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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군 힘 빌릴 수밖에”…갑오개혁 문 연 ‘일본당’의 선택

道雨 2024. 7. 24. 10:47

 

 

길윤형의 조선의 갈림길 _11

“외국군 힘 빌릴 수밖에”…갑오개혁 문 연 ‘일본당’의 선택

 

 

* 청일전쟁이 시작될 무렵인 1894년 6월 초 오토리 게이스케(1833~1911) 주조선 일본공사는 일본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귀임 명령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입성한 직후인 11일엔 청·일 간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일본이 군대를 증파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본국 정부가 청과 개전하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을 파악한 뒤엔 조선 정부를 윽박지르며 개전의 명분을 찾으려 애썼다. 일본국립국회도서관 제공

 

 

일본군이 조선 정부의 저항을 꺾고 서울에 입성한 지 열흘이 지난 1894년 6월20일, 한 남자가 남산 기슭에 자리한 일본 공사관의 문을 두드렸다.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민영준이 잠시 초대 주일공사를 지낼 때 일본어 번역관을 맡았던 ‘지일파’ 안경수(1853~1900)였다.

이 무렵 조선 정부는 느닷없이 서울에 들어와 눌러 앉은 일본군 탓에 크게 고심하고 있었다. 일본이 “청에 칭신(稱臣)하는 것”을 그만두고 독립을 선언하라고 집요하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틈바구니에 낀 조선 내의 “의론은 매우 분분하고 황황(惶々)해 피눈물(淚血)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놀랍게도 이 고통스러운 상황을 ‘기회’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었다. 민씨 척족의 부정부패와 청의 사대 요구에 반발하며, 국가 개혁의 기회를 엿보던 ‘일본당’이라 불리던 일부 개화파들이었다. 이들을 대표하는 안경수가 오토리 게이스케(1833~1911) 주조선 일본공사에게 쏟아낸 소름 끼치는 얘기는 ‘일본외교문서’ 27책 2권 237~238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부 밖의 뜻있는 사람은 물론 현직에 있는 관리도 일본군의 대거 입한(入韓)이 우리나라 개혁의 시기를 촉진시켰다고 좋아하고 있다. 외병(外兵·외국군대)의 여위(餘威·남는 위력)를 빌려 내부의 개혁을 행하는 것 외에는 수단이 없다. (중략) 먼저 민씨를 물리치고 대원군을 총리로 추대하려 정사를 근본에서부터 개혁할 계획이다. 일본병이 하루라도 더 오래 체진(滯陳)하기(머물기) 바란다.”

 
 
 
 

 

* 조선 내의 대표적인 ‘일본당’으로 꼽히던 안경수(1853~1900)는 일본군이 서울에 입성한 직후인 1894년 6월20일 일본 공사관을 찾아가 자신을 포함한 개화 세력이 일본군의 힘을 빌어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는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는 이후 독립협회장을 맡았다가 1898년 고종폐위음모에 가담한 것이 발각돼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선 한·청·일 3개국이 협력해야 한다는 ‘일청한동맹론’을 주장했다. 이쪽저쪽으로 너무 많이 굴곡진 그의 삶은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많다. 한겨레 자료사진

 

 

 

대청 강경론을 주장하며 청일전쟁의 문을 열어젖힌 무쓰 무네미쓰 외무대신은 애초 조선의 내정 개혁을 위해 “우리(일본)의 이익이 희생될 필요는 없다”는 현실주의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철군을 요구하는 청에 “그 나라의 참정비황(慘情悲況)을 수수방관할 수 없다”는 명분을 제시한 이상 좋든 싫든 조선의 개혁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묘한 시기에 ‘일본당’ 인사들이 ‘대원군을 내세워 쿠데타를 일으킨 뒤 개혁을 추진하자’는 제안을 해온 셈이었다.

