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관련

“천안함 함미 체인 끊어질까 인양 연기했다? 핑계” 함미인양업체 증언

道雨 2017. 11. 22. 10:21




“천안함 함미 체인 끊어질까 인양 연기했다? 핑계”

[공판 분석] 함미인양업체 증언 “두줄로도 충분한데 왜 한줄 더 걸라했나…반대의견 묵살”
미디어오늘  | 등록:2017-11-21 18:56:56 | 최종:2017-11-22 08:37:1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천안함 함미 체인 끊어질까 인양 연기했다? 핑계”
[공판 분석] 함미인양업체 정호원 88수중개발 부사장 증언 “두줄로도 충분한데 왜 한줄 더 걸라했나…반대의견 묵살”
(미디어오늘 / 조현호 기자 / 2017-11-20)


천안함 함미인양 업체 부사장이 인양당시 함미에 체인을 한 줄 더 걸고 인양일자를 늦추기로 한 해군의 결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두 줄로도 충분했는데도 왜 굳이 한 줄을 더 걸면서 인양을 사흘이나 지체하게 했느냐는 불만의 목소리가 있었다고, 7년 만에 처음 법정에 나와 증언했다. 날씨나 안전을 말하며 당장 인양을 못한다는 국방부 주장에 대해,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다고 7년 전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것을 재확인했다. 그는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생각이라고 밝혔다.


애초 천안함 함미의 인양은 2010년 4월12일 이뤄질 예정이었으며, 수면 위까지 끌어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해군은 날씨와 안전성을 문제삼으며 저수심지대로 이동시키라 했고, 체인을 한 줄 더 걸도록 요구했다. 

이명박 정부가 2011년 3월 펴낸 ‘천안함 피격사건 백서’에 따르면 그달 9일 오후 인양크레인 ‘삼아2200호’가 함미 추진축 부근에 1번 인양체인을 설치했고, 12일 15시엔 2번 체인까지 설치했다. 두 체인을 모두 설치했기 때문에 수면 위로 완전히 들어올렸다가 바지선에 탑재하면 됐다. 그러나 해군은 돌연 인양일자를 사흘 연기했다.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 백서에서 “4월12일 15시까지 체인 두줄이 설치됐지만 야간의 강풍과 파도로 인해 체인이 절단될 우려가 있었다”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미를 수심이 얕고 조류의 영향도 적은 안전해역으로 옮긴 후 재 인양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자 유가족의 동의를 얻어 함미를 안전해역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천안함 백서의 주석에서 “함미를 최초 인양했던 13일(12일의 오기로 보임-기자주) 오후에 바지선에 적재하지 못한 이유는 수중이동은 부력에 의해 적은 힘으로도 이동이 가능하지만 수면 위로 인양은 표면장력과 함께 가득 차있는 해수로 인해 무게를 견디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명박 정부는 백서에서 “함미를 안전지대로 옮기면서 봤더니 함미의 무게가 950톤을 훨씬 넘을 것 같았다”며 “이에 따라 함미에 3번째 인양체인을 추가 설치하는 등 인양대책을 보완한 후 날씨를 고려해 15일 경에 인양하기로 우선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2010년 4월12일 88수중개발이 천안함 함미를 저수심지대로 옮기고 있는 모습. 사진=천안함 피격사건 백서 72쪽



그러나 이 같은 설명에 대해 당시 함미 인양을 담당했던 88수중개발의 정호원 부사장은, 처음 인양하기로 한 4월12일 충분히 올릴 수 있었다고 반박했다. 정 부사장은 지난 14일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윤준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신상철 전 천안함 민군합동조사위원의 명예훼손 사건 항소심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이같이 밝혔다.


정 부사장은 “당시 체인과 샤클 등으로 충분히 들어올릴 수 있었다”며 “그러나 해군의 지시로 바로 인양하지 않고, 천안함을 해상크레인에 매단 채 저수심 지대로 이동해서 체인 한 가닥을 더 걸었다”고 말했다.


