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집단성명, 형식도 내용도 문제 있다
국가정보원이 19일 ‘동료 직원을 보내며’라는 제목으로 ‘국정원 직원 일동’ 명의의 보도자료를 냈다. 전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국정원 직원의 죽음을 계기로, 정치권과 언론의 국정원 해킹 의혹 제기에 대해 항변하는, 일종의 성명이다.
동료의 죽음 앞에 선 비통한 심경의 표현이라면 이해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두가 공감하는 억울한 일이라면 고인 대신 호소하고 신원에 나서는 것도 당연한 도리다. 하지만 이번 성명이 과연 그런지는 의문이다.
국정원은 직원 수가 최소한 수천명에 이른다는 대규모 조직이다. 정보기관의 속성상 철저한 차단이 원칙이어서, 누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도록 돼 있다.
그런 조직에서 ‘직원 일동’이 동료의 억울한 사정을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집단행동에까지 나서는 일이 과연 가능한지 의문이다.
전체 회람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누군가 성명을 쓰고 제멋대로 “직원 일동”이라고 붙인 게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 어떤 효과를 노렸는지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직원 일동의 성명이라 해도 문제가 있다. 공안기관은 그동안 공무원의 집단행동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왔다. 그런 잣대로는 이번 일은 매우 심한 정치적 집단행동이다.
국민의 대표로서 민주적 통제권한을 지닌 국회가 국정원 사찰 의혹을 조사하려 하자, 해당 관료조직이 집단으로 반발하는 ‘항명’을 한 것이니 더욱 심각하다. 국가안보의 근간이라는 조직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앞으로 더한 일도 생길 수 있다.
이런 일을 누가 계획하고 주도했는지 조사해 책임을 묻는 게 마땅하다. 국정원이 이를 방치한다면 국정원 조직 스스로 동료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자백하는 꼴이 된다.
성명 내용에는 터무니없는 인식이 한둘이 아니다. 성명은 해킹 따위가 “외국 정보기관에선 아무런 논란 없이 받아들여졌”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인권 후진국의 독재적 감시와 탄압이 부럽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근거 없는 의혹”과 “백해무익한 논란”으로 “정보역량이 훼손됐다”지만, 국내를 겨냥한 해킹과 도·감청이 벌어졌다는 정황증거는 이미 여럿이다. 국민을 상대로 한 도·감청이 어떻게 눈감아줘야 할 안보역량이라는 것인지 의아할 따름이다.
성명은 국정원의 해명을 믿어달라고 거듭 강변하지만, 대선개입 댓글 사건이나 간첩증거 조작 사건 등 국정원 주장이 결국 거짓으로 밝혀진 일은 한둘이 아니다.
국정원은 헛웃음만 나오는 억지와 강변을 멈추고 진상 규명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 2015. 7. 21 한겨레 사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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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집단성명…음지의 정보기관 드디어 링 위로
해킹 진상규명 노력에 “근거없는 의혹” “정치공세” 성명
이병호 국정원장 결재…직원 상당수는 내용도 알지못해
야당 “어느나라 정보기관이 이런 행동을…여론공작 의심”
‘무명(無名)의 헌신’을 약속한 이들이 ‘국가정보원 직원 일동’이라는 ‘무명’을 내세워 초유의 집단행동에 나섰다. 해킹 의혹에 대한 국회 조사가 임박한 상황에서, “일부 정치인”, “정치적 공세”, “개탄스런 현상” 등 강경한 표현을 동원한 ‘전 직원 성명’을 통해 조직적 반발을 하고 나선 것에 대해, 국가 정보기관이 조직 이기주의에 빠져 자칫 통제 불능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온다.
국정원은 19일 저녁 8시35분께 통일부 출입 기자들 이메일로 ‘동료 직원을 보내며’라는 제목의 성명을 보냈다. ‘국정원 직원 일동’ 명의의 성명에는, 전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해킹 프로그램 담당 직원 임아무개(45)씨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사찰 의혹을 전면 부인하는 내용이 담겼다.
