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월관음도의 진실
일본 규슈(九州) 가라쓰시(唐津市) 가가미 신사가 소장한 고려시대의 불 화‘수월관음도’
규슈 사가(佐賀)현립박물관에 위탁보관되어 있다
1392년 7월 무인 이성계는 공양왕을 쫓아내고 조선왕조의 태조로 등극한다. 그 여덟달 전인 1391년 11월, 고려를 괴롭히던 왜구의 유력한 본거지였던 일본 규슈섬 서해안 사가현의 가가미 신사에 고려 불화가 한 점 들어왔다.
료켄이란 승려가 바친 불화는 고려 왕실이 정성껏 발원한 <수월관음도>였다. 보관 쓰고 온몸에 베일 두른 관음보살이 달빛 아래 암벽에서 진리를 묻는 선재동자를 바라보는 정경, 아름다운 불화였다.
그림 명문에는 1310년 고려 26대 충선왕(재위 1308~13)의 후궁이던 숙비 김씨가 화원 8명을 시켜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사>를 보면 숙비는 원래 충선왕의 아버지인 25대 충렬왕의 후궁이었다. 원나라 출신 왕비를 잃은 부왕을 위해 충선왕이 과부였던 숙비를 애첩으로 들여준 것이다. 1308년 8월 충렬왕이 죽자 숙비는 왕위를 이은 연하의 충선왕과 동침하며 다시 후궁이 되어 권세를 부린다. 게다가 충선왕은 등극 석달 만에 원나라로 떠나 다시는 고려 땅을 밟지 않고 편지로 정사를 보았다. 불화는 그 뒤 1310년 5월 그려졌다. 일본 기록에 불화가 나타난 건 다시 그로부터 81년 뒤다. 왜 불화를 발원했을까. 어떤 곡절로 일본으로 갔을까.
학계에서는 발원 배경으로 충선왕의 아들 낳기 기원설, 다른 후궁 순비와의 권력투쟁설, 충렬왕의 원 왕비 추모설 등이 엇갈린다. <고려사>를 보면, 1310~1391년은 왜구들이 교동도에 진을 치고 개경 부근까지 노략질을 일삼아 천도까지 논의하던 시기였다. 흥천사의 충선왕 영정이 탈취당하고, 태조 왕건의 아버지 초상까지 털어갔다는 기록들이 보인다. 그래서 이 기간 왜구가 개경 부근 사찰에서 <수월관음도>를 가져갔다는 추정이 통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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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부터 경남 양산의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 전시중인 가가미 신사 소장 <수월관음도>는 바로 이 복잡다단한 역사적 곡절이 깃든 그림이다. 금물로 채색된 이 숭고한 걸작 앞에서 많은 이들이 옛 그림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전시 준비 과정을 지켜본 일부 미술사학자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1년간 공들인 전시가 막판에 한 국내 방송사의 취재 탓에 좌초될 뻔한 위기를 겪었다는 후문이다. 불화를 위탁 보관하면서 한국 전시 대여를 준비해온 일본 사가현립박물관에 지난달 국내 취재진이 찾아와서는 대뜸 불화를 가져간 왜구의 후손을 취재하려 하니 알선해달라고 부탁하더라는 것이다. 대경실색한 박물관 쪽은 곧장 통도사에 강한 불쾌감을 전했고, 절 쪽은 전시가 무산될까 봐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신용철 학예실장은 “1년에 38일만 공개해온 불화를 선의로 빌려준 일본 쪽 인사들 앞에서 정말 난처했다”며 “추정 외엔 약탈 물증이 없는데도, 지레 약탈품으로 단정하는 듯한 태도는 역효과를 빚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빼앗긴 문화재는 돌려받아야 한다. 그러나 일본 곳곳에 숨은 불화, 회화, 사경, 종 같은 근대기 이전 유출 문화재들은 성격이 다르다. 약탈 물증이 명확하지 않고, 유출 경위조차 모르는 경우가 숱한데, 피해의식만 내세운다면 유물들은 더욱 깊숙이 숨어버릴 것이다. 현지에 숨은 우리 유물들을 발굴·조사하는 양국 전문가들을 나라에서 제대로 지원하고 키우는 배려가 먼저다. 우리가 유출 문화재에 애정이 있음을 그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이 실마리가 될 것이다.
