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가라앉은 천안함 함수, 이틀 동안 못 찾았나 안
찾았나”
신상철 전 합조단 위원 항소 이유서, “북한 로켓 잔해는
하루만에 찾으면서… 고의 구조지연 의혹 여전”
(미디어오늘 / 조현호 기자 / 2016-03-26)
5년6개월 동안 진행됐던 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단 조사위원(진실의길 대표)의 천안함 명예훼손 재판 항소심이
오는 4월부터 열린다. 신 대표는 공소사실 34건 가운데 32건 무죄, 2건 유죄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 판결을 받았지만 불복해 항소했다.
검찰도 항소했다.
22일 서울고법에 따르면, 신 대표와 검찰 모두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윤준 부장판사)에 최근 항소이유서를
제출했다.
신 대표와 변호인의 항소이유서는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가 ‘해군의 고의구조지연 비판’ 글과 ‘국방부
장관의 스크래치 증거인멸’ 고발장 등 2건의 글에 대해 명예훼손 혐의를 인정한 것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신 대표는 이 과정에서 함수의 침몰위치를 표시한 ‘천안함 피격사건 백서’의 해도의 수심이 실제 수심과 상이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천안함 백서’에 표시된 함수의 최종 침몰 위치는 해저 등심선 수심 5m와 10m사이 지점에 침몰한 것으로 기재돼 있다. 그러나
정작 그 아래에는 “함수함체 침몰 위치 37-54-20N, 124-40-59E, 수심 20m”으로 나타나 있다. 수심 데이터가 다르게 나타난
것이다.
신 대표는 “수심이 5~10m에 불과할 경우 함수가 옆으로 누웠을 때 높이가 10m이므로 헬기 등 항공기의
육안으로도 쉽게 확인이 가능했을 것”이라며 “수심 20m가 잘못인지, 해도가 오류인지 진위를 가려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 대표는 “실제
함수를 해상크레인으로 건져올릴 때 수심은 대략 13~15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충분히 얕은 곳에 함수가 가라앉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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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천안함 피격사건 백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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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국방부는 이틀 동안 천안함 함수를 찾지 못했다고 발표했다고 신 대표는 지적했다.
또한 천안함 함수가 16시간22분 동안 수면 위에 떠있었는데도, 완전히 가라앉은 직후부터 해군이 함수의 위치를 놓친
경위에 대해서도 항소심에서 따질 것이라고 신 대표는 밝혔다.
신 대표는 1심 법정에 출석한 유종철 해경 501함 부함장이 천안함 사고 이튿날(2010년 3월27일) 아침
7시경까지 함수를 지키고 있다가 해경 253호정에 인계하고 현장을 떠났다고 증언한 점을 들어, 해경 253호 정장을 불러 △왜 계속 지키지 않고
이탈했는지 △왜 그대로 방치했는지 등을 신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해군 작전사령부는 모니터를 통해 함수의 완전 침몰 시각이 3월27일 13시37분이었다는 것을 파악한 뒤
백령도 현장의 탐색구조단에 위치를 통보해줬다고 심승섭 전 해작사 작전처장이 1심 법정에서 증언했다.
문제는 이 같은 함수에서 시신 1구가 발견됐다는 점이다. 국방부는 함수 지하 2층의 자이로실에서 당시 순찰근무를
하던 박성균 하사가 발견됐다고 4월24일 발표했다.
천안함 함수가 가라앉지 않았다는 사실과 위치를 실시간 파악하고 있었는데도 더 이상 수색을 하지 않은 이유와 관련해
신 대표는 “함수에 ‘더 이상 남아있는 대원이 없다’는 천안함 함장의 보고가 결정적이었을 것”이라며 “함수가 떠있는 16시간22분 동안 떠있다
가라앉도록 방치한 결과, 혹시라도 생존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고귀한 생명을 잃게 내버려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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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3월27일 아침 수면위에 뱃머리가 여전히 수면위에 떠있는 천안함
함수와 그 주위를 돌고 있는 해경253정. 사진=신상철 전 민군합조단 조사위원의 항소이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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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하사의 모습은 복원된 CCTV 영상 속에 자세히 나타나있다. 실제로 천안함 사고 당일 저녁 후타실과 기관실
등을 다니며 순찰당직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자이로실은 지하2층에 있지만 함수가 뒤집어지거나 옆으로 엎어졌을 때는 가장 수면에 가까운 곳일 수
있다.
