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사라진 핵우산
이제훈의 1991~2021 _01
* 1990년 9월30일 한국과 소련의 수교는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에 걸친 한반도·동북아의 적대적 대치를 뿌리부터 뒤흔든 ‘비대칭 탈냉전’의 거대한 시작이었다. 북한은 한-소 수교에 대응해 ‘핵개발’을 선언했다. 지금껏 한반도 평화의 숨통을 죄는 이른바 ‘북핵문제’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다. 한-소는 1990년 6월4일 사상 첫 정상회담, 1990년 9월30일 수교 합의·조인, 1990년 12월14일 노태우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한-소 관계의 일반원칙에 관한 선언’(모스크바 선언) 서명을 거치며 적대에서 협력으로 관계를 재설정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소 수교라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에 넋을 잃은 북한은 그 와중에도 소련 정부가 “극동에서 가장 유망한 경제 파트너”라 평가한 한국을 “미제의 식민지”로 폄훼하는 ‘정신승리’를 잊지 않았다. “오늘의 남조선 형편에서는 (23억달러라는) 그 막대한 돈을 낼 원천도 없거니와 아마도 그것은 사회주의를 와해시키기 위한 미제의 특별기금에서 나올 것이 뻔하다”라고.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은 북한을 설득할 논리를 다듬느라 주위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그를 실은 아에로플로트 특별기가 거센 강풍에 흔들리며 아슬아슬하게 순안공항에 내렸다. 1990년 9월2일 평양은, 대한민국과 수교하기로 했다는 소련 정부의 통보에 비감한 듯 가을비에 젖어들었다. 노태우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1990년 6월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첫 양자 정상회담을 한 지 석달도 지나지 않은 때다.
그날 오후 만수대의사당에서 셰바르드나제의 통보를 받은 김영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외교부장은, 준비가 돼 있지 않으니 다음 기회에 공식 답변을 하겠다고 했다.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 쪽지를 건네자, 김영남 부장은 날카롭고 높은 목소리로 소련의 ‘배신’을 맹비난했다.
“소련이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으면 조-소동맹조약을 스스로 유명무실한 것으로 되게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때까지 동맹 관계에 의거했던 일부 무기들도 자체로 마련하는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조선반도에서 군비경쟁을 격화시키게 되고, 조선반도정세를 극도로 첨예화시키게 된다.”
북한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 1990년 9월19일치 4면 머리로 실린 “조선의 통일에 방해되는 일”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공개된, 김영남이 셰바르드나제한테 전한 6개항 비망록의 다섯째 항목 일부다. 요컨대 김영남은 북한에 ‘핵우산’을 제공하던 조-소 동맹이 유명무실해졌으니 ‘핵무기를 자체 개발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당시 회담장에 있던 한 소련 대표는 김영남이 “핵무기”를 거론하며 위협한 것으로 기억했다고, 돈 오버도퍼(<두개의 한국> 332쪽)는 전했다. 김영남이 실제 “핵무기”를 입에 담았든 아니든 “이때까지 동맹 관계에 의거했던 일부 무기들도 자체로 마련하는 대책”이라는 <민주조선> 문구로, 사실상 ‘핵개발’을 공개 선언한 역사적 사실이 중요하다. 세기가 바뀌고 21세기의 세번째 십년대가 시작된 2021년에도 한반도 평화의 숨통을 죄는 이른바 ‘북핵문제’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역사적 순간이다.
김영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됐을 때 맨 선참으로 우리 공화국을 조선 민족의 유일한 합법적 국가로 인정한 나라”인 소련이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설정하면, 우리 나라에서의 사회주의 제도를 뒤집어엎으려는 미국과 남조선의 공동 음모에 가담해 3각 결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과 수교하려는 소련을 ‘미제의 앞잡이’라 비난한 것이다.
셰바르드나제는 꼬박 이틀 동안 김영남의 비난에 시달리다, 정작 김일성 주석은 만나지도 못하고 평양을 떠났다. 그러고는 1990년 9월30일 한-소 외교장관 회담에서 수교에 전격적으로 합의·조인해버렸다. 애초 소련 정부가 설정한 수교일은 ‘1991년 1월1일’이었다. 놀람과 기쁨이 뒤섞인 낯빛의 최호중 한국 외교장관을 옆에 두고 셰바르드나제는 “이걸로 조선 친구들도 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소련말로 중얼거렸다.
닷새 뒤인 1990년 10월5일 조선노동당 중앙위 기관지 <노동신문>에 ‘딸라로 팔고사는 ‘외교관계’’라는 논평이 2면 머리기사로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소련은 사회주의 대국으로서의 존엄과 체면, 동맹국의 이익과 신의를 23억딸라에 팔아먹은 것이다”, “이것을 ‘배신’이란 말 이외의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한-소 수교라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에 넋을 잃은 북한은, 그 와중에도 소련 정부가 “극동에서 가장 유망한 경제 파트너”라 평가한 한국을 “미제의 식민지”로 폄훼하는 ‘정신승리’를 잊지 않았다.
“오늘의 남조선 형편에서는 (23억달러라는) 그 막대한 돈을 낼 원천도 없거니와, 아마도 그것은 사회주의를 와해시키기 위한 미제의 특별기금에서 나올 것이 뻔하다”라고.
