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관련

졸렬한 검찰보다 비겁한 법원

道雨 2014. 7. 30. 09:46

 

 

              졸렬한 검찰보다 비겁한 법원

 

 

 

 

1950년대 초반 미국 사회를 휩쓴 매카시즘 광풍에선 미국 사법부도 자유롭지 않았다. 각급 법원은 물론 연방대법원까지 광신적 반공주의에 휩쓸렸다.

언론의 자유 제한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을 때만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게 그때까지 확립된 원칙이었는데, 연방대법원은 당장의 위험이 아니라도 ‘명백하고 있을 법한 위험’이 있으면 제한할 수 있다고 고쳐 판결했다.

‘불온한 것으로 보이면’ 교사를 해고할 수 있도록 한 뉴욕주 법도 합헌으로 인정했다. 표현의 자유(수정헌법 1조)와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거부할 권리(수정헌법 5조)를 들어 일방적 신문을 거부하려 한 할리우드작가협회의 주장도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광풍이 한창이던 때의 일이다.

 

온 사회가 미쳐 돌아갈 때는 이성이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일까. 매카시즘이 주춤한 뒤인 1956년 연방대법원은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했다. 1957년에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없는 한 믿음만을 이유로 개인을 처벌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정상으로 돌아간 것이지만, 나라 전체가 이성을 잃은 몇 년 동안 법원이 광기에 굴복한 역사를 되돌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국 법원도 지금 광풍에 휩쓸려 있다. 법원이 권력의 눈치를 본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지난 두어 달은 유독 심했다.

 

법원은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과 관련해 검찰이 청구한 영장을 거의 다 내줬다. 유씨와 관련해 범인도피 등의 혐의로 체포된 사람은 50여명이다. 29일 현재 이 중 14명이 구속됐다. 기각된 사람은 두엇 손꼽을 정도다. 유씨 친인척 구속은 6월 이후에 집중됐다. 처남, 친형, 부인, 친동생 등은 모두 5월25일 유씨가 전남 순천 별장에서 도주한 뒤, 아마도 숨진 지 한참 지났을 때 구속됐다.

친족에겐 범인도피 혐의가 적용될 수 없는 탓에 대부분 횡령·배임 따위 소소한 ‘별건’ 혐의로 구속됐다. 하지만 누가 봐도 도피중인 유씨를 압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검찰도 공공연히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도 법원은 예외 없이 영장을 발부했다. 지금 와선 죽은 이를 잡겠다는 웃지 못할 소동이지만, 결국 토끼몰이에 나선 검찰에 법원이 손을 빌려준 셈이다.

 

이런 일이 왕조시대 연좌제와 비슷한 ‘퇴행’이라는 것도 한심스럽지만, 인신 구속을 사실상 수사 도구로 사용하도록 법원이 허용했다는 점은 개탄스럽다. 구속이 처벌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우리 헌법에서 도출되는 법치주의의 중요한 내용이다.

인신 구속을 수사나 검거작전의 도구로 사용할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가족을 구속해 유씨를 압박하려 한 검찰의 행동은, 고리사채업자가 빚을 받겠다고 채무자의 가족을 괴롭히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엄연히 불법인 그런 일에 법원이 가담한 것이다.

 

그렇게 영장을 내주면서 기록인들 제대로 검토했을까. 유씨를 잡으라고 공개적으로 거듭 닦달하는 권력의 서슬과 여론의 압박에 눈 딱 감고 도장을 찍었을 것이다.

앞서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5월, 유병언이나 세월호 이준석 선장 같은 이에게 수백년의 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다음날 “당장 연구하고 논의하겠다”며 맞장구치고 나섰다. 형법 체계와 형사정책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인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칙에 맞지 않는 일에 홀로라도 일어나 아니라고 말하기는커녕, 행여 뒤질세라 계속 허리만 굽혀대는 꼴이다.

 

그런 영합이 사법의 독립과 법치를 위협한다. 법원이 이제라도 용기를 내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여현호 논설위원yeop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