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 윤석열 정부를 꾸짖다
[서평] 아제모을루·로빈슨 공저 '좁은 회랑'
국가권력과 시민사회가 견제하며 균형을 이뤄야 경제 번영하고 개인의 자유도 보장된다는 이론
윤 정부는 엘리트에 포획돼 신자유주의 맹신, 시민·노동계와 대결하며 복지국가의 길 차단
무분별한 부자 감세로 불평등·재정 악화 초래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다론 아제모을루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교수와 제임스 A. 로빈슨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제도와 정책이 국가의 경제발전과 부의 창출을 결정하는 핵심 요인이라고 역설했다.
포용적 제도는 국가를 번영하게 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반면, 착취적 제도는 극소수 지배 세력과 기득권층에 부가 집중되면서 국가와 사회의 실패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대표작인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남한과 북한의 상반된 체제와 제도의 비교를 비롯해, 양극단에 있는 여러 사례를 열거하며, 자신들의 이론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 역작이다.
윤 대통령,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추천 자격 있나
대통령실은 지난 14일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발표되자마자 윤석열 대통령을 홍보하는 자료를 내놨다. 지난 2022년 윤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인생의 책 또는 젊은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중 한 권으로 꼽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이 책을 인생의 책으로 꼽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권고가 윤석열 정부의 경제 정책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후속작으로, 국가 권력과 시민사회의 힘의 균형을 통한 이상적 국가 또는 사회상을 제시한 ‘좁은 회랑-국가와 사회 그리고 자유의 운명’(2020년 시공사, 장경덕 옮김)이라는 저서의 결론 부분만 훑어봐도 알 수 있다.
좁은 회랑은 ‘리바이어던’으로 상징되는 국가 권력과 (시민) 사회의 힘이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며 형성된 자유와 질서가 최적화한 공간을 의미한다.
리바이어던이 너무 강하면(독재적 리바이어던) 전제 국가나 독재 국가로 흘러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회의 힘이 너무 강하면(리바이어던의 부재) 질서가 무너지며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두 힘의 균형이 깨지면, 국가나 사회는 좁은 회랑에서 튕겨 나가, 국가는 실패하며 개인은 자유를 잃는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말하는 이상적 정치
그렇다면 계속 좁은 회랑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의 마지막 장인 ‘리바이어던과 살아가기’에서 저자들은 1930년대 스웨덴 노동자당(SAP)이 채택한 ‘암소거래’를 성공 사례로 소개했다.
스웨덴어 ‘코하델’를 직역한 ‘암소거래’는 주고받기식 정치적 타협을 뜻한다.
SAP는 정권을 잡았을 때 자신들의 본래 지지층을 넘어 모든 계층을 포용하는 정책으로 국민 지지를 얻었고, 스웨덴이 최고 복지국가로 성장하는 기반을 닦았다. 특히 국민의 경제적 자유를 담보하기 위해 노동조합과 협력해 평균 임금을 높이되,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원칙에 따라 노동자 간 임금 차이가 크지 않도록 ‘압착’하는 정책을 펼쳤다.
SAP의 성과를 저자들은 이렇게 논평한다. “우리가 제시한 이론 틀의 관점에서 보면, 스웨덴의 결정적 성공 요인은 단지 국가의 역할과 역량을 크게 늘린 게 아니라, 민주주의와 (시민) 사회의 통제를 심화시키면서 동시에 그 일을 이뤄낸 것이었다. 국가의 역할을 확장할 때 사람들이 주로 염려하는 것은, 국가의 개입이 사회의 희생을 대가로 몇몇 기업이나 일부 소수 이해집단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하는 ‘엘리트 포획’ 가능성이다. 다양한 정책과 제도의 역할을 평가할 때는, 국가와 (시민) 사회 간 힘의 균형을 만들어냄으로써, 리바이어던과 엘리트집단에 계속해서 족쇄를 채워두려는 조정 노력을 고려해야 한다.”
