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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급 통일신라 유물 무더기 출토

道雨 2009. 2. 6. 13:56

 

 

 

    국보급 통일신라 유물 무더기 출토

                                    -  삼국유사 산실 경북 군위 인각사서 10여점



                     
◇ 금동 병향로와 청동정병, 청동향합, 청동 이단합, 청동 반자 등이 완벽하게 세트를 이룬 9세기 무렵 통일신사시대의 불교공양구가 경북 군위군 인각사 일대에 대한 5차 학술발굴조사에서 출토됐다. 불교문화재연구소 제공
금동 병향로(柄香爐)와 청동 정병(淨甁), 청동 향합(香盒), 청동 이단합, 청동 반자(飯子) 등이 완벽하게 세트를 이룬 9세기 무렵 통일신라시대 불교공양구가 무더기로 출토됐다. 이 공양구들은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데다, 그 대부분이 발굴을 통해서는 처음 확인됐다는 점에서 국보급 유물로 평가된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재단법인 불교문화재연구소(소장 범하 스님)는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곳으로 알려진 경북 군위군 인각사 일대에 대한 5차 학술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 불교의식구 일괄유물'을 발견했다고 5일 밝혔다.

모두 한 군데서 발견된 이 불교공양구들은 손잡이가 달린 향로인 금동 병향로 1점을 필두로 깨끗한 물을 담는 청동정병 2점, 7층 탑 모양 뚜껑을 갖춘 청동향합 1점, 2층으로 된 몸체와 뚜껑 조합식이며 사리를 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 이단합 1점, 금고(金鼓) 혹은 북 일종인 청동반자 1점, 청동그릇 3점, 해무리굽 청자 7점 등으로 구성돼 있다.

조사단은 이 유물들이 "그동안 국내에 알려진 예가 없거나 극히 드문 것들로 통일신라시대 금속공예사 및 불교사 연구에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인각사서 발굴된 통일신라 국보급 불교공예품 왜 무더기로 묻혔을까?

 

[서울신문]고려시대에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곳으로 잘 알려진 경북 군위군 인각사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국보급 불교 공예품(서울신문 2월6일자 3면 보도)들은 어떻게 땅속에 무더기로 파묻혔을까. 매장의 방식이나 장소 등이 전례가 없는 만큼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매장 방식·장소 전례없어 관심 증폭

앞서 불교문화재연구소(소장 범하)는 "지난해 말 인각사 5차 발굴조사에서 금동병향로, 청동정병 2점, 청동향합, 청동이중합, 청동반자 등 통일신라시대 불교의식구 10여점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유물이 무더기로 발굴된 지점은 인각사의 오른쪽으로 통일신라시대 회랑과 담장, 탑 등의 터가 드러났다. 그리고 부도로 추정되는 탑터 2~3m 지점에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가장 큰 의문점은 왜 묻었을까이다. 묻힌 장소가 지표층에서 5㎝밖에 되지 않는데다, 묻는 방식이 그리 정교하거나 치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더욱 의문을 남긴다. 유물들은 둥그렇게 땅을 파서 바닥에 기와를 깔고 벽과 위쪽에 기와로 칸막이를 삼은 뒤 흙을 덮어 묻었다.

일부에서는 몽고 침입 당시 약탈이나 훼손을 막으려 급하게 묻은 것이거나, 새로운 건물이나 탑을 지을 때 땅의 신을 위로하고자 묻는 지진구(地鎭具)가 아니겠느냐는 가설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동반 유물인 기와가 통일신라시대의 것이 확실한 만큼 몽고가 침입한 고려나 임진왜란 때 묻어놓았을 가능성은 낮다. 지진구라는 가설 역시, 매납 방식이 정교하지 않은 데다 유물이 의식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용되었던 것이라는 점에서 가능성은 높지 않다.

●생전의 공양구 함께 묻은 것으로 추정금속공예전문가인 안귀숙 인천공항 문화재감정관은 "일단은 통일신라시대에 국사(國師)급의 고승이 열반하자 묘탑을 짓고 생전의 공양구를 함께 묻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면서 "불교사 연구 전문가들이 더욱 연구해야 할 대목"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에 발굴된 유물 가운데 길이 40㎝, 높이 10㎝의 금동병향로(銅柄香爐·금박이 입혀진 손잡이 달린 향로)는 중국, 일본에서는 몇 차례 발견된 사례가 있으나 국내에서는 두 점(삼성미술관 소장 병향로, 말흘리 출토 병향로)만이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출토 지역과 성격이 명확한 것으로는 사실상 이번 것이 처음이다. 손잡이에는 사자가 조각돼 있어 765년 세워진 당나라 고승 신회선사의 신탑(身塔) 지하석실에서 나온 병향로와 유사하지만 세밀한 아름다움은 더욱 뛰어나다는 평가다.

또한 청동정병(靑銅淨甁) 2점은 그동안 고려시대의 것만 알려져 있었으나 통일신라시대 것은 처음으로 확인됐다. 한 점은 완벽하게 형태를 보존하고 있고, 또 한 점은 목 부분이 파손됐다. 작은 뚜껑으로 여닫을 수 있는 주구와 첨대가 달린 정병으로 유일한 통일신라시대 출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