정 부사장은 이와 관련해 체인 한 줄을 더 걸라는 해군의 요구가 있었던 날 직후 여러 매체와 인터뷰에서 충분히 안전하므로 올릴 수 있다고 밝힌 일이 있다고 재확인했다.

정 부사장은 4월12일 매일경제와 인터뷰에서 “일반 상선이었다면 와이어 두 줄로 바로 들어 올리면 된다. 부산말로 같잖은 일”이라며 “이는 인양업계의 상식”이라고 밝힌 사실이 있느냐는 변호인 신문에 그렇다고 시인했다. 그는 ‘군함도 일반상선과 다르지 않느냐’는 김종귀 변호사의 신문에 “동일하다”며 “다만 화기장비가 더 추가돼 있을 뿐 일반적으로 동일하다”고 말했다.


이후 세계일보 4월14일자 기사와 인터뷰에서도 정 부사장은 “(12일 오후) 함체 인양이 충분히 가능했는데도, 해군이 여러 핑계를 대며 시간을 끌어 답답한 심정”이라며 “우리도 군처럼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있다. 크레인의 안전작업 중량을 고려할 때 인양에 문제가 전혀 없었다”고 말한 사실도 있다고 확인했다.


‘함미에 물이 가득 차 있어 바로 인양하면 크레인이 끊어질 수 있다’는 군의 주장에 대해, 정 부사장은 “해상크레인 삼아2200호가 올릴 때 운전실 후크 총 4개가 있고, 총하중이 2000톤이므로 (무게가) 오바되면 벨이 울리지만, 오바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줄로 충분하다”고 밝혔다.

그는 ‘지금 국방부 등이 날씨나 안전 등을 말하며 당장 함미를 인양할 수 없다고 하는 건 분명히 핑계이고 거짓말’이라고 말했다는 세계일보 보도내용이 사실이냐는 변호인 신문에, “핑계라는 말을 한 것은 맞지만, 거짓말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한 체인을 할 줄 더 걸라는 요구와 저수심지대 이동 지시가 나온 것은 4월12일 함미를 들어올리기 전까지는 없었다고 정 부사장은 증언했다.

그는 ‘4월12일 천안함 함미를 수면 위로 들어올리기 이전까지 저수심으로 이동하라는 요구는 없었느냐’는 김 변호사의 신문에 “예 그렇다”고 답했다. 저수심 지대로 견인이 시작된 것은 그날 “점심 식사후인 오후였다”고 정 부사장은 전했다. 



▲천안함 함미의 이동경과를 해도상에 표시한 내역. 사진=천안함 피격사건 백서



해상크레인이 들 수 있는 최대 중량 2200톤을 드는데 체인 몇 개가 필요하느냐는 재판장 신문에, 정 부사장은 “체인 한 줄은 네 개의 후크가 잡고 있고, 한가닥은 1000톤 이상을 들 때 견딘다”며, 두 줄로 2200톤을 들 수 있고, 세줄을 걸어도 2200톤이라고 말했다. 특히 정 부사장은 “인양할 때 (체인 수를) 짝수로 한다. 홀수로 안한다”고 강조했다.

해군은 88수중개발이 이 같은 의견을 제시했지만 받아들이지 않고, 체인 추가 설치를 밀어붙였다고 정 부사장은 밝혔다.


정 부사장은 이 과정에서 작업자들과 해군과 의견충돌이 발생했다고도 전했다. 그는 “작업자들이 불평불만을 표출을 했고, 그 때 당시 작업자들 핸드폰을 압수당하고 그런 일이 있었다”며 “서약서도 썼다”고 말했다. 


