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뒷간 문화는 어땠을까?
전용호 연구사 "화장실에도 계급"
신분이나 계급이 낮은 것도 서러운데 화장실 이용에도 차별이 있었다?
익산왕궁리유적을 발굴해온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전용호 학예연구사는 반드시 그렇다고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그런 것 같다"고 말한다.
그 근거는 이렇다.
왕궁리 유적을 발굴하다가 그 서북편 지역에서 백제시대 대형 화장실 유적 3곳을 확인했다. 이들 세 화장실은 규모로 보아 한 사람씩 '볼일'을 보았던 곳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사용하는 공동 화장실임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규모가 큰 데다, 동-서 방향을 따라 장축을 마련한 화장실 공간을 세심히 살펴보니 일정한 구간별로 구획을 지은 흔적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 구간들 사이에 칸막이를 설치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 공동화장실 3곳 중 서쪽 화장실은 동서 길이 10.8m에 남북 폭은 1.7-1.8m, 깊이는 3.1m로 가장 규모가 컸다. 중앙에 있는 화장실은 동서길이 5.6m, 폭 1.6-2.1m, 깊이 2-2.35m였으며, 동쪽 화장실은 동서 길이 3.3m, 폭 1.5-1.9m, 깊이 1.5m로 규모가 가장 작았다. .
왜 이런 현상이 빚어졌을까?
전 학예사는 이 화장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신분이 달랐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간단히 말해, 규모가 가장 커서 '아늑한' 공간인 서쪽 화장실은 상대적으로 신분과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이용했고, 가장 낮은 사람들은 가장 작은 화장실을 이용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들 화장실을 팠더니, 6점에 이르는 납작한 나무 막대기가 발굴됐다.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일꼬?"
'큰일'을 보고 난 다음에 쓰는 '뒤닦이' 도구로 추정됐다.
한국 고대유적에서는 처음 출토되는 이런 뒤닦이용 막대를 중국 문헌에서는 측주(厠籌), 혹은 측간(厠簡)이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그 재료로 대나무를 많이 쓴 까닭에 대나무 죽(竹) 자가 부수자로 들어간 '籌'니 '簡' 같은 글자를 쓴 것이다.
이런 측주는 일본 고대 유적에서는 많은 출토 사례가 있다.
두 지역 뒤닦이용 유물을 세심히 비교한 전 학예사의 평가가 재미있다.
"왕궁리 유적 출토 뒤처리용 나무막대가 접촉 부분이 둥글게, 그리고 매끄럽게 처리되어 실제로 뒤를 처리하는 데 (일본보다) 더 유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선조는 화장실 문화에서도 일본을 앞지른 셈이다.
백제학회가 오는 20일 공주대에서 '백제의 생활문화'를 주제로 개최하는 학술대회에서 전 학예사는 '백제 화장실에 대한 일(一)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이를 통해 백제시대 화장실 문화의 복원을 시도한다.
이 자리에서는 이 외에도 한지선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가 발굴조사를 통해 나타난 백제시대 취사시설을 복원하고 취사 용기에 남은 사용 흔적을 분석한 결과 "백제인은 음식물을 죽으로 먹거나 쪄먹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2009.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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