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행복한 삶이란?

道雨 2024. 1. 17. 10:19

행복한 삶이란?

 

 

자신에게 맞는 적당한 자세와 보폭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연처럼 서두르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적당한 자세와 보폭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 아테네에는 새로운 학파들이 생겨났다. 견유학파,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가 바로 그것들이다. 이들은 모두 올바르고 도덕적인 삶을 추구한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이어받았다.

 

이 중 디오게네스(BC412~BC323)는 그리스 견유학파의 대표적 철학자였다. 그의 삶의 목표는 ‘욕심 없이 살기’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하기’ ‘아무것도 부끄러워하지 않기’였다. 그는 이렇게 살면 어떤 고통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었 다.

디오게네스의 생각을 듣고 나면 생각나는 동물이 무엇일까?

디오게네스는 개가 이런 삶을 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처럼 살자”고 공공연히 외쳤다. 실제로 그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서 커다란 나무 항아리를 집으로 삼고 개처럼 살았다고 한다.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기원전 400년경 이야기이다.

디오게네스는 현명함으로 명성이 자자한 만큼이나 매우 독특한 생활 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어떤 사람도 필요 이상의 물건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 대신 커다란 나무항아리 속에서 살면서 그 항아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옮겨 다녔다. 그러면서 항아리 앞에 앉아 햇볕을 쬐면서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지혜를 들려주곤 했다.

그런 디오게네스가 하루는 밝은 대 낮인데 초롱불을 들고 돌아다니면서 무언가를 찾는 듯 여기저기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 밝은 대낮에 왜 초롱불을 들고 다니십니까?” 누군가의 물음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정직한 사람을 찾으려고 하네. 이 도시엔 정말 눈을 씻고 보아도 그런 사람을 찾을 수가 없네."
 
한 번은 디오네게네스가 살고 있는 도시를 알렉산더 대왕이 방문하며, 그를 찾았다. 디오게네스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던 사람이 바로 알렉산더였다. 그가 보이지 않자 왕이 친히 그를 찾아 나섰고, 얼마 후 왕은 길가 나무 항아리 앞에 누워 있는 디오게네스를 발견했다. 일광욕을 한창 즐기고 있던 그는 왕과 사람들이 몰려오자 일어나 앉아 알렉산더를 바라보았다.

왕이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물어보았다.

“디오게네스여, 나는 일찍이 그대의 지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소. 묻건대, 내가 그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뭐 없겠소?”

"있습니다. 당신이 내 햇볕을 가리지 않게끔 옆으로 조금 비켜서 주시면 됩니다.”

뜻밖의 대답에 왕은 매우 놀라며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러나 그는 화를 내지 않았고, 다만 그 일로 인해 괴짜 현자를 훨씬 더 존경하게 되었다. 말에 올라 그곳에서 돌아서던 알렉산더 대왕이 자기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일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난 저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무소유’와 ‘무욕’을 강조했던 디오게네스는, 아무리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해도 ‘기발한 역설’로 모든 것을 긍정적이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 “잃을 게 목숨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행복하다”고 말한 디오게네스.

그는 이처럼 가진 것 없어도 당당했던 철학자이자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이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또 다른 일화도 있다.
디오게네스와 동문수학하고 왕궁에 들어가 호의호식하며 지내는 동료 철학자 아리스토포스가 어느 날 디오게네스를 찾아갔다. 마침 디오게네스는 막 콩깍지를 삶아 먹고 있는 중이었다.

이를 본 아리스토포스가 “쯧, 왕한테 와서 고개 좀 숙이면 콩깍지 삶아 먹지 않아도 되련만…”하고 그의 처지를 비꼬았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답했다.

“쯧, 콩깍지 삶아 먹는 것만 배우면 그렇게 굽실거리지 않아도 되는데…."