굳이 저수심 지대로 이동시킬 필요가 없었는데 군 당국이 저수심 해역으로 이동하라고 한 실제 이유에 대해, 정 부사장은 “우리는 그냥 한가닥 더 감으라고 해서 감은 것 뿐”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검사 측은 어차피 작업하는 입장에서는 일을 빨리 끝내는 게 좋은 것 아니냐고 신문했다. 정 부사장은 “인양을 완성할 때까지 하기로 한 것”이라며 “공기(공사기간) 단축은 기본 원리”라고 답했다.


검사는 “해군이 더 해달라고 해서 작업이 지체하는 것에 대해 인부도 불만이고, 회사도 빨리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겠네요”라고 신문했다. 정 부사장은 “일단 안전하게 작업했고, 두가닥으로 이미 올라왔는데, 바로 (인양을) 안하겠다고 했으니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천안함 함미를 바로 인양하지 않은채 옮긴 저수심 지대의 위치와 관련해, 정 부사장은 “용트림 바위 인근에서 해안쪽으로 갔다. 용트림 바위 쪽에 가까이 갔다”고 말했다. 용트림 바위 앞쪽은 이른바 ‘제3의 부표’가 설치됐다는 의문이 제기됐던 부근이다.


정 부사장은 작업자들이 함미를 저수심지대로 옮기고 나서, 다음날인 2010년 4월13일엔 아무런 작업을 하지 않았으며, 모두 대청도로 들어가도록 해 작업자들의 불만을 샀다고도 전했다.

그는 “대청도에 갔는데, 숙박시설도 없고, ‘집에 가겠다’는 잠수사들과 ‘휴대폰 가져오라’는 작업자들로 소란스러웠다”며 “‘이보다 더한날도 작업하라 하고 왜 하지말라 하노’라는 것이 불만의 요지였다”고 증언했다.

그는 “날씨 좋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작업하면 되지, 왜 대청도에 와있으라는 것이냐는 것”이라며 “(현장에서 대청도가) 한시간 이내 거리긴 하지만, 배를 타는 과정에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민일보 2010년 4월14일 자 온라인 기사. 사진=법원제출 증거자료


출처: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9878&sc_code=&page=&total=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4349&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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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항소심 8차공판] 정호원 88수중개발 부사장의 증언 ②

2010. 4. 14 함미인양 작업자를 모두 내보낸 후 무척 바빴던 미군, 왜?
신상철 | 2017-11-20 11:40:25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88수중개발의 함미 인양작업

오늘 글은 다소 긴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렇듯‘역사의 기록’은 참으로 고난한 일인 것 같습니다. 천안함 항소심 제8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정호원 88수중개발 부사장에게 피고인측이 어떤 질문들을 던졌을지 궁금하시지요? 우선 88수중개발이 함미 인양과 관련하여 어떤 작업을 하였는지 요약 설명드리는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함미 인양작업 브리핑 (전체작업 가운데 2010.4.12~16 부분발췌)

함미가 수면 위로 올라온 4/12 이전, 88수중개발은 잠수부를 투입하여 해저에서 함미 하부를 횡으로 관통하는 케이블링 작업을 합니다.

2010년 4월 12일 (월)

처음으로 함미가 케이블 두 가닥에 매달려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국방부는 바지에 올리려는 것을 저지한 후 저수짐 지대로 이동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에 대해 88수중개발 정호원 부사장은 강력히 항의합니다. 바지선에 실은 후 바로 평택으로 이동하면 된다.. 이것은 속된 말로 '같잖은 일'이며 인양업계의 상식이라고.. 그러나 결국 국방부의 강력한 요구대로 저수심으로 이동하여 해저에 다시 가라앉힙니다. 시신 46구를 실은 채.

