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평양' 기생이 유명해졌을까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평양감사라는 자리가 노른자위였음을 알려주는 속담이다. 그런 평양감사만큼이나 유명한 게 또 있다. 바로 평양기생이다.
평양기생이 유명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평양기생이 다른 지역 기생들에 비해 기생으로서 조건이 우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생의 외모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또 평양에 기생이 많이 몰렸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평양기생이 다른 지역 기생들보다 괜찮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평안도 여성들이 예뻐서였기 때문일까? 남남북녀이기 때문이었을까? 또 평양에 기생이 많이 몰린 이유는 무엇일까?
평양기생이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던 건 조선 시대의 정치적·외교적 상황과 관련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돈이 많이 모이는 곳에 유흥가가 몰리듯이, 조선시대의 평양에도 돈이 많이 모였기 때문에 기생들도 그리로 몰렸다고 볼 수 있다. 부자가 많이 살았던 중국의 쑤조우·항조우에 미인이 많았던 것도 유사한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평양에 돈이 많이 몰린 이유는 무엇일까? 평양에서 산업이 발달했기 때문일까? 물론 그것은 아니다. 그것은 평안도에서 거둔 세금이 중앙에 상납되지 않고 평안도에서 자체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18세기 초반까지는 중앙 정부는 평안도 세금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경국대전>의 속편인 <속대전> 권2 호전(戶典) 수세조(收稅條)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나온다.
"서북의 세곡(稅穀)은 본도(本道)에 유보하고 함부로 다른 지방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
서북, 즉 평안도의 세금은 원칙적으로 평안도에서만 사용하게 한 조항이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다른 지방으로 옮길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평양의 관리들은 평안도에서 거둔 세금을 중앙 정부에 보낼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평양 관리들의 주머니는 두둑해졌다.
그런 평양 관리들의 '비자금'을 포착한 것이 기생들이고, 그 기생들이 평양에 모이다 보니 자연히 평양은 기생으로 유명해졌다고 볼 수 있다. 기생들이 많이 모이면 괜찮은 기생들도 많아지는 건 당연한 일.
세금을 자체 관리한 평안도... 돈 몰린 곳에 기생 모이다
조선시대에 중앙 정부에서 평안도 세금을 중앙으로 거두어들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대내외적 사정이 작용하고 있었다.
첫째, 변방 방어의 필요성 때문에 평안도에 군수물자를 비축해 둘 필요가 있었다. 이는 평안도가 대(對)중국 방어기지의 최일선에 있었음을 생각할 때에 당연한 것이다.
둘째, 평안도의 낮은 토지생산성을 감안할 때 중앙에서 평안도 세금까지 거둬들이는 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백성의 최저생계를 위협하는 것은 정권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셋째, 운송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평안도 물자를 중앙으로 운반하는 것은 그다지 실익이 없었다. 중국의 경우에도 사정은 동일했다. 전근대 중국 정부의 재정적 고민 중 하나는 조세로 거둔 곡식을 운반하는 동안 운반 일꾼들이 그 곡식을 다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그런 예는 예는 비일비재했다.
넷째, 한·중 간 사신의 접대 비용을 평안도가 자체 부담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토지생산성이 낮은 평안도 사람들에게 사신 접대 비용도 부담하고 여분의 물자도 중앙으로 보내라고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중앙 정부는 공식적인 사신 일행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의주·회령·경원에서 열린 중국과의 호시무역(互市貿易)의 비용도 평안도·함경도에 전가했다.
평안도 도민들은 여러 가지로 과중한 조세 부담을 안고 있었다. 1882년 조선과 중국이 체결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제5조에서 호시무역 경비 부담을 폐지하기 전까지, 평안도·함경도민들은 호시무역 경비까지 부담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정부마저 손을 내밀었다면, 평안도의 성난 민심을 달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에, 평안도의 세금은 평양에서 자체적으로 관리했다. 그런 상황에서 평양 관리들의 호주머니에 '비자금'이 축적되는 것은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평양기생이 유명해진 것도 이러한 역사적 상황과 관련돼 있었을 것이다.
<오마이뉴스/김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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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평양기생 삶 기록 ‘녹파잡기’ 발견
《“노을빛 치마는 가볍게 바람에 날리고 구름 같은 머리는 드높다.
일찍이 그녀가 의자에 걸터앉아 한 남자로 하여금 버선을 신기게 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의기(意氣)가 귀공자의 풍모를 절로 드러냈다.”경연(輕燕)이란 기생에 대한 묘사
“일찍이 봄날의 달빛 휘영청 밝았다. 그녀는 손으로 비단 주렴을 걷어서 달빛을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쓸쓸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더니 나를 보고는 몹시 기뻐하며 ‘달은 밝고 바람은 맑아요. 이렇게 멋진 밤을 어찌하면 좋지요?’ 라고 하였다.”기생 화월(花月)에 대한 묘사 》
19세기에 색향(色鄕)으로 유명했던 평양의 기생들을 인터뷰해 그들의 삶을 생생히 묘사한 책이 발견됐다.