 

 

자연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봄을 앞당기려고 겨울을 짧게 하지도 않고, 앞서 가는 물을 추월하려고 덜미를 잡지도 않는다. 자연처럼 서두르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적당한 자세와 보폭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스스로를 드러낸다 거나, 스스로 으스대고 자랑하는 행동도 자연스럽지 않다. 노자는 이러한 것을 “여식췌행(餘食贅行)”, 즉 먹다 남은 밥이나 군더더기 행동과 같다고 말한다. ‘도’에는 “여식췌행”이 없다.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소박한 삶, 미니멀리즘이 도를 닮은 행동이다.

원문은 이거다.

“其在道也(기재도야) 曰餘食贅行(왈여식췌행) 物或惡之(물혹오지) 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 도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일은 먹다 남은 밥이나 군더더기 행동으로 모두가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깨우친 사람은 그러한 데 처하지 않는다.”

 

노자가 말하는 ‘도’의 모습은 부드럽고 조화롭고 자연스러움이다. 그러한 것에 거스르는 것은 ‘도’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까치발로 서는 것은 서 있기에 불안정하고 풀쩍풀쩍 건너뛰는 일 또한 급하고 조급함을 일으키니 ‘도’에 거스르는 것이다. 자기의 의견만 고집하고 옳다고 여기는 자는 세상의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여 ‘도’의 모습을 거부하려는 자이다.

자기 자랑을 일삼고 자기 잘남 멋에 사는 사람 또한 ‘도’를 따르지 않는 자이다. 

그래 오늘 공유하는 시는 ‘돌아 보는 마음’이다.

 



돌아보는 마음 

                           / 박일환

 

김치를 제대로 담그려면
배추의 숨부터 죽여야 한다

굵은 소금으로 뻣뻣한 기운 눌러주고
풀어진 숨구멍마다 소금기 배어들면
준비는 다 된 것이니

누구에게나 영광의 시절은 있었노라
읊조리며, 숨죽인 배춧잎에
붉은 양념을 버무리는 손길들

잘 익은 김치를 먹을 때마다
온순한 인간이 되고 싶었을까?

먹고 살겠다는 이유로
다른 생명의 숨부터 끊어 놓고 보는
오랜 습속은 잠시 잊고
흐뭇한 미소부터 짓고 있었던 건 아닐까?

돌아보는 마음이 없으면
경배하는 자세는 모두 헛것일진대

 

 

 

 

또 다은 일화 하나를 공유한다.

송 (宋)나라 사람 조상(曹商)이라는 자는 송나라 왕을 위해 진(秦)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그가 떠날 때는 몇 대의 수레를 받아갔으나, 진나라 왕이 그를 좋아하여 수레 백 대를 더해 주었다.

그가 송나라로 돌아와 장자를 보고는 말했다.

“대저 궁색한 마을의 뒷골목에 지내면서 곤궁하여 짚신이나 삼고 비쩍 마른 목덜미에 누렇게 뜬 얼굴로 사는 짓은 내가 잘 하지 못하오. 하지만 만승(萬乘)의 임금을 한번 깨우쳐서 백 대의 수레를 얻어내는 것은 내가 잘 하는 일이오.”

 

장자가 말했다.

“진나라의 임금이 병이 나서 의원을 불렀다오. 종기를 터뜨려 고름을 짜낸 자는 수레 한 대를 받았고, 치질을 핥은 자는 수레 다섯 대를 받았다오. 치료가 더러울수록 더 많은 수레를 받은 것이오. 그대는 그의 치질이라도 고쳐준 것이오? 어떻게 해서 그 많은 수레를 받은 것이오? 썩 물러가시오.”( << 장자>>, < 열어구>)

 

‘지치득거(舐痔得車)’, 즉 ‘혀로 치질을 핥아 주고 얻은 수레’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서 나왔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체면조차 버렸던 당시의 세태, 또 그런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던 일상, 아니 재주라고 우쭐하며 자랑삼던 풍토, 그러나 그 일이 얼마나 부끄럽고 치욕스런 일인지, 윗사람에게 아첨해 이익을 얻는 자의 비열함을 통박한 유쾌한 이야기다.