2010년 4월 13일 (화)

전날 가라앉혔던 천안함을 수면 위 5M 살짝 들어올린 후 속이 보이지 않도록 그물망 작업을 하고 다시 가라앉힙니다. 그리고 국방부는 <기상이 좋지않아 작업을 전면 중단> 한다고 발표한 후 현장에 있던 업체 관계자 및 작업자 전원을 인근 섬으로 나가도록 명령하자 작업자들이 강력히 항의합니다.(항소심 8차공판 증언으로 새로이 알게된 사실)

2010년 4월 14일 (수)

현장에서 전면 철수하여 인근 섬으로 나간 업체 가운데 인양전문 업체인 88수중개발팀은 대청도로 나갔으며, 예인전문 업체인 현대해운은 백령도로 나갑니다. 현장에는 군인들과 크레인 기사만 남습니다. (천안함 1심 88수중개발 현장소장 권만식 증언) 그러나 4/14일은 미군이 백령도에 머문 기간 전체를 통털어 가장 바빴던 하루였습니다. (미 7함대 홈페이지 기록)

2010년 4월 15일 (목)

함미를 바지선 위에 올렸으나 거치대가 무너져버려 거치대 수리작업을 합니다. 거치대가 무너진 원인은 함미 프로펠러가 선체하부보다 1M 튀어나왔기 때문인데 국방부는 그 사실을 감추고 좌우 프로펠러 하단을 플라즈마용접으로 잘라내 버립니다. 그러나 국방부는 프로펠러가 바지선 갑판에 부딛쳐 부러졌다고 주장합니다. (1심, 박정수, 문병옥 소장의 거짓증언)

2010년 4월 16일 (금)

함미 바지선 위에 탑재하고 평택으로 이동, 2함대 야적장에 거치합니다.

2010년 화사한 벗꽃이 만개한 따뜻한 4월 중순... 한 가족의 가장이며 아들이고 아빠였을 억울한 영혼을 실은 천안함은 그렇게 처참한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 앞에 참으로 무거운 숙제를 던져주었습니다...   


증인 정호원 88수중개발 부사장에 대한 신문사항

지금까지 재판을 하면서 증인에 대한 신문사항을 부분적으로 인용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전문을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전문을 공개해야겠다고 판단한 이유는 1편 글에서 적시한 것과 같이 이번 공판에 나온 정호원 증인은 천안함 1, 2심 전체를 통털어 ‘진실 그 이상을 토해 낸 최고의 증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증인 정호원에 대한 피고인 신문사항
사건번호 : 2016노444 | 2017.11.14 16:00 | 서울고등법원 서관 303호


[증인의 지위, 경력]

1. 증인은 2010. 3. 26. 천안함 침몰사고 당시 88수중개발 부사장이었지요? 증인은 언제부터 88수중개발에서 일하였나요?

2. 증인은 지금도 88수중개발에서 일하고 있는가요? 증인의 현재 직위는 무엇인가요?

3. 증인은 88수중개발이 침몰된 천안함의 인양업체로 선정된 후 천안함 인양과 관련하여 어떤 업무를 수행하였는가요?

4. 당시 천안함 인양작업을 위해 88수중개발에서 백령도로 투입된 사람은 몇 명인가요? 들어간 사람들의 직위, 직책, 맡은 업무는 무엇인가요?

[2010. 4. 12. - 함미 저수심 이동 관련]

5. 2010. 4. 12.에 천안함 함미가 처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지요? 당시 천안함 함미는 앞뒤로 케이블 두 가닥이 걸려있었지요? 천안함 함미를 천천히 끌어올리면 자연배수가 되는 상태였지요? 자연배수 한 후 바지선에 올려서 평택으로 이동하면 되는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천안함을 크레인에 매단 채 저수심 지대로 이동하였지요?

6. 당시 해군이 88수중개발에게 천안함 함미를 저수심으로 이동시키라고 하였지요?

7. (별첨 1. 정호원 부사장 인터뷰 기사를 제시하며) 증인은 2010. 4. 12.경에 매일경제 기자와 인터뷰한 사실이 있지요? 증인은 매일경제 기자에게 “일반 상선이었다면 와이어 두 줄로 바로 들어 올리면 된다. 부산말로 같잖은 일”이라며 이는 “인양업계의 상식”이라고 말한 사실이 있지요? 군함도 일반상선과 다르지 않지요?

