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이긍익 : 가운은 기울어 역사가를 낳다

道雨 2007. 10. 27. 17:40

 

 

 

           가운은 기울어 역사가를 낳다

폐족 가문에 태어나 당파성을 배제한 역사서 <연려실기술> 남긴 이긍익

 

▣ 이덕일 역사평론가

 

  이긍익(李肯翊·1736(영조 12년)~1806(순조 6년))은 이광사(李匡師)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6년 전인 영조 6년(1730) 소론 강경파였던 백조부 이진유(李眞儒)는 귀양지에서 끌려와 국문을 받았다. 그는 “오직 우리 숙종(肅宗)을 섬기는 도리로써 경종(景宗)을 섬겼고, 경종을 섬기는 도리로써 성상(聖上·영조)을 섬겼으니, 평생에 힘쓴 바는 충의와 명절(名節)이었습니다”라고 항변했으나, <영조실록>이 이진유를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소하(疏下)의 역적들이었다’라고 쓴 대로 선왕(先王·경종)의 충신이었던 그는, 영조의 역적으로 몰려 장사(杖死·곤장 맞다 죽음)당하고 말았다. 이후 그의 자식은 물론 조카들도 과거 응시가 금지된 폐족(廢族)이 되었는데, 이긍익의 부친 이광사(李匡師)가 과거 응시를 포기한 채 집에서 학문과 글씨 연마로 세월을 보낸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긍익에게도 한때 희망은 있었다.

 

비극의 근인을 탓하지 않다

  내가 열세 살 때 선군(先君·이광사)을 모시고 잘 때, 꿈에 임금이 거둥하셨기에 아이들과 길가에서 바라보는데 임금께서 홀연히 연을 멈추시고 특명으로 나를 앞으로 오라고 하시더니, “시를 지을 줄 아느냐?”라고 물으시기에 “지을 줄 압니다”라고 답했더니 “지어 올리라”고 명하셨다.(<연려실기술> 의례(義禮))


△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일체의 당파성을 배제했다. 상반된 견해의 사료를 모두 수록해 ‘사료로 말한’것이다. (사진/ 권태균)

  이긍익은 ‘운(韻)을 내달라’고 요청했고, 영조는 ‘사(斜)·과(過)·화(花) 석 자를 넣어 지으라’고 명했다. 잠시 후 시가 완성되었느냐는 영조의 질문에 이긍익은 ‘두 자가 미정이어서 감히 아뢰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답했고, 영조가 ‘그냥 말하라’고 하자 미완성의 시를 읊었다.

  “비가 맑은 티끌에 뿌리는데 임금 타신 연(輦)이 길에 비끼니/ 도성 사람들이 육룡(六龍)이 지나간다고 서로 말하네/ 미천한 초야의 신하가 오히려 붓을 잡았으니/ □□학사의 꽃이 부럽지 않네.”(雨泊淸塵輦路斜 都人傳說六龍過 微臣草野猶簪筆 不羨□□學士花)

  이긍익이 짓지 못한 두 자에 대해 영조는 “거기에 ‘배란’(陪??)이라고 넣어 ‘임금 수레 모시는 학사의 꽃이 부럽지 않네’로 하면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이 일화는 이긍익이 13살 때 이미 수준 높은 시를 지을 정도로 학식이 있었음을 나타내는데, 이 꿈은 집안에 희망을 주었다. 꿈 이야기를 들은 부친 이광사는 ‘길몽’이라고 기뻐했고 이긍익도 “훗날 어전에서 붓을 가질 징조라고 생각했다”.

  이때가 영조 24년(1748) 무렵인데, 이긍익이 스무 살 때인 영조 31년(1755) 나주벽서 사건이 발생하면서 집안은 오히려 멸문(滅門) 위기에 휘말린다. 나주벽서 사건의 주모자 윤지·윤광철 부자와 부친 이광사가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드러나면서 투옥된 것이다. 이긍익의 모친 문화 유씨는 마흔둘의 젊은 나이로 자결했고, 이광사는 겨우 목숨을 건지고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 갔다. 졸지에 모친이 자결하고 부친이 유배 간 상황에서 이긍익은 동생 영익을 부친에게 보내 시중 들게 하고 자신은 7살짜리 여동생을 데리고 가계를 꾸려야 했다. 이긍익은 이때 채마밭을 일궈 생계를 마련했다고 전해진다.

  이 모든 비극의 근인(近因)은 백조부 이진유였지만 그의 집안은 이진유를 비판하지 않았다. 부령 유배지에서 이광사는 자식과 조카들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 집안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백부(이진유) 때문이지만 사실은 가운(家運)일 뿐이다”라고 백부를 비난하는 대신 가운을 탓했다. 이광사도 이진유의 행위를 선왕에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했음을 시사하는데, 경종이 독살설 속에 세상을 떠남에 따라 가운이 기운 것이지 이진유의 잘못은 아니라는 생각인 것이다.

