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제·개정의 주역이 된다는 것은 헌법학자로서 더없는 영광일 것이다. 그런데 1972년 유신헌법만은 누가 만들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세간에서는 한태연이 주도했다고 해서 ‘한태연 헌법’이라고 일컬어지고, 좀 더 안다는 사람들은 “한갈이”를 들먹이는데 한태연, 갈봉근, 이후락(중앙정보부장)의 약칭이다.
한태연은 한때 가장 유명한 헌법 교수였다. 이승만 정권 때는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명망을 누렸고 여러 일화를 남겼다. 그의 헌법학 교재는 명저로 꼽혔다. 그런 그가 5·16 때부터 군사정권의 요청에 응하더니 끝내는 유신헌법의 제정자로 공인되었다. 그 대가로 그는 유신 대통령이 지명하는 국회의원을 두차례나 역임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그는 정치적으로 용도폐기되었고, 학계에서도 백안시되었다. 괜찮은 논문도 있다지만, 후학들은 그의 이름과 논문을 인용하기도 꺼린다.
그라고 할 말이 없을까. 10여년 전 한 학술모임에서 자신이 유신헌법을 초안한 게 아님을 밝혔다. 유신 쿠데타의 첫 조치로 계엄령을 선포한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불러 자신의 헌법 구상을 알려주고, 법무부에서 개정작업에 협조해줄 것을 당부했다. 당시 법무장관은 박정희의 법무참모이자 법률공작에 앞장선 신직수였다. 개정안은 이후락과 신직수가 주도하여, 김기춘 등 검사들을 시켜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개정안의 골격은 손대지도 못한 채 한태연은 개정안의 자구 수정에 조금 관여했다고 했다.
이 증언은 크게 틀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유신헌법과 부속 법령은 박정희의 지령하에 정보기관의 법기술자들이 2년 이상 준비한 정권 차원의 공작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었다고 알릴 수는 없는 일. 그럴싸한 간판이 필요했다. 마지막 수순으로 한태연을 약간 관여시키면서 그의 이름을 유신헌법 제정자로 포장한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한태연에게 화살이 집중됨은 왜일까. 지식인으로서의 소임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명망은 헌법학자 한태연에 대한 대중의 여망을 담고 있는 것이고, 그 명예를 지켜갈 용기와 책무를 동반하는 것이다. 지식인의 명예는 자신의 전유물이 아니다. 1인 독재의 영구화를 획책하는 유신헌법의 마무리 수순에서 그는 순순히 자기 이름을 내놨고 그 대가도 챙겼다. 오명 대신 얻은 권세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독재정권이 영속화되어야 했기에, 유신정권과 그의 이해관계는 합치되었다.
다른 여지는 없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시대 상황을 들어 자신의 처신을 변명하곤 한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에 정반대의 길을 택한 지식인도 있다. 한때 박 대통령으로부터 서울대 총장직을 받기도 했던 유기천은 교수로 복귀한 뒤, 박 대통령이 대만식 종신총통제를 획책하고 있다는 음모를 폭로했다. 총통제 기도는 국민의 이름으로 규탄받아야 하고, 폭력집단보다 더한 정권의 횡포에 맞서 대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자고 했다. 살벌한 시대에 참으로 용기있는 발언이었다. 이로 인해 대학에서 파면당한 그는 피신 다니다 미국으로 사실상 추방됐고, 박 정권 생전에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지금 유기천은 ‘자유와 정의의 지성’으로 존경받고 그 업적이 활발히 재조명되고 있다. 회고담도 풍성하고, 기행(奇行)도 미담으로 거론된다. 최종고 교수가 공들여 쓴 전기도 나와 있다. 그러나 한태연에 대해서는 그런 회고도, 전기도 없다. 쓰인다면 모델로서가 아니라, 반면교사로서일 것이다.
역사를 교육한다는 것은 이비어천가, 박비어천가를 학생들에게 암송시키는 게 아니다. 과거의 수난과 아픔을 기록하고 기억하면서, 잘못된 부분을 짚어내고, 재발을 막을 교훈을 나누는 것이다.
한태연과 유기천도 하나의 사례다. 그들의 대조적인 삶을 비교하면서, 눈앞의 권세와 이권에 탐닉할 때 닥쳐올 후과를 미리 알고 근신하고 자계할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
과거와 현재의 치열한 대화, 그게 역사의 핵심이다. 대화와 논쟁을 제거한 채 정권이 일률적으로 주조한 역사를 외워야 한다면, 우리가 굳이 역사를 배울 이유도 없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