8. (별첨 2. 세계일보 2010. 4. 14.자 기사를 제시하며)
가. 증인은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2일 오후) 함체 인양이 충분히 가능했는데도 해군이 여러 핑계를 대며 시간을 끌어 답답한 심정”이라며 “우리도 군처럼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있다. 하지만 크레인의 안전작업 중량을 고려할 때 인양에 문제가 전혀 없었다.”고 말한 사실이 있지요?

나. ‘함미에 물이 가득 차 있어 바로 인양하면 크레인이 끊어질 수 있다’는 군 당국의 주장에 대해 증인은 “함미 윗 부분을 들어 올렸을 때 배수 펌프로 수면 아래쪽 물만 빼내면 선체가 어느 정도 물 위에 뜬다. 그 상태에서 크레인을 들어올리면 바로 인양이 가능했다.”고 인터뷰 했는데 지금도 같은 생각이지요?

다. 증인은 “우리는 전문적으로 인양을 하는 사람들이고 현장 잠수사들도 다 그렇다.”며 “그런데 지금 국방부 등이 날씨나 안전등을 말하며 당장 함미를 인양할 수 없다고 하는 건 분명히 핑계이고 거짓말”이라고 강조했는데 지금도 같은 생각이지요?

9. 88수중개발이 천안함 함미에 케이블을 걸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천안함 함미를 저수심으로 이동하라는 요구를 받지 않았지요?

10. 당시에 천안함 함미를 저수심 해역으로 이동시킬 필요가 없었는데 군 당국이 저수심 해역으로 이동하라고 한 실제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11. 당시 천안함 함미의 중량을 어느 정도로 계산했습니까? 당시 걸었던 체인 한 가닥이 지탱할 수 있는 무게를 얼마로 산정했었나요?

12. (별첨 3. 사진을 제시하며) 2010. 4. 12. 천안함 함미를 크레인에 매달고 함미에서 함수가 있는 방향으로 4.6km 이동하였는데 언론사마다 그 위치를 조금씩 다르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맞는가요?

13. (별첨 4. 국민일보 2010. 4. 14.자 기사를 제시하며)
가. 당시 해군측에서 요구한 저수심 이동요구에 대하여 인양업체 전문가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을 쏟아낸 사실을 증인도 알고 있지요?

나. 유일수중공사 정승계 사장은 “왜 바로 바지선에 올리지 않았는지 전문가로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함미에 체인 두 개를 걸어 밑바닥에서 들어올린 상태라면 1시간에 체인을 2개 정도 충분히 걸 수 있다”고 하였고, 통영수중개발 강기령 사장도 “천안함은 절단돼 있기 때문에 물이 잘 빠진다”며 “함미를 바지선에 직접 올리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증인도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지요?

다. ‘함미 이동작업을 할 때 선체를 조금만 들어서 외부에 보이지 않게 하라’는 군의 지시가 있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88수중개발도 그런 지시를 받았지요?

14. (별첨 5. 서울신문 2010. 4. 16.자 기사를 제시하며)
가. 증인은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절단모양이 일직선이 아니라 울퉁불퉁하고 너덜너덜하고 불규칙하게 뜯겨져 있었다.”고 하였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나. 증인은 “함미의 절단면 부근에 무언가에 긁힌 듯 사선 모양이 많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2010. 4. 13. 작업 관련]

15. 함미를 저수심으로 이동하고 나서 2010. 4. 13.에는 어떤 작업을 하였나요?

16. 증인은 권만식 당시 현장소장을 알지요? 권만식은 이 사건 1심에 증인으로 출석해서 ‘4월 14일에는 날씨가 나빠 작업이 안되어서 대청도에 들어가 있었다’고 했는데 사실인가요? 권만식은 ‘그날 군인들과 크레인 기사만 현장에 남아 있었다’고 진술했는데 사실인가요?