  이광사는 유배지 부령에서 편지를 보내 “가세가 뒤집어지고 멸망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자제(子弟)들은 마땅히 효도와 우애에 더욱 독실해야 하고 예의를 서로 격려해야 한다”(‘자식과 조카에게 주는 편지’(寄子姪書))라고 당부하고 있다. 이긍익은 서울에 남은 한 살 위의 종형 이문익(李文翊)과 치심(治心)의 방도에 대해서 토론한다. 이문익의 부친 이광현(李匡顯)도 경상도 기장에 유배 중이었는데 동생 충익(忠翊)이 봉행하고, 문익은 서울에서 모친을 모셨다. 며칠 굶은 문익에게 모친이 배고프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배고픔을 잊기 위해 책을 읽습니다”라고 답변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의 궁핍 속에서 이들은 마음을 다스리는 치심(治心)의 근원에 대해 서로 토론했다. 이광사는 이때 이긍익에게 편지를 보내 “마땅히 먼저 사물(四勿)을 행해야 한다”고 훈계한다. 사물이란 공자가 안회(顔回)에게 가르친 자신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극기복례’(克己復禮)의 네 가지 계율을 말하는데,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는 것이다. 유배와 곤궁 속에서 치심을 논하고 사물을 논하는 데서 이 집안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사료로 말하는 ‘기사본말체’

  이런 상황에서 이긍익이 천착한 것은 바로 역사였다. 이긍익은 13살 때 꿈 이야기의 뒷부분을 이렇게 결말지었다.

  “그 후 내가 궁하게 숨어 살게 된 뒤로는 그 꿈을 전연 잊어버렸다. 요즘에 와서 문득 생각하니, ‘초야의 신하가 붓을 잡다’(草野簪筆)란 시 구절은 늙어서 궁하게 살면서 야사를 편집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어릴 적에 꿈으로 나타난 것인 듯하니, 실로 우연이 아니라 모든 일이 다 운명으로 미리 정해진 것일게다.”(<연려실기술> 의례)

  이긍익이 역사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부친 이광사의 영향이 컸다. 이광사는 <동국악부>(東國樂府)에서 국조(國祖) 단군부터 두문동에 은거한 고려 충신들의 이야기까지 30가지 일화를 30수로 읊을 정도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부친의 역사에 대한 이런 관심이 이긍익에게도 이어져 조선 후기 3대 역사서의 하나로 손꼽히는 방대한 <연려실기술>을 편찬한 것이다. ‘연려실’(燃藜室)은 이긍익의 호인데, 의례에서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이라고 이름 지은 까닭을 설명하고 있다.

  내가 젊었을 때, 일찍이 사모하던 유향(劉向)이 옛글을 교정할 적에, 태일선인(太一仙人)이 청려장(靑藜杖)에 불을 붙여[燃] 비춰주던 고사를 사모했는데, 선군으로부터 ‘연려실’(燃藜室)이란 세 글자의 큰 수필(手筆)을 받아 서실의 벽에 붙여두고 그것을 각판하려다가 미처 못했다. 친지들이 서로 전하기를, “그것이 선군의 글씨 중에서 가장 잘된 글씨라고 서로 다투어 모사(模寫)하여 각판을 한 이도 많았고, 그것으로 자기의 호를 삼은 이도 있다” 하니, 또한 우스운 일이다. 이 책이 완성된 후 드디어 <연려실기술>이라고 이름 짓는다.(<연려실기술> 의례)


△ 부친 이광사는 이긍익이 한국사에 관심을 갖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광사의 초상. (사진/ 권태균)

  놀라운 것은 <연려실기술>에 일체의 당파성을 배제했다는 사실이다. 역사 기술의 객관성을 그만큼 중시했던 것이다. 영조 때의 일은 제외하고 태조(太祖)부터 숙종 때까지만 저술한 이유도 집안이 직접 관련된 영조 때의 일을 서술하면 객관성을 해칠까 우려한 것이다. 폐고(廢固)된 집안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데 대한 우려도 있었다. 이긍익이 의례에서 “처음 내가 이 책을 만들 때 나와 가까운 친구가 ‘남에게 보이지 말라’고 권고하기도 했다”고 밝힌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이때 이긍익은 “남이 이 책을 알지 못하기를 바란다면 만들지 않는 것이 옳고, 만들어놓고서 남이 알까 두려워한다면 도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만큼 객관성에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연려실기술>은 연대순으로 엮는 편년체(編年體) 사서가 대부분인 우리나라에서 특이하게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역사서이다. 그는 해당 사안에 대한 상반된 견해의 사료를 수록함으로써 ‘사료로 말하게 하는 저술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는 “각 조에 인용한 책 이름을 밝혔으며, 말을 깎아 줄인 것은 비록 많았으나 감히 내 의견을 붙여 논평하지는 않아 삼가 ‘전술(傳述)하기만 하고, 창작하지 않는다(述而不作)’는 공자의 뜻을 따랐다”고 밝히고 있는데, ‘술이부작’(述而不作)은 <논어> 술이편에서 공자가 “나는 옛것을 전하기만 할 뿐 창작하지는 않았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서 사료만 제공하고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기는 저술 방법이다.

