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날뛰는 말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道雨 2024. 3. 27. 10:45

 

고명섭의 카이로스

 

날뛰는 말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드로스’에 등장하는 두 말이 끄는 마차. 마부는 이성을, 백마는 기개를, 흑마는 욕망을 상징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선조가 등극하고 2년째 되던 1568년, 퇴계 이황(1501~1570)이 열일곱 살 왕에게 책 한 권을 지어 올렸다. 조선 성리학의 독창성이 깃든 ‘성학십도’다.

이 책의 서문에서 퇴계는 절실한 마음을 담아 왕에게 주는 고언을 적었다.

 

“군주의 마음은 만 가지 결정이 나오고 백 가지 책임이 모이는 곳이어서 사방의 온갖 욕구들이 다투어 치받고 온갖 사악이 번갈아 침투하니, 한번 태만하여 소홀하고 거기에 방종이 겹치게 되면, 산이 무너지듯 바다가 들끓듯 할 것이니 누가 막아줄 수 있겠습니까?”

 

 

퇴계는 옛 군주들의 실패를 사례로 들어 거듭 어린 왕에게 충언한다.

“후세의 군주들은 천명을 받고 천위에 올라 그 책임이 그토록 막중한데도 자신을 다스리는 데는 조금도 엄중하지 않았습니다. 억조의 신민들 꼭대기에서 스스로 위대한 척 거만을 떨고 방종을 일삼다가 마침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자신을 망치고 말았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성학십도’란 ‘성인들이 가르친 학문’(聖學)을 ‘열 가지 그림’(十圖)에 집약한 책이라는 뜻이다.

퇴계는 자신이 올린 ‘십도’를 병풍으로 만들어 왕의 거처에 펼쳐두어 어느 때나 읽고 마음에 새기기를 당부했다.

 

이 책의 내용 가운데 퇴계의 철학적 사유가 응집된 곳이 제6편 ‘심통성정’(心統性情)이다. 여기에 퇴계는 후배 고봉 기대승과 오랜 기간 벌인 ‘사단칠정 논쟁’의 결론을 요약해 놓았다.

 

12세기 주자가 종합해 세운 신유학은 ‘이’(理)와 ‘기’(氣)를 형이상학적 세계 이해의 골격으로 삼았다.

‘이’와 ‘기’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을 구성하는 근본 범주다. 이 두 가지 범주가 어떻게 작용해 사람의 마음을 일으키느냐를 두고 퇴계와 고봉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벌인 것이 ‘사단칠정 논쟁’이다.

이 논쟁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칠정(기쁨·노여움·슬픔·두려움·사랑·미움·욕망)이라는 ‘기의 작용’에 ‘이의 원리’가 어떻게 관여하느냐를 밝히는 것이다.

퇴계는 칠정을 ‘기발이승’(氣發理乘), 곧 ‘기가 발하고 이가 기에 올라탄다’고 해석했다. 이 말의 뜻을 더 명확히 설명하려고 퇴계는 ‘고봉에게 보낸 두 번째 답글’에서 ‘기와 이의 관계’를 ‘말과 말 탄 사람’에 비유했다.

 

 

“이가 기를 타고 움직이는 것을 두고, 옛사람들이 ‘인승마’(人乘馬), 곧 사람이 말을 타고 드나드는 것에 비유한 바 있습니다. 무릇 사람은 말이 아니면 드나들지 못하고, 말은 사람이 아니면 길을 잃게 되니, 사람과 말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퇴계의 ‘이기’(理氣) 해석이 출발점이 돼, 조선 유학의 300년 대논쟁이 벌어졌다.

먼저 고봉이 퇴계의 주장을 비판했고, 고봉의 비판을 이어받아 율곡 이이가 퇴계의 주장을 공박함으로써 논쟁의 구도가 확고해졌다.

 

퇴계나 율곡이나 모두 칠정을 ‘기발이승’으로 설명한 것은 다르지 않다. 문제는 다음이다.

같은 표현을 두고 퇴계와 율곡은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퇴계는 ‘기발이승’을 ‘기가 발하면 이가 거기에 올라탄다’는 의미로 썼다. ‘기’는 날뛰는 말과 같아서 ‘이’가 올라타 제어하지 않으면 가야 할 길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내달린다. ‘기’가 마음에서 표출되는 감정의 격동이라면, ‘이’는 마음속에 자리 잡은 순수한 이성이다. 퇴계는 순수한 이성으로써 날뛰는 말의 고삐를 잡고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기’는 야생마고, ‘이’는 야생마를 길들이는 사람이다.

 

반면에 율곡은 ‘기발이승’을 ‘기가 발하는 데 이가 본디 함께한다’는 뜻으로 읽었다. ‘이’와 ‘기’가 분리돼 있지 않고, ‘기’ 안에 ‘이’가 깃들어 있다는 것이 율곡의 생각이었다. ‘기’는 능동적으로 작용하고 ‘이’는 작용의 원리로서 ‘기’에 실려 있다. 여기서 차이가 분명해진다.

율곡이 ‘기의 능동성’을 강조한다면, 퇴계는 ‘이의 능동성’에 주목한다.