17. (별첨 6. 자료를 제시하며) 이 자료는 미 7함대 홈페이지에서 캡처한 자료입니다. 2010. 4. 14. 미 해군은 단정도 내리고 헬기도 띄우는 등 많은 작업을 했습니다. 미 해군의 당일 작업에 대해 증인이 알고 있는 것을 말씀해주세요.

18. 2010. 4. 14.에 미 해군 인력이 함미 크레인 쪽으로 와서 어떠한 작업을 하거나 한국군과 공조한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가요?

19. 크레인의 동력 사용에 대한 기록을 88수중개발에서도 갖고 있거나 증인이 파악하고 있는가요?

20. 2010. 4. 14. 주간 혹은 야간에 크레인의 동력을 사용한 사실이 있는가요?

[함미 바지선 거치 및 프로펠러 손상문제]

21. 2010. 4. 15. 함미를 바지선에 올렸지요? 그런데 거치대 높이가 낮아서 함미 프로펠러가 바지선 갑판에 닿는 일이 발생하였지요?

22. 거치대를 낮게 준비한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요? 해군인가요, 88수중개발인가요 아니면 바지선 업체인 유성개발인가요?

23. (별첨 7. 사진을 제시하며) 결국 거치대 일부가 무너져 손을 봐야했고 또 좌우현 프로펠러 일부를 용접기로 절단하였지요?

24. (별첨 8. 사진을 제시하며) 우측 스크류가 갑판에 딱 붙어 있는 사진인데 그 앞에 떨어져 나간 조각이 놓여져 있는 장면이지요?

25. (별첨 9. 사진을 제시하며) 이 사진은 함미가 평택 2함대에 거치된 모습입니다. 좌, 우현 프로펠러 하부에 매끈하게 컷팅된 모습과 함께 상당한 고열로 인해 청동인 프로펠러 재질이 시커멓게 탄 흔적이 보이는데 용접기로 절단한 것이 맞죠?

26. 합조단의 박정수 소장은 본 법정에 나와서 “프로펠러가 바지선 갑판에 부딪쳐 부러진 것이다”라고 증언하였는데 사실과 다른 것이지요?

[88수중개발의 실적 - 심해 침몰 해경정 인양]

27. (별첨 10. 사진을 제시하며) 88수중개발은 2008년 제주도 인근 해역 수심 80m에 침몰한 해경정 인양업무도 수행한 사실이 있지요? 해경정은 암초와 충돌하여 침몰하였지요?

28. 당시 해경정은 2008. 5. 3. 침몰하여 8. 20.에 인양되었으니 108일만에 인양된 것이지요?

29. 천안함 함미는 2010. 3. 26. 침몰하여 4. 15. 인양되었으니 약 20일만에 인양된 것이 맞지요?

30. (별첨 11. 천안함 함미 사진을 제시하며)
가. 해저에서 108일 동안 가라앉았던 해경정과 해저에 20일간 가라앉았던 천안함 함미를 비교할 때 선저하부의 상태는 어느 것이 더 깨끗했는가요?

나. 증인의 인양 경험으로 볼 때 천안함 함미 하부의 스크래치는 좌초인 경우에 발생하는 손상의 전형적인 형태인 것이 맞지요?

[88수중개발의 폭발 침몰선박 인양 경험]

31. 증인은 폭발로 인해 침몰한 선박을 인양한 실적이나 경험이 있나요?

32. 폭발로 침몰한 선박의 특징과 폭발사고로 인해 사망한 시신의 상태에 대해 증인이 경험한 사실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상태가 어떠한가요?

33. 기타사항

긴 글 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의 글 부터는 피고인 신문사항에 대한 정호영 부사장의 답변과 그 의미 그리고 제가 주장했던 내용을 대비한 분석의 글을 차례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신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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