안대회(한문학) 명지대 교수는 19세기 전반 개성 출신의 낙방거사 한재락(韓在洛)이 쓴 ‘녹파잡기(綠波雜記)’를 발견하고 곧 ‘한문학부’에 발표할 논문 ‘평양기생의 인생을 묘사한 소품서 녹파잡기고’에 자세히 소개했다.
녹파잡기는 평양 기생 67명과 기방을 무대로 활약한 남성 예능인 5명을 직접 만나 그 재주와 특징을 기록한 책이다. 그동안 존재만 알려졌는데 단국대도서관 ‘연민장서’에 소장된 복사본과 고려대 ‘육당문고’에 소장된 ‘서경잡기’의 일부로 실린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실체가 확인됐다.
제목에 쓰인 녹파는 고려 시인 정지상(鄭知常)이 평양 대동강을 배경으로 지은 한시 ‘송인(送人)’에 나오는 ‘이별의 눈물 해마다 흘러 푸른 파도에 더해지네(별루년년첨록파·別淚年年添綠波)’에서 따온 것으로 평양 기생들의 매력과 애틋함을 잘 보여 준다.
“담담한 말씨에 은근한 미소가 일품이다. 봄날 난간에 기대어 슬픈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은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듯하다.”(기생 영주선)
“손가락이 가는 파처럼 섬세하다. 몸은 옷을 견디지 못할 정도다. 담박하여 물욕이 없다. 화장품이나 사치품을 남들은 다투어 추구하지만 그녀만은 홀로 뒷짐 지고 있다.”(기생 취란)
농염한 매력뿐 아니라 기생들의 고결한 정신적 면모도 전해 준다.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이들을 보면 옷을 벗어 주고 음식을 양보했던 차앵, 한 남자에 매일 것을 한탄하며 여성의 자유를 열망한 죽엽, 자신이 모은 재산을 가로챈 계모를 끝까지 두둔한 패옥….
남성 예능인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다. 신위가 ‘연광정과 부벽루 앞의 푸른 물결이 사라져야만 그 명성이 끝날 것’이라고 극찬한 당대의 ‘싱어송라이터’ 홍출주, 평양의 명기 예닐곱이 각기 마음에 맞는 애인을 데리고 잔치를 벌이기로 했는데 그 자리에 나타났던 유일한 남자 안일개….
한재락은 개성 부잣집의 아들로 태어나 좌절된 출사(出仕)의 꿈을 음풍농월로 달랜 문장가였다. 이상적(1804∼1865)은 그에 대해 “고해(苦海)의 세상에 빠져 있으나 환락의 자리에서는 질탕하게 즐겼네. 문장은 봄날의 꽃과 같고 비평하기는 능숙한 솜씨”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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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유행가의 여왕 평양기생 왕수복
평전 ‘평양기생 10대 가수 여왕되다’ 나와 “최승희씨가 조선무용을 살린 것처럼 나는 조선의 민요를 많이 노래하고 싶습니다.”(<오사카아사히> 남선판 1939년 4월9일)
‘조선 민요계의 최승희’를 꿈꾸었던 왕수복(1917~2003)은 기생이었다.
열두살에 평양 기생학교에 입학해 3년 과정을 마친 뒤 정식 기생이 된 이 맹랑한 여성은 1936년 스무살에는 벨칸토성악연구원에서 입학하여 정통 성악을 배웠다. 선생은 이탈리아 성악가인 벨트라멜리 요시코.
1933년(17살)에 폴리돌 레코드사에서 ‘고도의 정한’ ‘인생의 봄’을 취입하여 당대 최고 판매량인 120만장을기록할 정도로 노래 실력은 익히 증명되었다.
34년에는 그가 부른 ‘아리랑’이 경성방송국 한국어 제2방송의 첫전파를 타고 일본 전역에 중계되었다.
35년에는 잡지 〈삼천리〉의 남녀가수 인기투표에서 1위에 올랐다. 요즘으로 치면 연말 10대 가수 대상이다. 게다가 〈퀴리부인전〉, 〈좁은 문〉을 읽는 인텔리였다.