 

세력 움직임이 영화처럼 환하네

  이긍익이 이런 편찬 방법을 택한 것은 극심한 당쟁 때문이었다.

  “동서 분당 이후로 피차의 문적(文籍)이 헐뜯고 칭찬한 것이 서로 상반되어 있으나 사료를 싣는 자가 한 편으로 치우친 것이 많았다. 나는 사실 그대로를 모두 수록하여 뒤의 독자들이 각자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게 하려 한다.”(<연려실기술> 의례)

  일기나 문집, 또는 개인 저술의 야사 등 모두 400여 종의 다양한 사료를 인용하면서 일일이 출처를 밝힌 것도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이 책에 이긍익의 생각이 반영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객관적인 사료를 제시한다고 해도 해당 사건을 선택하는 것은 이긍익의 몫이다.

  이긍익은 사건 설정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는 방식을 택한 셈이다. 당쟁으로 얼룩진 숙종 시대를 보면 ‘갑인년(현종 15년·1674)과 을묘년(숙종 1년·1675) 사이의 시사(時事)’라는 항목에서 예송 논쟁에 대한 서인과 남인 사이의 견해를 모두 싣고 있다. ‘장희빈이 원자를 낳다’라는 항목에서는 장희빈의 출산이 왜 극심한 당쟁의 이유가 되는지를 알 수 있는 사료를 취사선택해서 실었다. 그런데 사료 기재 방식이 아주 재미있다. 예를 들어 “10월 소의(昭儀)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이 당시 장씨의 어머니가 뚜껑 있는 가마를 타고 대궐 안에 드나들었는데, 사헌부 지평 이익수(李益壽)가 보고 가마를 때려 부수고 불태워버리며 그 종을 다스리니, 임금이 ‘출입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아뢰지도 않고 제멋대로 형벌을 가하느냐’라고 말하고 내수사(內需司)에 명하여 금리(禁吏)와 소유(所由·사헌부의 이속)에게 죄 주라고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많이 반대하였으나 듣지 않았다”(<연려실기술> ‘숙종조 고사본말’)라고 실었다. 남인계 여인 장희빈이 왕자를 낳자 긴장한 서인들이 장희빈의 어머니를 핍박하는 장면인데, 장희빈의 왕자 출산을 둘러싼 궁중 각 세력의 움직임이 영화를 보는 것처럼 환하게 드러난다.

  이런 편집 방식을 통해 이긍익은 현실의 승자인 서인·노론뿐만 아니라 패자인 남인의 시각과 움직임까지 모두 제시할 수 있었다. <연려실기술>이 없었다면 우리는 현실의 승자인 노론 쪽에서 저술한 역사서밖에 볼 수 없었을지 모른다. 노론과 다른 시각의 역사서 서술은 시대의 금기였기 때문이다. 이긍익은 객관성이란 명분 아래 집권 노론뿐만 아니라 야당인 소론과 재야였던 남인의 견해까지 모두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려실기술>이 이긍익이 아니라 부친 이광사의 저술이라는 지적도 있다. 현전하는 필사본에 이긍익이 편찬했다는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귀양지의 정약용이 아들 정학연에게 <연려실기술>을 읽으라면서, “이도보(李道甫·이광사의 자)가 편찬했다”라고 주석한 것, 홍한주(洪翰周)가 “원교(圓嶠·이광사의 호)가 편찬한 <연려실기술>만은 대개 기사본말체를 본뜬 것”이라고 기술한 것 등이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광사는 정조 즉위년(1777)에 이미 사망했으나 <연려실기술> 의례의 “경술(庚戌·정조 14년·1790)에 금강산에 놀러 가면서 전질을 남에게 빌려주고 갔다”는 구절은 이광사가 편찬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또한 <연려실기술>에는 많은 비문들이 인용되어 있고 어떤 비문들은 직접 가서 보았을 것인데, 유배지의 이광사가 답사를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동국악부>를 지은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광사도 역사에 관심이 많았기에 유배 가기 전 많은 사료를 수집하거나 필사해놓았을 수는 있지만 이를 <연려실기술>이란 한 꾸러미에 꿴 이는 이긍익인 것이다.

 

학사의 꽃이 부럽지 않다

  이긍익은 의례에서 “내가 자료를 얻어 보지 못하여 미처 기록에 넣지 못한 것은 후일에 보는 이가 자료를 얻는 대로 보충하여 완전한 글을 만드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라고 썼다. 역사는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한 시대 모두의 것이란 열린 생각이다. 그래서 불우한 인생을 살았던 이긍익의 초야의 붓은 실로 ‘임금 수레 모시는 학사의 꽃’이 부럽지 않게 오래도록 살아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