 

다만, 10년 전 김옥균의 갑신정변(1884) 때와 달리 갑오개혁으로 이어지게 되는 이번 쿠데타(1894)의 주체 세력은 조선 개화파가 아닌 일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당의 세력이 너무 약해서다. 오토리는 28일 무쓰에게 “이른바 일본당이라고 불리어 음으로 양으로 움직이는 자는 당장 세력이 없는 김가진·유길준·조희연·안경수 등 10여명에 불과하다”면서 “안으로 개혁파를 교사(敎唆)하고 우리는 밖으로부터 밀어붙이려 계획했지만 그들이 과연 능히 내응(內應)의 공을 이를 것인지 심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결국 결판을 내려면 일본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내정 개혁을 원했던 ‘일본당’과 달리 일본은 ‘개전의 명분을 찾는다’는 또다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가장 모양새 좋게 전쟁을 시작하는 방법은 조선의 팔을 꺾어 ‘청의 군대를 대신 쫓아내 달라’는 요청을 받는 것이었다. 일본이 쓸 수 있는 시빗거리로는 ‘독립국인가, 청의 속국이냐’는 난처한 질문(독립속방 문제)을 던지거나, 촉박한 시간 안에 광범위한 개혁안을 실시(내정개혁 문제)하라고 요구하는 것 등 두 가지가 있었다. 조선이 원하는 답을 해오지 않으면, “공갈·협박의 수단”을 취하면 될 일이었다.

이에 따라 오토리는 7월3일 조병직 독판교섭통상사무(외교장관)에게 △정부제도 개정 △재정 정리 △법률 정돈 △국내 민란 진정 △교육 제도 확립 등의 내용이 담긴 이른바 ‘개혁방안강령 5개조’를 제시했다. ‘철도 부설’ 같은 엄청난 사업 실시를 요구하며 “기공의 결의”를 하는데 제시한 기한은 불과 ‘열흘’(!)이었다. 조선 내 개화파의 의사가 반영된 탓인지 개혁안은 상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원로 대신 김병시는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했는지 11일 고종에게 “혹 협잡하는 부류와 간세(奸細)한 무리가 (일본과) 내통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었다.

* 무쓰 무네미쓰 일본 외무대신은 1894년 7월19일 오토리 게이스케 주조선 일본공사에게 조선 정부가 일본이 제시한 개혁안을 거부했으니 “각하는 스스로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수단을 취하되 다른 외국과 분규가 생기지 않도록 충분히 주의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병사가 왕궁 및 한성을 포위하는 것은 득책이 아니니 이를 결행하지 않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오토리 공사는 이 훈령을 무시하고 23일 경복궁을 침탈했다. 무쓰는 회고록 ‘건건록’에서 자신의 지시가 “10일의 국화꽃(때늦은 지시라는 의미)처럼 됐다”고 적었다. 일본 아시아역사자료센터 제공

 

 

 

 

이 안에 조선이 회신한 것은 16일이었다. 조병직은 “먼저 군대를 철수하여 신의와 화목을 표명하신다면, 우리 정부는 스스로 마음을 다해서 조처를 할 것”이라고 답했다. 오토리는 이를 거부의 뜻으로 간주하고, 20일 조선을 향해 ‘최후통첩’을 내놓는다. 조선이 청의 속국이 아니라면 이틀 뒤인 22일까지 청의 군대를 국경 밖으로 쫓아내고, 청과 종속관계를 전제로 맺은 여러 조약을 파기하라는 실행 불가능한 요구를 쏟아냈다. 오토리는 문서의 제일 끝에 “만일 귀 정부가 회담을 연기한다면 본 공사는 스스로 결의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위협을 잊지 않았다.

 

일본의 이런 무도한 협박은 군사적 자신감에서 비롯됐다. 일본이 조선에 파견하기로 했던 제9혼성여단 병력 8000명이 모두 도착한 것은 6월 말이었다. 이치노헤 효에 소좌(소령)가 이끄는 ‘선발대’인 제11연대 제1대대 병력 1천명은 서울 성내, 나머지는 성밖인 용산 만리창 등에서 출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계획대로 실행하라”는 오토리의 전보가 오시마 요시마사 여단장에게 도착한 것은 23일 오전 0시30분께였다. 그는 서울~의주, 서울~인천 간 전신을 끊고, 참모들을 이끌고 일본 공사관으로 지휘부를 옮겼다. 조선 쪽과 교섭 실무를 주도해온 공사관의 ‘넘버2’인 스기무라 후카시 1등 서기관은 그 직후인 새벽 2시께 안경수·김가진에게 사람을 보내 오늘이 ‘디(D)데이’임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 ‘조선이문: 작은전투의 전말’(朝鮮異聞:小戦の顛末)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그림은 일본이 1894년 7월23일 청일전쟁 개전의 명분을 얻기 위해 경복궁을 공격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오토리 게이스케 일본공사(오른쪽에 말 탄 이)와 대원군이 함께 말을 타고 전투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실제 모습은 이와 달랐다. 대원군은 양국 군 사이의 전투가 발생했을 땐 마포 아소정에 머무르고 있었다. 일본은 자신들의 경복궁 점거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군이 먼저 일본군을 공격한 것처럼 역사를 날조했다. 일본 아시아역사자료센터 제공