“자국의 정보기관을 나쁜 기관으로 매도하기 위해 매일 근거 없는 의혹을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백해무익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고 했다.
또 “(동료의) 죽음을 정치적 공세를 이어가는 소재로 삼는 개탄스런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며, 언론과 야당의 진상 규명 노력을 ‘정치 공세’로 깎아내렸다.
‘직원 일동’이라지만 상당수 직원들은 사전에 성명 내용을 알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 관계자는 “직원 수가 많아 전체 회람은 못 했지만 부서별로 공감을 이뤄서 작성한 성명이다. 그간 여러 의혹 제기에 대해 일절 대응을 안 했는데, 동료의 죽음까지도 폄하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서 (성명을) 내게 됐다”고 했다. 그는 “성명 배포는 국정원장 결재를 거쳤다”고 했다.
다른 관계자는 “사전에 문안은 보지 못했지만, 직원들을 대표할 만한 사람들이 만들었을 것이다. 내용은 내부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고 했다.
‘세계 정보사’에 남을 정보기관의 집단성명은 비판과 우려를 낳고 있다. 김영록 새정치민주연합 수석대변인은 20일 “대체 어느 나라 정보기관 직원들이 공동성명이라는 집단행동을 하겠는가. 지도부가 직원들을 앞세워 여론 공작을 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녹색당은 논평에서 “일개 기관이 직원 일동 명의의 보도자료를 발표하는 것 자체가 ‘국기 문란’에 해당한다”고 비판했다.
국정원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직원 숫자도 비밀인데 ‘직원 일동’으로 성명을 내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그는 “국정원 대변인실이나 국회 정보위원회를 통한 입장 표명도 가능한데, 사실상 막가자는 것으로 보인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논리가 작동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도·감청, 대선 개입, 간첩 증거 조작 사건으로 의혹을 부채질한 게 다름 아닌 국정원 스스로의 과거인데도,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게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병호 국정원장이 결재한 이 성명을 두고, 공무원 집단행위를 금지한 국가공무원법 위반 논란도 제기된다. 대법원은 전국교직원노조의 시국선언에 대해, 2012년 “공무 외 집단적 의사표현행위”에 해당한다며, 유죄를 선고한 바 있다.
이종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전교조처럼 정부 정책이나 시국에 대한 의사표현도 아니고, 자신들의 불법행위 의혹에 직원 일동 성명을 내고 반발하는 것은 유례가 없다. 정부가 일관된 법 집행을 한다면 국정원의 행위도 문제가 된다”고 지적했다.
최우리 이승준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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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일동' 성명, 국정원장 결재. 못본 직원들도...
한인섭 "'일동'을 위장한 '일인' 혹은 '일부' 넌 누구냐"
국정원 직원 임모씨 자살 책임을 야당과 언론에게 떠넘기며 사찰 의혹을 전면 부인한 '국정원 일동' 명의의 성명이, 국정원 직원들이 모두 회람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병호 국정원장이 직접 결재해 발표한 것으로 알려져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21일 국정원에 정통한 소식통의 말을 빌은 MBN 보도에 따르면, 이병호 국정원장은 이 성명을 사전에 직접 결재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이 소식통은 자료를 만든 날이 일요일(7월19일)인 탓에, 모든 직원이 회람하지 못한 건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같은 집단행동이 자칫 공무원법과 국정원법 위반에 해당 될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고 MBN은 전하기도 했다.
보도를 접한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22일 트위터를 통해 "코미디를 해라. 왜, 나와서 데모도 하지...마스크 쓰고"라고 비꼬았다.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 역시 트위터를 통해 "앞으로 <직원 일동>이 대유행하겠네요. <청와대 일동>은 언제 나오려나"라고 힐난했다.
한 교수는 이어 "국정원 직원들의 동의를 얻었다는 증거(가령 서명원부)도 없이, '일동'이라 쓰는 건 완전히 기관장의 횡포다. 일동을 위장한 '일인' 혹은 '일부' 넌 누구냐?"고 일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