‘이’가 능동적으로 ‘기’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칠정의 격동이 절도를 잃고 만다는 것이 퇴계의 생각이다.

 

 

그래서 퇴계는 말한다.

“만일 기가 발함에 이가 올라타지 않는다면, 사람은 이욕에 함몰돼 금수가 되고 말 것이다.”

 

인간의 칠정이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것이어서, 그 감정의 격발을 이성의 힘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인간 세상이 짐승의 세상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경고다.

퇴계가 ‘성학십도’를 지어 올린 것은, 임금이 이성, 곧 하늘이 내려준 참된 본성의 힘으로 칠정을 다스리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나라를 바르게 이끌어 달라는 뜻이었다.

 

퇴계는 ‘말을 탄 사람’을 이야기하면서 ‘옛사람들’이 그런 비유를 썼다고 했는데, 그 옛사람 중에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도 있었다.

 

플라톤은 대화편 ‘파이드로스’에서, 인간의 영혼 곧 마음을 ‘말과 말을 끄는 사람’으로, 더 정확히 그리면 ‘날개 달린 말 두 필이 이끄는 마차와 그 마차에 올라타 말을 모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말 두 필 가운데 오른쪽의 흰말은 혈통도 좋고 본성도 훌륭하지만, 왼쪽의 검은 말은 혈통도 본성도 흰말과는 반대다.

 

플라톤은 두 말의 특성을 이렇게 열거한다.

“둘 중 오른쪽 말은 명예와 자제와 겸손을 사랑하며 진정한 영광의 친구이며 채찍이 필요 없고 명령을 그대로 따른다. 반면에 왼쪽 말은 방종과 자만의 친구이며 귓가에 털이 많아 귀가 어두우며 채찍과 가시 막대기를 함께 써도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인간의 영혼은 마부와 백마와 흑마라는 세 힘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셋이 한 조를 이루어 천상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러니 “우리의 여행은 어렵고도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다.”

여기서 마부는 이성을, 백마는 기개를, 흑마는 욕망을 상징한다. 플라톤은 이성이 탁월하게 구현된 상태를 ‘지혜’라고 부르고, 기개의 탁월한 상태를 ‘용기’라고 부른다. 또 욕망은 이성의 통제에 잘 따를 때 ‘절제’라는 올바른 상태에 이른다. 인간의 영혼은 지혜와 용기와 절제가 조화를 이룬 상태를 지향한다. 이성이 기개와 욕망을 이끌어 영혼의 탁월성을 구현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영혼 삼분설을 다른 대화편 ‘국가’에서 폴리스의 조직 원리로 삼았다.

인간의 영혼이 세 가지 성질로 이루어져 있듯이, 나라도 세 가지 성질로 이루어져 있다. 이성의 지혜를 갖춘 철인이 왕으로서 통치자가 되고, 기개를 지닌 전사가 수호자가 되며, 욕망을 지닌 사람들이 생산자가 된다.

통치자가 지혜를 발휘해 전사의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생산자의 욕망을 다스려 절제에 이르게 할 때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가 실현될 수 있다. 정의로운 나라는 지혜와 용기와 절제의 탁월함이 조화를 이룬 나라다.

 

플라톤이나 퇴계나 사유의 근본 구조는 다르지 않다. 두 사람 모두 이성의 힘으로 욕망이라는 ‘날뛰는 말’을 다스리는 데 우리 삶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최종 목표도 다르지 않다. 이성이 욕망을 다스릴 때 만인이 행복하게 사는 조화로운 나라를 이룰 수 있다. 그런 나라를 만드는 일의 정점에 플라톤은 철인을 놓았고 퇴계는 임금을 놓았다.

플라톤은 철인왕을 지혜로운 자들 가운데서 가려내야 한다고 보았고, 퇴계가 신봉한 유학은 임금을 성학으로 가르쳐 철인이 되게 해야 한다고 보았다.

 

플라톤의 나라에서 지혜를 담당하는 철인왕은 사적인 욕망에 빠져서는 안 되고, 그러므로 가족이나 재산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 철인왕은 공공선에 헌신하는 수도자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퇴계도 임금에게 칠정을 다스려 사욕을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금은 사회적 이성의 구현자가 돼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을 배반한다. 퇴계가 가르친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재앙을 불러들인 무능한 임금이었던 데다, 이기적이고 교활하기까지 했다. 나라를 구한 이순신을 질투해 죄를 뒤집어씌우고 박해했다. 선조는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무책임한 왕이었다.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불신했고, 퇴계는 민주주의를 알지 못했다.

민주주의는 철인왕의 자리에 국민이 들어선 체제, 그래서 말과 마부의 관계가 역전된 체제다. 국민이 말을 다스리는 마부 노릇을 하는 것이 민주주의 체제다.

 

그러므로 이 체제에서 이성적 통제력을 발휘해, 통치자의 일탈을 막는 것은,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일이다.

국민이 이성적 판단을 그르쳐 기운이나 자랑하고 사욕에 젖어 날뛰는 말을 지도자로 세워 놓고 방치하면, 마차는 엉뚱한 곳으로 내달리다 진창에 처박힌다.

 

 

 

고명섭 : 책지성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