또한 함미 선체 발견 역시 이틀이나 늦었으며, 민간 어선이 발견했다는 것에 대한 경위를 밝혀야 한다고 신 대표는
밝혔다.
그는 해군이 최근 크기 1~2m 크기의 북한 로켓 잔해를 사이드스캔소나를 동원해 단 하룻 만에 인양하는데 성공한
데 반해, 6년 전 천안함 함수와 함미는 왜 이틀 동안 찾지도 못했느냐고 반문했다. 함미의 침몰지점은 사고지점(폭발원점)에서 불과 180m 떨어진
곳이었다.
이를 두고 신 대표는 “찾지 못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이유에서든 이틀 동안 찾지 않았던 것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함미를 발견한 민간 어선 선장 장세광씨는 지난 2011년 신 대표와 변호인단을 함께 만난 자리에서 “바다로 나가기
전 군에서 좌표를 주었고, 그 좌표를 보고 나갔더니 거기에 천안함이 있더라”고 말했다고 신 대표는 항소이유서에 썼다. 신 대표는 장세광씨를
증인으로 신청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신 대표의 김태영 국방장관 고발장 제출이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판단한 것에 대해 신 대표는 김 장관의
총괄적 책임을 묻고자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 대표는 스크래치 인멸과 관련해 2010년 4월15일 TV로 생중계된 함미 인양 과정에서
‘선체하부에 길이방향으로 발생한 스크래치의 흔적을 확연하고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고 밝혔다. 검정색 페인트 속에 있던 분홍빛 페인트가 드러난
것이 대표적인 스크래치 흔적이었다는 것이다.
증거인멸이라고 한 것에 대해 신 대표는 이후 4월 30일 합조단 조사위원 자격으로 평택 2함대에 가서 선체를 보니
보름 전 TV로 봤을 때 있던 함미 선저하부의 길이방향 스크래치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하게 변해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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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4월 15일 인양 직후 천안함 함미의 모습. 사진=합조단
보고서, 항소이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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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해전 때 침몰해 35일간 물 속에 있다 인양된 참수리 357호의 선저와 침몰한 뒤 20일 만에
인양된 천안함 함미의 선저 비교. 사진=신상철의 항소이유서. |
그는 “단순히 이물질을 털어내기 위한 정도의 가벼운 워싱(Washing) 정도에 그치지 않고 고압분사(High
Pressure Water Jet) 방식으로 외판을 클리닝했을 경우, 이물질 뿐만아니라 외판의 선명한 스크래치를 희미하게 만들 수 있다”며
“고발장에서 그 점을 언급한 것은 그러한 워싱 혹은 클리닝 작업이 있었는지 여부를 묻고자 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신 대표는 “제가 제출한 고발장은 검찰단계에서 기각되고, 고발장을 제출한 것 자체가 국방부장관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판결을 받았다”며 “쉽게 납득할 수가 없다”고 반박했다.
한편, 검찰의 항소이유서를 보면 신 대표가 허위임을 인식하고도 허위
주장을 반복했다는 1심 구형 당시 최종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창민 검사는 항소이유서에서 명예훼손 피해자에 대해 “국방부 장관은 사고원인 조사 책임자로 특정되고, 합조단
위원은 49명, 해군본부 소속 군인 중 실제 업무에 참가한 군인은 해난구조대 112명, 수중폭파팀 등 83명으로 그 수가 명백히 특정된다”고
주장했다.
최 검사는 “특히 박규창 군수참모부 수송과장은 사고 이후 즉시 침몰 원인 확인 및 구조 작업을 위해 대형
해상크레인을 물색했으며 최영순 해군 특수전여단 현장지휘관은 사고후 바로 현장 출동해 구조작업을 지휘했다”며 “그런데도 피고인은 해군이 구조작업을
지연하고 있다는 취지의 글을 게시해 명예를 훼손했다”고 썼다.
최 검사는 “공적 조사에 대한 의혹제기와 관련해 의혹을 밝힐 증거가 없음이 밝혀졌는데도 새로운 정황이나 증거없이
계속해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상당성이 없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 검사는 “조작 은폐 범죄자 등 악의적 표현을 사용하므로 비방의 목적 또한 인정된다”며 “많은 전문가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수행한 역사적 사건의 공적 조사 결과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상당기간 초래하게 하고 심각한 국론분열을 야기했다. 원심 구형에
상응하는 형을 선고해달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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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0년 4월24일 해상크레인이 천안함 함수를 인양한 직후 바지선
위에 싣고 있다. ⓒ 연합뉴스 |
출처: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288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