*********************************************<한겨레/노형석 대중문화팀장 2009.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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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 최대 고려佛畵 수월관음도 어쩌다 일본 신사(神社)로 넘어갔을까
최근 논문 '가라쓰 가가미 신사 소재 고려 수월관음도의 유래'를 탈고한 이영(李領) 한국방송대 교수(일본중세사 전공)는 "그림에 얽힌 사연을 알기 위해서는 고려가 몽골의 간섭을 받던 14세기 초의 상황으로 시곗바늘을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측 기록 '측량일기'에 의하면 이 그림은 서기 1310년(충선왕 2) 숙비(淑妃)의 지시로 네 사람의 화가가 함께 그렸다. '숙비'란 고려 26대 임금 충선왕(忠宣王·재위 1298, 1308~13)의 후궁인 숙비 김씨(金氏)다.
숙비는 젊어서 한번 시집을 갔다가 과부가 됐는데 충선왕이 세자 시절 아버지 충렬왕(忠烈王)을 위해 그녀를 후궁으로 올렸다. 문제는 1308년 충렬왕이 죽은 뒤에 일어났다. 장례가 끝나자 충선왕은 아버지의 후궁인 숙비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은 것이다. '고려사'는 "비(妃)가 밤낮으로 온갖 아양을 다 부리니 왕이 혹해 친히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이때 충선왕은 만 33세였고 숙비는 서너살 연상이었다. 숙비는 오빠인 김문연(金文衍)을 출세시키며 내정과 외교에서 영향력을 키워 갔다. 그런 그녀에게도 커다란 경쟁자가 있었다. 숙비가 충선왕과 처음 동침하기 3일 전에 후궁이 된 순비 허씨(順妃許氏)였다.
숙비 김씨와 순비 허씨의 사이가 나빴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많은 공통점을 지녔다는 데 있었다. 둘 다 빼어난 미모였고 동시에 충선왕의 여자가 됐다. 명문 집안 출신인데다 나이도 비슷했다. 두 여인이 한 연회에서 다섯번이나 의복을 갈아입으며 서로 옷차림을 뽐냈다는 기록도 있다. 선수를 친 것은 순비였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딸이 원나라의 황태자비가 돼 있었는데, 사위에게 청해 숙비를 원나라로 소환하도록 한 것이다.
1309년 중랑장 윤길보(尹吉甫)가 황태자를 설득해 소환은 취소됐지만 숙비는 왕실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강화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했다. 그녀는 종교적인 권위를 세우는 방법을 택했다.
1309년부터 1311년까지 개경 인근에 대규모 사찰인 민천사(旻天寺)와 흥천사(興天寺)가 건립됐는데, 당시는 충선왕과 왕후(본처)인 계국대장공주가 원나라에 가 있었던 시기이므로 왕실에서 최고 지위를 지닌 데다 열성적인 불교신자였던 숙비가 그 공사를 주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녀가 '수월관음도' 제작을 지시했던 1310년은 바로 이 같은 상황 속에 있었다.
그렇다면 숙비는 '수월관음도'를 과연 어디에 두었을까? 이영 교수는 ▲당연히 절이었을 것이고 ▲남편인 충선왕과 관련된 장소였을 것이며 ▲관음보살의 영장(靈場·신성한 장소)인 바닷가 근처에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곳은 충선왕의 초상화가 안치돼 있었으며 예성강 하구와 가까웠던 흥천사밖에는 없다.
'측량일기'는 '수월관음도'가 가가미 신사에 바쳐진 취지를 기록한 글이 1391년(공양왕 3)에 쓰여졌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수월관음도'는 1310년과 1391년 사이에 발생한 '어떤 사건'에 의해 흥천사에서 일본으로 옮겨진 것이 틀림없다.
이제 '고려사'의 기록 한줄이 그 해답으로 떠오른다. 1357년(공민왕 6) 9월 26일의 기록이다. "왜구가 승천부의 흥천사에 침입해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가지고 갔다." 가가미 신사의 '수월관음도'는 물론, 대마도 다구쓰다마(多久頭魂) 신사의 대형 청동 징, '금자(金字) 묘법연화경' 등의 숱한 문화재들이 모두 이때 도둑맞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영 교수는 "14세기 말의 왜구는 가난한 어민 출신의 도적떼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규슈의 토호 세력 쇼니 요리히사(少貳賴尙)의 지휘 아래 군량미와 물자를 얻기 위해 계획적으로 한반도를 침공했던 숙련 무사의 테러집단이 '왜구'였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고려 불화 120여점 중 국내에 있는 것은 10여점뿐이며, 나머지는 대부분 일본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일보/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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