우리말 가사 금지에 따른 은퇴, 이효석과의 2년여에 걸친 불꽃 같은 사랑(1940~1942), 노천명의 약혼자 김광진(당시 보성전문 교수)을 쟁취하여 결혼(1945)한 그는, 분단과 함께 평양에 남아 중앙라디오, 국립교향악단의 전속가수가 되어(1953, 55) 한달간 소련 순회공연을 하는 등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마흔세 살에는 공훈배우가 되었고 60~70년대에는 경제 선전 예술활동에 동원되어 생산현장에서 노래를 불렀다.
김일성 부자로부터 총애를 받아 환갑, 칠순, 팔순 생일상을 받은 그는 2003년 86살에 사망해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반면 남한에서는 월북자로 취급돼 철저하게 잊혀진 존재였다. 1965년 5월 남편과 함께 판문점을 관광하다 남쪽 언론에 포착돼 잠시 눈요깃거리로 소개되었을 뿐이다(<조선일보> ‘색연필’).
신현규 교수(중앙대 교양학부)가 왕수복의 반쪽 생애를 복원해 평전 〈평양기생 10대가수 여왕되다〉(경덕출판사)를 펴냈다.
스스로 구술하는 형식의 평전 뒤쪽에 〈삼천리〉, 〈조선예술〉 등에 실린 인터뷰와 수기 원문도 붙였다.
“왕수복의 노래는 황금심, 김정구 등이 부르면서 살아남았지만 이름은 잊혀졌어요. 한영애의 〈꽃을 잡고〉 리메이크로 함께 활동했던 선우일선의 노래에 대한 남북간 저작권 문제를 계기로 다시 알려졌지요.”
신 교수는 기왕의 알려진 자료 외에 남한에 생존한 평양 기생학교 후배의 증언을 땄다. 아흔살대의 증언자는 자신의 출신이 알려질까 이름 밝히기를 꺼렸다고 한다.
“복각판 ‘수수께끼아리랑’ 속의 ‘본조아리랑’을 들어보면 왕수복의 창법이 민요와 달라요. 완전히 서양식 성악기법입니다.” 일찍이 평양의 기생학교에서 김미라주, 이산호주한테 소리를 배운 바탕에 이탈리아 창법을 제대로 습득해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남쪽의 단편적인 기록에는 ‘신민요의 여왕’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유행가요의 여왕’이었어요. ‘그리운 강남’을 왕수복 등 세 사람이 함께 불렀다는 것도 이번에 새롭게 밝혔어요.”
왕수복의 사주로 점괘까지 봤다는 신 교수는 북한에서 기생학교 출신은 거의 숙청되었지만 왕이 장수한 것은 김일성 주석의 경제 선생이었던 남편 김광진 덕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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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평양 숭실전문학교로 자리를 옮긴 이후 소설가 이효석(李孝石. 1907-1942)에겐 문학의 황금기가 펼쳐졌다. '모던보이'였던 그는 언제나 고독과 사색을 즐겼다.
평소에도 폐가 좋지 못했던 그는 1942년 5월, 결핵성 뇌막염으로 쓰러져 입원한다. 그리고 그달 25일 오후 7시30분, 36세 모던보이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임종은 그의 부친 외에도 다른 한 명의 여인이 했다.
이 여인이 평양의 기성권번 기생학교 출신으로 당대를 대표하는 대중가수였으며, 해방 뒤에는 북한에서 갖은 영화를 누리다 '공훈배우'가 되고, 마침내 애국열사릉에까지 묻히게 된 왕수복(王壽福. 1907-2003)이었다.
왕수복의 일생에 두 명의 중요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첫째가 아내를 사별한 이효석이며, 둘째가 한때는 시인 노천명의 약혼자였던 김광진(金洸鎭. 1903-1981)이다.
김광진은 일반에게는 아주 생소하지만, 역사학계에서는 매우 저명한 인물로 경성제국대학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 경제학 교수를 지내다가 해방 뒤 월북해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장을 역임했다.
이효석을 떠나 보낸 왕수복은 해방공간인 1947년, 14살 연상인 김광진과 살기 시작해 그 해 첫딸을 낳았으며, 73년에는 남편이 김일성훈장을 받는 장면을 지켜보기도 했다.
북한에서의 왕수복은 1955년 7월 김일성 주석과 처음 만난 뒤 그 다음달 소련 공연에 북한 대표로 발탁되면서 인생의 절정을 구가하게 된다. 조선가요의 '여신'(女神)이란 별칭까지 얻은 그는 1965년 5월11일, 남편 김광진과 함께 판문점을 관광하던 장면이 사진에 포착되기도 했다.
1977년 환갑 때와 10년 뒤 칠순, 나아가 97년 팔순에는 김정일에게 생일상을 받기도 했다. 2003년 6월에 세상을 떠난 그는 이듬해 4월, 북한의 국립묘지격인 애국열사릉으로 이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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