 

 

 

 

스기무라의 회고록 ‘재한고심록’에 따르면, 애초 계획은 “새벽 3시께 성문이 열리면 혼성여단 중 1개 중대가 서문(서대문)으로 들어가 궁성 앞까지 행군하고, 대원군을 옹립하고 입궐해 정부를 변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쿠데타에 화룡점정을 찍으며 정당성을 부여해야 할 대원군이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훗날 을미사변에도 깊숙이 관여하게 되는 ‘대륙낭인’ 오카모토 류노스케(1852~1912)는 7월5일부터 대원군이 머물던 마포 아소정을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거사에 참여하겠다’는 동의를 끌어내진 못한 상태였다.

 

 

그 사이 경복궁은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다케다 히데타카 중좌가 이끄는 제21연대 제2대대가 경복궁의 서쪽 대문인 영추문에 도착한 것은 애초 계획보다 늦은 새벽 4씨께였다. 가와치 노부히코 5중대장과 와타나베 우사쿠 통역이 벽에 장대를 걸어 담을 넘었다. 안에서 문을 열자 2대대 제5·7중대원들이 함성을 지르며 궁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급습을 당한 조선 병사들이 응전하며 양쪽에서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거사 직전 스기무라가 사람을 보내 도움을 청한 두 ‘일본당’이 등장해 싸움을 막은 것이다. 안경수는 궁의 동쪽문인 건춘문으로 진입해 반격을 시도하던 기영(평양) 병사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발포를 멈추게 했다. 김가진은 고종이 붙들린 함화당 밖 옹화문에서 야마구치 게이조 2대대장과 교섭을 시도하며 충돌을 막았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병사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총포와 군복을 마구 찢고 부순 뒤 도주하였다”고 적었다.

 

더 큰 비극을 막으려면 대원군을 빨리 끌어내야 했다. 스기무라는 “저하가 이 막중한 대임을 거절하면 조선 종묘사직의 안위 여하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며 우리도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고 협박했다.

대원군은 그에게 “조선국의 땅을 한치도 빼앗지 않겠다”(斷不割朝鮮國地寸也)는 서면 약속을 받아낸 뒤에야 비로소 결심을 굳혔다. 대원군의 입궐을 청하는 고종의 칙서를 받기 위해 또다른 ‘일본당’들인 조희연·안경수·유길준(1856~1914)이 “대궐과 대원군 저택 사이를 바쁘게” 돌아다녔다.

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손에 쥐며 고종의 친정 이후 20년 간 이어지던 민씨 정권이 마침내 무너졌다. 이틀 뒤인 25일 오전 11시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청의 군대를 대신 쫓아내 달라는 의뢰를 받아낸다.

 

이 끔찍한 일을 저지른 ‘일본당’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다만, 유길준이 석달 뒤인 10월 말 보빙사의 일원으로 도쿄를 방문해 무쓰와 마주 앉았을 때 쏟아낸 말이 눈길을 끈다.

“조선인에겐 세 가지 부끄러움이 있소. 스스로 개혁하지 못해 귀국의 권박(勸迫)을 받으니 본국 인민에게 부끄러운 것이 하나이고, 세계 만국에 부끄러운 것이 둘이고, 천하후세에 부끄러운 것이 셋이오.”

 

며칠 뒤 이토 히로부미 총리와 만남에선 할 말이 있다고 청한 뒤 일어나 큰 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吉濬立而高聲語之曰, 朝鮮獨立萬歲).

유길준의 절박한 마음을 현대 한국인이 온전히 이해하긴 쉽지 않은 일이다.

어찌됐든 주사위는 던져졌고, 개화당은 이제 막 시작된 갑오개혁을 꼭,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다.

 

 

기자 길윤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