길을 잃었을 땐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라는 오랜 조언이 있다. 30년도 더 지난 ‘옛날이야기’를 지금 다시 꺼낸 까닭이다.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배신’에 치를 떨며, 버림받은 영혼의 공포를 떨치려는 듯한 김영남의 단말마적 ‘핵개발’ 외침은, 사실상의 ‘9번째 핵국가’라는 현실로 바뀌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7년 11월29일 “국가 핵무력 완성의 역사적 위업, 로케트 강국 위업 실현”을 선언했다. 북한은 소련이나 동독처럼 지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 30년은 “주체조선의 성공의 역사, 영광의 역사”인가? 19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 땐 적어도 30만명을 웃도는 북녘 인민들이 굶주림에 목숨을 잃었다. 현대 국제정치사에 유례없는 ‘3대 세습’은 기괴하다.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이자 “영원한 수령”인 김일성 주석의 평생 꿈이던 “이팝(쌀밥)에 고깃국, 기와집에 비단옷”은커녕 ‘하루 세끼’도 보장 못 하는 만성적 식량 부족에 시달린다. 북녘의 ‘핵’은 숱한 인민들의 목숨과 평안을 갈아 넣은 저주받은 무력이다.
1990년 이후 북녘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력갱생’의 길을 걸었다면, 남녘은 개방의 길을 질주했다. ‘원조받는 나라’에서 ‘원조 주는 나라’로 거듭난 세계 유일의 국가이자,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함께 이룬 유일한 전후 독립국을 훌쩍 뛰어넘어, 이젠 <기생충>과 ‘비티에스’(BTS)로 세계 시민의 영혼을 흔든 ‘한류’(K-Culture)를 자랑하는 ‘케이 브랜드’(K-Brand)의 중견국이다.
그래서 한국의 지난 30년은 ‘성공과 영광의 역사’인가? 코로나19 대유행 직전인 2019년 기준 한해 1750만2756명의 외국인이 한국을 찾고, 2871만4247명의 한국인이 세계 각지를 누빈 ‘열린 나라’인데도, 북한·미국·중국·일본 정도를 뺀 다른 나라와의 정상회담은 뉴스로 취급하지도 않는 ‘우물 안 개구리’다.
세계 3대 세력권인 유럽연합(EU)의 집행위원장 이름을 아는 한국인이 몇명이나 될까? 세계 6위의 군사력을 갖추고도 군대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의 모자를 쓴 주한미군사령관한테 맡긴 현실을 바꾸자는 군사주권 정책에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이 숱한 한국 사회의 심층 심리는 또 어떤가.
남북의 기괴한 자화상은 분단(임시군사정전체제)의 장기 지속, 미국의 북한 ‘봉쇄’와 핵·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앞세운 북한의 생존·돌파 시도, 남북의 화해·협력과 갈등·적대 따위가 어지럽게 뒤엉킨 남·북·미 3각(또는 남·북·미·중 4각)관계를 빼고는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남녘의 상식적 시민은 ‘핵을 가진 북녘’과 함께 미래를 도모할 생각이 없다. 1990년 이후 극단적 고립에 시달려온 북녘은, 더는 체제 경쟁을 꿈꾸지 못할 지경으로 거대해진 남녘을 앞에 두고, 흡수통일의 공포를 떨치지 못한 채 ‘생존의 길’을 찾느라 몸부림치고 있다. 다섯 차례의 정상회담에도 북녘이 화해·협력의 큰길을 내달리지 못하게 뒷덜미를 낚아채는 공포의 심연이다.
핵을 손에 쥐고 전쟁 반대와 평화를 외쳐봐야 울림이 없다. 어떤 이의 ‘반전평화’ 주장은 핵을 외면하기에 편향이다. ‘핵을 버리면 잘해줄게’라는 사탕발림은 흡수통일·체제붕괴의 공포를 이기지 못한다. 어떤 이의 ‘반핵평화’ 주장은 ‘전쟁 반대’를 외면하기에 편향이다. 핵을 포기할 북녘과 어떤 경우에도 흡수통일을 꾀하지 않을 남녘이 만나야 한다. 그래야 길이 열린다.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한반도에서 냉전체제가 와해되기 시작했음을 뜻”(1990년 10월8일 국회 외무통일위 최호중 외무장관)하는 한-소 수교 이듬해인 1991년, 남북은 누구도 예상·기대하지 못한 극적인 2인무를 춘다. 국제적으론 두개의 독립된 주권국가임을 인정(1991년 9월17일 유엔 동시·분리 가입)받고, 양자 차원에선 “통일 지향 특수관계”를 확인(1991년 12월13일 남북기본합의서)하고, ‘비핵·평화 한반도’를 함께 선언(1991년 12월31일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한 것이다.
1991년 9월부터 석달 사이에 이뤄진 ‘유엔 가입+남북기본합의서+비핵화공동선언’의 정신을 온전히 살렸다면, 그 30돌을 맞는 2021년 4월 한반도의 풍경은 지금과 전혀 달랐을 터다. 1991년은 ‘먼저 온 미래’다.
어디에서 길을 잃었을까? 용기를 내어 들어섰으나 끝까지 가지 못한 길, 지혜가 모자라 놓친 길을 되짚어야 한다. 이 연재가 ‘반전·반핵·평화 한반도’의 길을 탐색하는 지도 그리기의 밑돌이 되기를 바란다.
이제훈ㅣ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여섯 차례의 북한 핵시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 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nomad@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91621.html?_fr=mt2#csidxd05d87eb68e06f5ba2b359f62c15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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