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철 종합편집팀 기자 |
불법사찰 ‘윗선’ 아무리 숨겨도, 워터게이트’처럼 진실은 드러날 것
“도청사건이 처음 발각된 직후 상황을 좀더 쉽게 해결할 기회도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비극적으로 망가지기 전에 손쓸 수 있는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백악관 쪽에선 솔직한 태도라고는 전혀 없었다.”
밥 우드워드와 함께 ‘워터게이트’ 특종을 터뜨린 칼 번스틴 기자의 말이다.
최근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의 핵심으로 떠오른 청와대를 보면 남의 나라 일처럼 들리지 않는다.
워터게이트는 미국 민주당 전국위 사무실에 대한 단순 침입 절도사건으로 묻힐 뻔한 사건이었지만, 백악관의 진실 은폐와 거짓말이 드러나며 1급 정치스캔들로 비화했다.
첫 보도가 나간 지 2년2개월 만에 닉슨 대통령이 사임하고 관료 등 총 40명이 기소되거나 구속됐다. 민주당 선거 방해 음모를 꾸민 당시 비서실장과 전 법무장관은 18개월과 19개월을 복역했다.
그들의 죄명은 도청죄, 음모죄, 위증죄, 공무집행방해죄 등이었다.
미국 사회가 분노한 것은 국가권력의 남용과 부도덕함이었다. 법과 정의가 무너지면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험에 빠질 것으로 본 것이었다.
‘한국판 워터게이트’로 번져가는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이 폭로된 지 21개월. 새로운 의혹이 하나둘 폭로되기 시작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개입으로 의혹이 번지자, 핵심 인물인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이 지난 20일 회견을 자청했다.
“내가 몸통이고, 불법사찰은 없었다. 증거인멸은 터무니없다.”
하드디스크를 복구 불가능하도록 지시해놓고 ‘증거인멸은 없었다’는 자기모순적인 말로 회견은 씁쓸한 개그쇼가 되고 말았다.
보수언론조차 ‘깃털의 자백’이라며 코웃음을 쳤다. 누가 봐도 뻔한 거짓말에 진짜 몸통은 따로 있을 것이라는 의혹만 더 커졌다.
더 충격적인 것은 불법사찰에 개입한 인물들이 죄의식이 없다는 점이다.
“국정혼란을 막으려는 충정”(이영호), “진충보국의 마음으로 일했다”(이인규 전 공직윤리지원관), “친북세력은 호의호식하는데, 국가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은 감방에서 신음한다. 정의는 어디에 있나”(김충곤 전 지원관실 점검1팀장).
법에 의하지 않고는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국민의 기본권 보호에 대한 인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에게 정의는 정권수호를 위한 한갓 도구로 변질했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면 불순한 집단으로 낙인찍고, 마녀사냥은 당연한 행동으로 치부된다.
사찰로 얻은 정보는 정적 관리의 유용한 칼이 되고, 힘없는 개인들에겐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무기가 된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때처럼 불법이 정의로 포장돼 버렸다.
워터게이트의 ‘딥 스로트’(내부고발자)로 나중에 알려진 연방수사국(FBI) 부국장 마크 펠트는 당시 ‘대통령의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닉슨의 백악관이 정부기관들을 강압적으로 장악했다. 백악관의 하급 보좌관들이 최고위 관료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정부와 국가가 받게 되는 영향은 개의치 않고, 권력을 남용했다.”(토머스 제이 크로그웰, 엠 윌리엄 펠프스 <대통령의 오판>)
워터게이트가 터지기 전까지 통제받지 않는 권력의 곪은 상처가 뿌리깊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민간인 사찰에 개입한, 법 밖에 선 ‘대통령의 사람들’의 그림자가 겹쳐진다.
부실수사의 오명을 뒤집어쓴 검찰에 다시 찾아온 기회, 성역 없는 수사를 기대해도 될까.
마크 펠트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헤드라인을 보니 우리가 즉시 움직여야 할 것 같다. 다른 누군가가 나서서 증거를 복잡하게 만들기 전에.”
김용철 종합편집팀 기자 yckim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