‘포용’과는 거리 먼 윤석열 정부의 경제 정책
저자들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대응 방식이 성공 사례인 스웨덴 SAP가 아닌 바이마르 시대 독일과 더 가깝다고 지적한다.
엘리트층은 자신들의 우위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가장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대다수 국민은 독재자들의 유혹에 굴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방 국가에서 극우 세력이 득세하는 현상이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윤석열 정부가 집권한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적, 경제적 포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모피아’로 상징되는 경제 관료(엘리트)와 거대 자본인 대기업에 포획된 정부(국가)는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일은 뒷전이고 기득권 챙기기에 바쁘다.
법인세와 종합부동산세, 상속세 등 대기업과 부자들에게 혜택이 집중되는 감세 정책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강조한 ‘포용적 제도’와 상충한다. 부의 편중을 심화시키는 착취적 제도에 더 가깝다.
시민사회의 한 축을 형성하는 노동조합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무시하는 행태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조합을 결성한 건설 노동자들을 ‘건폭’이라고 몰아붙이며 탄압하는 폭거도 서슴지 않는다. 이는 스웨덴 SAP가 노동자와 농민, 기업으로 구성된 광범위한 연합을 바탕으로 대공황의 위기를 넘긴 것과 상반된 모습이다.
연대·타협 없는 정치 양극화가 국가 번영 가로막아
극심한 내수 침체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을 비롯해 취약계층이 깊은 수렁에 빠졌는데, 속수무책으로 방치하고 있는 것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권고하는 제언과 상충한다. 수상자들은 SAP의 성공 사례를 거론하며 “(국가의 부와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담보하는 ‘좁은 회랑’에 들어가려면) 실업과 소득 상실, 빈곤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소득을 재분배하는 일련의 개혁들과 더불어, 경제 활력을 높이는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 정치의 양극화가 극심해졌는데, 이것 역시 ‘국가의 번영과 개인의 자유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정치가 양극단으로 갈라져 한 치의 양보 없이 ‘제로섬’ 게임을 하면, 좁은 회랑으로 들어가는 데 꼭 필요한 타협과 연합은 더 어려워진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야당과 대화와 타협은커녕, 야당 대표를 범죄자 취급하며 무시했다. 국회를 통과한 주요 법안에 대해 밥 먹듯 거부권을 행사하는가 하면, 국회 개막식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처럼 여야 대립과 정치 양극화가 심한 상황에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강조한 ‘포용’은 발붙일 자리가 없다.
힘들게 진입한 ‘좁은 회랑’에서 튕겨 나가지 않으려면
착취적 제도와 양극화를 부추기는 정부를 견제할 방법은 없을까.
수상자들은 인간의 기본적이고 보편적 권리를 인식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조직화한 시민사회를 하나의 대안으로 꼽는다. 그러면서 2017년 10월 여성들이 자신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남성들에게 당했던 성추행과 성폭행에 관해 분명한 목소리를 낸 ‘미투 운동’을 사례로 소개했다.
“사람들이 결집해 이처럼 가장 기본적인 권리 침해에 대해 항의한 덕에, 정부와 기업, 학교에서 힘센 자들이 여성들을 희롱하고 비하하고 공격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졌다. 쉽게 저절로 이뤄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고 실제로 일어난다.”
정치와 외교 안보를 넘어 경제 분야까지 윤석열 정부의 퇴행적 행태는 대한민국의 번영과 시민들의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이를 방치하면, 우리는 피땀 흘려 이룩한 경제 성장과 끊임없이 전개했던 민주주의 운동으로 힘들게 진입한 ‘좁은 회랑’에서 튕겨 나갈 수 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다시 한번 시민사회의 각성이 필요하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은 ‘행동하는 권리’를 촉구하며, 홀로코스트 추모관에 새겨진 독일 루터교회 목사 니묄러의 시를 메시지로 남겼다.
처음에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에.
다음은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다음에 그들이 내게 왔을 때,
나를 위해 말해줄 이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장박원 에디터jangbak6219@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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