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통반장 동원 서명운동’을 21세기에 보게 되다니.

道雨 2016. 2. 2. 10:31

 

 

 

‘통반장 동원 서명운동’을 21세기에 보게 되다니

 

 

 

우려했던 일이 현실화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참여로 ‘관제 운동’이란 비판을 받는 ‘민생 구하기 입법 촉구 서명운동’에 행정기관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한겨레> 취재 결과, 경북 김천·문경·영주시에서 읍·면·동사무소를 통해 서명운동을 벌였거나 벌이고 있으며, 통반장이 주민들을 방문해 서명을 받기도 했다. 명실상부한 ‘관권 운동’이 된 것이다.

21세기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해괴하고 창피한 일이다.

 

정부·여당이 신경망처럼 퍼져 있는 말단 행정기관과 통반장 등을 동원해 여론을 왜곡·조작하는 ‘관권 운동’은 군사독재 시절에 흔히 써먹던 수법이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1965년 한일협정 찬성 서명운동이다. 굴욕적인 협정에 비난이 들끓자 박정희 정권은 반대 여론을 탄압하는 한편 관권 서명운동을 벌였다. 통반장이 가가호호 찾아가고 집권당 당원들이 관공서 등을 돌아다니며 강제로 서명을 받았다.

 

이처럼 집권세력이 그 권력을 이용해 대중을 동원하는 건 전체주의 체제의 특징이다. 겉으로는 서명운동 등 자발적인 형태를 띠더라도, 무언의 압력과 같은 강압적 분위기가 더해지면 민주주의는 질식하고 만다. 국민에게 특정 의견을 표현하도록 강제하고, 반대되는 의견은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체제는 곧 독재요 파시즘이다. 여기에 관제·관권 운동의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이런 대중 동원 체제는 부정선거에 악용되기도 했다.

 

이번에 드러난 관권 서명운동은 일부 지자체에 국한된데다 상부의 지시 여부도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에서라도 이런 어이없는 발상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 원칙의 약화를 보여주는 위험 신호다. 대통령부터 본분을 벗어나 서명운동에 참여하는 등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모범’을 보이니 너도나도 따라 하는 것이다.

해당 지자체들은 서명운동을 당장 그만둬야 하고, 정부도 엄중한 경고 메시지를 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권 차원에서 또 다른 일탈을 조장하는 셈이 된다.

 

과거에는 관권 운동이 국민에게 두려움을 주고 실제 정국에 영향을 끼쳤을지 몰라도, 이제는 두려움 대신 비웃음만 살 뿐이다. 정부가 개입한 서명운동에 천만명이 참여한들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비웃음이 국내뿐 아니라 국제사회에도 퍼져간다는 점이다. 나라 망신도 이쯤이면 족하다.

 

 

 

 

[ 2016. 2. 2  한겨레 사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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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체가 통·반장 동원…입법촉구 ‘관권 서명운동’

 

 

 

김천·문경·영주시 등 직접 나서
휴일도 집집마다 돌며 서명받아
시민들 “21세기에 관권서명이라니”

 

 

 

경북 김천·문경·영주시 등 몇몇 지방자치단체들이 ‘민생구하기 입법 촉구 천만 서명운동’과 관련해, 읍·면·동사무소는 물론, 통·반장까지 동원해 시민들의 집을 방문해 서명을 받는 ‘관권 서명’에 직접 나선 것으로 확인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8일 “오죽하면 국민들이 그렇게 나섰겠느냐”며 대한상공회의소 등이 추진하는 서명운동에 참여한 뒤 재계에서 ‘강제 서명’ 논란이 벌어진 데 이어, 지자체가 일선 행정기관을 동원한 관권 서명에 나선 것이어서 파문이 예상된다.

 

지난 30일 저녁 8시께 경북 김천시 율곡동 ㄱ아파트에 초인종이 울렸다. 동사무소 직원이라고 밝힌 사람은 “국가에서 하는 일이니 경제살리기 법안 통과를 촉구하는 서명을 해 달라”고 했다. 주민 김아무개씨는 “아내가 동사무소 직원이라고 해서 서명했다고 한다. 21세기에 행정력을 동원해 서명을 받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율곡동사무소 관계자는 “통·반장이 서명을 쉽게 받기 위해 동사무소 직원이라고 말한 것 같다”고 했다.

 

31일 <한겨레> 취재 결과, 일부 기초단체들이 기업활력제고특별법,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노동개혁법(근로기준법 등) 등 ‘경제활성화 법안’의 조속한 처리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였거나 벌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김천시는 29일부터 23개 읍·면·동사무소를 동원해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 실·과·사업소 사무실에 서명용지를 비치해 민원인들을 상대로 서명을 받고 있으며, 다음달 2일까지 서명명부를 제출하라고 읍·면·동사무소에 지시했다. 김천시는 전체 인구 14만명 가운데 2만~3만명의 서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에 일부 읍·면·동사무소는 휴일에도 서명을 받고 있으며, 통장과 반장까지 동원하고 있다. 읍·면·동사무소가 서명명부를 통장한테 전달하면 통장이 다시 반장한테 건네는 방식이다. 일부 통·반장들은 밤에도 아파트를 방문해 주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문경시는 25~27일 사흘 동안 서명운동을 벌여 전체 인구 7만5천여명 가운데 1만6천여명의 서명을 받았다. 점촌1동주민센터는 이날 서명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일단 기간이 끝났지만, 나중에 통장이 집을 방문하면 부탁드린다”고 했다. 영주시 휴천2동주민센터 관계자도 “오후 6시까지 주민센터로 와서 서명을 하면 된다”고 안내했다.

 

자치단체 등 행정기관 또는 통·반장 등 공무원에 준하는 이들이 중앙정부 정책 등과 관련해 서명을 받는 관권 서명은, ‘강제 서명’이라는 지탄을 받아 오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뒤 사실상 사라졌다.

 

김천시 등이 관권 서명을 ‘부활’시킨 것은 경제활성화 법안 서명지에 이름을 올리며 야당과 노동계를 압박하고 있는 박 대통령한테 힘을 실어주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경제활성화 법안은 4월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날카롭게 맞서고 있는 사안이어서, 자치단체의 서명운동이 선거법을 위반한 것인지 논란도 예상된다.

 

 

부산/김광수, 대구/김일우 기자 ks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