일상의 언어에서는 ‘똥꼬 빤다’고도 한다. ‘지치득거’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그 과정이 제아무리 바람직하지 않다고 해도 개의치 않는다는 말이다. 성공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태에 경고가 되는 말이다. 똥구멍을 핥아 수레를 얻는다는 뜻으로, 미천한 일을 하여 큰 이익을 얻는 것을 말한다. 한 마디로 온갖 아부를 하며 치졸하고 졸렬하게 자신의 이득을 얻을 때 쓰는 말이다.

사실, 이 말이 많이 쓰이는 곳은 답 없는 찌라시에게 욕설을 퍼부을 때이다.


매우 심하게 ‘지치득구’의 모습이 드러나는 곳이 최근 우리의 언론이다. 언론이라는 본연의 직무를 망각하고 철저하게 찌라시 행태를 보이며, 더럽고 더러운 위정자의 비위를 맞추는 기사를 쓰는 쓰레기 집단들이 정의도 진실도 없다. 오직 본인들의 이득을 위해 온갖 쓰레기 짓을 일삼는다. 사회를 시궁창으로 만드는 집단이고, 공정해야 할 법과 원칙을 유린하는 데 앞장서는 집단이다.

 


그리고 주인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 선악을 가리지 않는 극성 지지를 뜻하는 고사성어로 ’척구폐요(跖狗吠堯)’와 ’걸견폐요(桀犬吠堯)’가 있다.


‘척구폐요’는 명장 한신에게 모반죄를 부추긴 혐의로 한고조 유방에게 잡혀온 책사 괴통이 문초를 당하며 한 말이다. 괴통은 “도척 같은 도둑놈의 개는 성군인 요임금을 보면 짖는다. 요임금이 어질지 않아서가 아니라, 개는 원래 그 주인이 아니면 짖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을 만나기 전이어서 모반을 권했다”고 변명한다. 나름 그럴듯하다고 생각한 한고조는 괴통을 풀어준다. (<<사기>, <회음후 열전>).

개는 사람과 가장 가까운 동물로 가축에서 伴侶(반려)로 승격했지만, 어진 사람이라도 처음 보면 짖을 수밖에 없다. 개를 나무랄 수 없듯이,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모시는 주인에게 충실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악한 자의 무리에 섞여서 어진 사람을 미워한다 거나, 자칫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착한 자를 도리어 해치게 된다는 것도 뜻하게 됐다.


‘걸견폐요’는 조금 다른 맥락이다.

漢高祖(한고조)는 項羽(항우)를 물리치고 천하통일 했으나, 자신을 도왔던 공신들을 끝까지 믿지 못했다. 대장군 韓信(한신)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잡아들이고, 그를 부추긴 모사 蒯通(괴통, 蒯는 기름새 괴)을 문초했다. 한신에게 천하를 삼분하라고 했다며 삶아 죽이려 했다. 괴통이 억울하다며 변호에 나선다. ‘도척의 개라도 요임금을 보고 짖는 것은 나쁜 사람이라 짖는 것이 아닙니다. 개는 주인 아닌 사람을 만나면 짖기 때문입니다(跖之狗吠堯 堯非不仁 狗因吠非其主/ 척지구폐요 요비불인 구인폐비기주).’ 괴통에게는 한고조가 아니라 한신이 주인이었기 때문이라 했다.(<<사기>>, <노중련 추양열전>). 


충성하면 ‘걸견폐요’, ‘척구폐요 식의 무비판적 복종으로 오도되기 쉽다.

알고 보면 진정한 ‘충(忠)’은 시대불문 필요한 덕목이다. ‘충(忠)’은 가운데 중(中)과 마음(心)으로 구성돼 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지키는 행동지침이다. 주인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식을 갖고 본분을 다하는 것이다.

 

‘주인에 대한 충성’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은 ‘충’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요임금을 보고 주인이 아니라고 짖어댄 개를 나무랄 수 없다. 조직을 위해 몸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은 의리 있다고 칭찬 받는다.

다만 주인이 도척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계속 선한 사람들을 보고 짖는다면, 짐승은 용서받을지 몰라도 사람은 판단력 부족이다.

 

 

 

박한표 :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