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후퇴가 부른 전쟁의 암운을 우려하며
* 3D 프린팅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미니어처가 호르무즈 해협과 이란을 표시한 지도를 가리키는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2025년 6월, 세계는 두개의 전쟁을 동시에 목도하며 불안한 여름을 맞이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이스라엘의 이란 핵시설 폭격.
지리적 맥락과 표면적 명분은 다르지만, 두 전쟁은 마치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며, 21세기 국제정치의 치명적인 공통점을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실패한 외교와 파탄 난 국제질서의 폐허 위에서, 오직 ‘승리’만을 외치는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이 자국민과 세계를 위험한 도박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는 6월 들어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를 향해 문명 파괴에 가까운 공습을 퍼붓고 있다. 자신이 보유한 모든 종류의 미사일과 드론을 동원하여 키이우, 드니프로 등 대도시의 아파트, 병원, 학교, 심지어 전력망과 수도 시설까지 가리지 않는 무차별 공격을 4~5일 단위로 한달 내내 지속했다. 전쟁 개전 이래 한번도 보지 못한 대량 폭격이다.
이런 작전은 군사 목표를 타격하는 작전이라기보다, 사회 전체의 회복력을 파괴하고 공포를 극대화하려는 말살 정책에 가깝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나치 잔재를 제거하고 서방의 식민주의에 맞서 러시아 문명을 지키고 있다”고 선언한다. 자국민 60만명을 죽음과 부상으로 이끈 현실을 외면한 채, 정신적 우월성을 강변하는 ‘주관적 승리주의’다.
이스라엘의 이란 폭격 역시 이 위험한 승리의 공식을 놀랍도록 충실히 따르고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하마스의 기습으로 안보 실패의 책임론에 직면하자, 실추된 정치적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가자지구에 이어 레바논과 예멘 공격, 이란 핵시설 타격이라는 극단적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핵 위협의 선제적 차단’이라는 명분 뒤에는, 네타냐후가 내부의 정치적 위기를 외부의 군사적 갈등으로 덮고, ‘보복’과 ‘억제’를 통해 ‘완전한 승리’를 연출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200대의 전투기와 드론이 동원된 6월13일의 공습을 통해, 그는 이란 정권의 기반을 허물고, 에너지와 인프라를 파괴하여 사회적 혼란을 도모하며 사회통제의 동맥을 끊어버리려 했다.
푸틴이 우크라이나에 강요하려 했던 바로 그런 공포와 혼란이,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한 진정한 목표였다.
공습 직후 그는 “우리의 군사적 결의를 보여주었고, 억제력은 복원됐다”고 자평했지만, 인질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못했고, 가자지구의 인도적 위기는 최악으로 치달았으며, 한때 우호적이던 국제 여론마저 등을 돌렸다.
이는 현실이 아닌, 오직 한 사람의 정치적 생존을 위한 환상 위에서 위태롭게 선포된 승리다.
이 위험한 불길에 기름을 붓고 판을 키우는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반복적으로 발신함으로써, 푸틴한테 우크라이나 대공습의 충동을 부추겼다.
또한 이스라엘을 무조건 지지하겠다며 네타냐후의 자신감을 고무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에 들러리를 자청했다.
더 나아가 미국이 직접 이란 핵시설을 폭격하여 외교가 설 자리를 지워버렸고, 러시아의 침략 논리를 묵인하는 듯한 트럼프 발언은 ‘영토 불가침’이라는 국제법의 대원칙도 흔들었다.
트럼프는 네타냐후, 푸틴과 정치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자신이 마치 대규모 전쟁을 막은 승리자처럼 행세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추축국(Axis Powers) 행태와 비슷하다.
드론과 인공지능이 선보이는 가성비 높은 살인의 전술이 보급되고, 이는 승리에 대한 환상을 증폭시켜 전쟁의 문턱을 낮춘다. 뒤이어 한 지역의 전쟁이 다른 지역의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연쇄적 효과가 나타나는 지금은, 승리의 환각이라는 팬데믹이 확산하는 중이다.
한 국가 내부의 민주주의 후퇴가 타국에 대한 호전성으로 이어지는 지금의 전쟁은, 2차대전 이후 형성된 국제질서의 근간을 재편하는 불길한 신호탄이다.
세계는 이미 ‘합의와 규범에 의한 질서’에서 ‘힘의 논리에 의한 질서’로 급격히 넘어가고 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현실에서, 인간의 심리를 조작하여 집단적 애국심을 고취하는 선동적 서사들이 독재와 전쟁을 합리화한다.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이 외치는 ‘승리’는 위기를 해결하는 해법이 아니라, 더 큰 비극을 낳는 전쟁이라는 파국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문명이 파괴되고 인간이 희생되는 폐허를 응시하며 우리는 묻고자 한다.
“누가 진정한 승리자이며, 그런 승리의 의미란 무엇인가.”
김종대 |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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