사 일주문. 물 흐르는 듯한 원교 이광사의 현판 글씨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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