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주 호반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7층석탑, 통일신라 영역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중앙탑이라고 불리운다. 국보 제6호이며, 공식명칭은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다.
**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탑 정상의 머리장식은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쳐주고 있다.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너비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듯 하여 안정감은 덜하며, 세부수법이 약화되고 섬약해져 있어 당시의 경향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이 탑은 남한강(南漢江) 상류(上流)의 강가 높은 토단 위에 건립(建立)된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유일한 7층의 거탑(巨塔)으로 높이 14.5m이다. 이 탑이 건립된 지점이 우리나라의 거의 중앙이라고 하여 속칭 중앙탑이라고 부른다. 이 탑은 1917년에 해체 보수되었는데, 이때의 잘못으로 원형(原形)과 달라진 부분이 많아졌다. 현재의 모습은 기단(基壇)은 2중(二重)이고, 상하 각각 10여 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구성되어, 각 면에는 3주(三柱) 혹은 4주(四柱)씩의 탱주(撑柱)가 있으나 간격이 고르지 않은 것은 수리 때의 잘못으로 보인다. 갑석(甲石) 상면의 받침은 하층기단(下層基壇)에는 각형(角形)과 호형(弧形)의 2단이고, 상층기단(上層基壇)에는 각형(角形) 2단이어서 신라(新羅) 석탑(石塔)의 전형(典型) 양식을 지키고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5층까지는 탑신석(塔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여러 개의 석재(石材)로 구성되었고, 6층부터는 한개의 돌로 되어 있다. 각층 탑신석에는 우주형(隅柱形)이 있고 옥개석 받침수는 각층 5단씩이다. 이 석탑을 해체할 때 6층 탑신석과 기단에서 각각 고려시대(高麗時代) 거울을 비롯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다. |
* 우리가 중앙탑을 찾았을 때, 호수축제기간이었는데, 비가 와서 찾는 손님이 적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 TV 지역뉴스 시간에 충주지방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이 중앙탑이 자리잡고 있다.
* 충주 지역의 또 다른 기념비적인 유물이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이다. 규모는 작지만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기록해 놓는 등, 그 의미가 깊다.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어 있다.
**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기도 했지만 비의 중요성을 몰랐던 동네 주민들이 우물가의 빨래판으로 사용하기도 하여 발견된 당시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사자(使者)’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募人三百)’·‘신라토내(新羅土內)’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려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
중원고구려비는 오랜 세월의 풍화로 비문이 심하게 마멸되어 분명하게 확인할 수는 없으나 장수왕 때에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서 5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면비(四面碑)로서 전면 23자씩 10행으로 된 230자의 명문(銘文)이 있으며 좌측면에도 155자가 새겨졌는데 뒷면과 우측면은 9행과 6행의 명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판독된 비문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국의 관계를 밝혀 주는 귀중한 금석문(金石文)이다. 처음 입비(立碑) 당시부터 대석(臺石)과 개석(蓋石)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의 모양이 만주(滿洲) 즙안현(輯安縣)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축소된 형상이다. 이 석비는 1979년 4월 8일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발견 조사된 국내 유일의 고구려 비인데 1981년에 이 비의 보호각을 만들어 세웠다. |
* 동두천에 있는 모 초등학교에서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이곳(충주)까지 답사를 왔다. 고구려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역사의 전반적인 사항에 대해 얘기해주시는 선생님의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 용인 모현면에 있는 왕산초등학교. 족구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중, 턱걸이, 차오르기 좀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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