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언론이 ‘여론 왜곡’ 공범이 되어선 안 된다

道雨 2025. 1. 14. 10:38

언론이 ‘여론 왜곡’ 공범이 되어선 안 된다

 

 

 

여론조사 결과는 ‘잘 먹히는’ 기사 아이템이다. 숫자가 딱딱 나오니 독자의 눈길을 잡아끄는 힘이 세다. 왠지 객관적일 것 같다는 인상도 준다. 기사를 쓰기도 제목을 달기도 수월하다.

이처럼 ‘가성비’가 높으니 온라인 속보용으로는 이만한 게 없다. 여론조사 결과가 나올 때마다 수십, 수백개의 기사가 복제되듯 쏟아지곤 한다.

 

그러나 ‘숫자의 마법’에 가려진 여론조사의 한계와 위험성 또한 크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조사를 했는지, 어떤 정치 성향을 지닌 이들이 많이 응답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민심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여론을 형성하는 데 활용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조사 주체의 불순한 의도가 반영되면 여론 조작도 충분히 가능하다. ‘명태균 게이트’가 단적인 예다.

 

 

정치 브로커 명태균씨는 2021년 9월 자신이 운영하는 미래한국연구소 직원 강혜경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윤석열이를 좀 올려갖고 홍준표보다 한 2% 앞서게 해주이소.”

“젊은 아들 있다 아닙니까. 응답하는 그 개수 올려갖고 2~3% 홍(준표)보다 (윤석열이) 더 나오게 해야 됩니다.”

 

뉴스토마토가 지난해 10월 공개한 명씨와 강씨의 통화 녹취록에 있는 내용이다.

강씨는 이후 국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명씨의 지시는 실제 응답에 곱하기를 해서 결과 보고서를 만들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표본 수를 부풀려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의 지지율이 높게 나오도록 조작했다는 취지다.

 

 

지난주 공개된 한 ‘12·3 내란 사태’ 관련 여론조사 결과는, 다시 한번 여론조사 보도의 문제점을 상기시켜줬다. 보수 매체 아시아투데이가 한국여론평판연구소에 의뢰해 실시한 이 조사에서, ‘내란 우두머리’ 피의자 윤 대통령의 지지율이 40%로 나타났다.

조사 결과가 나오자, 인터넷 매체를 중심으로 ‘지지율 40% 돌파’를 제목으로 내세운 기사들이 쏟아졌다. 티브이(TV)조선, 한국경제, 문화일보, 세계일보 등 신문·방송 매체도 기사를 내보냈다.

 

문제는 이 조사의 설문이 지나치게 편향적이라는 점이다.

이 조사는 1번 문항에서 ‘윤 대통령을 얼마나 지지하느냐’고 묻는다. ‘지지’를 전제로 하는 질문이다. ‘좋아하냐, 싫어하냐’와 ‘얼마나 좋아하냐’는 완전히 다른 얘기다.

3번 문항에서는 ‘체포영장에 대한 불법 논란에도 불구하고 공수처가 현직 대통령을 강제 연행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불법’ ‘강제’와 같은 부정적인 단어를 써 특정 답변을 유도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4~5번에선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의 주요 이유로 든 ‘부정 선거’ 관련 질문이 이어진다. 아시아투데이는 그동안 사설 등을 통해 탄핵 반대 입장을 거듭 밝혀왔다.

 

 

문항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설문이 전반적으로 윤 대통령을 지지하거나 탄핵을 반대하는 이들이 과다 표집될 가능성이 높게 설계돼 있다. 편향적인 질문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은 설문 도중 전화를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번 조사는 전화면접조사보다 응답률(끝까지 응답한 사람 비율)이 현저히 낮은 전화자동응답(ARS) 방식으로 진행됐다. 응답률은 조사의 편향 가능성을 가늠하는 지표로 꼽힌다. 응답률이 높을수록 여론조사의 품질이 좋은 것으로 평가된다.

 

조사 방식과 질문 문항, 응답률, 응답자의 정치적 성향 등은 모두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여론조사의 옥석을 가려 보도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대다수 언론은 최소한의 검증도 없이 숫자만을 앞세워 일단 쓰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이번에 논란이 된 여론조사 보도에서도 조사 방식의 문제점을 짚은 언론사는 한겨레 등 극소수였다.

 

언론의 이런 보도 태도는 불순한 여론몰이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위험하다. 이번 내란 사태처럼 민주공화국의 근본을 뒤흔든 엄중한 사안을 다룰 때는 더욱 그렇다.

실제 ‘윤석열 지지율 40%’ 여론조사 결과가 나온 이후, 극우 세력은 더욱 득의양양해진 모습이다. 국민의힘 의원 40여명이 대통령을 지키겠다며 관저 앞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국헌 문란 세력에게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향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탄핵 반대 목소리가 과다 표집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언론의 역할은 건강한 공론장을 만드는 것이다. 여론조사를 통한 ‘여론 왜곡’의 공범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여론조사 보도에서도 검증이라는 기본적인 저널리즘 원칙을 지키면 된다.

숫자에 매몰되지 않는 ‘해석적 보도’가 이뤄진다면 금상첨화다.

 

 

 

이종규 : 저널리즘책무실장 jk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