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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파기환송' 대법원 판결문에 담긴 치명적 오류

道雨 2025. 5. 8. 10:14

'이재명 파기환송' 대법원 판결문에 담긴 치명적 오류

 

 

2000년 부시-고어 판결에 대한 오해

 

 

12.3 내란 사태 이후, 법조문을 직접 찾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이번 대법원 판결문도 마찬가지다.

판결문을 읽던 중, 한 문장에서 눈이 멈췄다. 서경환, 신숙희, 박영재, 이숙연, 마용주 대법관은 다수의견을 합리화하며 보충의견에서 이렇게 썼다.

"공직선거에 관한 신속 재판 사례는 외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2000년 부시와 고어가 경쟁한 대통령선거 직후 재검표를 둘러싸고 극심한 혼란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재검표를 명한 플로리다 주대법원 재판에 대한 불복신청이 연방대법원에 접수된 후 불과 3~4일 만에 재검표 중단을 명하는 종국재판을 내려 혼란을 종식시켰다."


대법관들의 요지는 분명했다. 미국도 3~4일 만에 판결했으니, 우리의 9일 판결도 정당하다는 논리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는 표현까지 써가며 비장감도 드러냈다.

그런데 이 인용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2000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그 판결문에서 "이번 결정은 현재 상황에만 한정된다"고 명시적으로 단서를 달았다. 즉, 맥락이 다른 사건에서는 인용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런데, 미국에서조차 사법의 선거 개입 흑역사로 남은 이 판례를 한국 대법원이 대선 국면에서 신속 판결의 근거로 꺼내 든 것이다.

537표가 만든 헌정 위기

2000년 10월 대선 후보 당시의 앨 고어와 조지 W. 부시AP/연합뉴스

 

 


기억하는 분들이 많겠지만, 2000년 미국 대선은 논란이 많았다. 민주당 후보 앨 고어가 전국 득표수에서 공화당 조지 W. 부시를 57만 표나 앞섰다. 하지만 미국 특유의 선거인단 제도 때문에 결과는 불투명했다.

승부는 플로리다주에서 갈렸다. 이곳에서 한 표라도 더 받은 후보가 이 주에 할당된 선거인단 25명을 모두 가져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개표 결과 두 후보의 표 차이가 단 537표에 불과했다. 전체 유권자 600만 명 중 0.009%라는 극미한 차이였다. 이렇게 후보 간 차이가 미세할 경우에는 자동으로 재검표를 실시하게 주 선거법에 명시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자동 재검표가 시작됐다. 하지만, 곧 더 큰 문제가 드러났다.


당시 플로리다는 구식 펀치카드 투표 방식을 사용했다. 유권자가 종이에 구멍을 뚫어 후보를 선택하는 방식인데, 문제는 많은 투표지가 제대로 뚫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완전히 뚫리지 않고 매달린 종잇조각을 '행잉 채드(hanging chad)', 살짝 눌린 자국만 있는 것을 '딤플드 채드(dimpled chad)'라고 불렀다. 재검표 기계는 이런 투표지를 제대로 읽어 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플로리다주지사는 부시의 친동생 젭 부시였고, 선거를 총괄하는 주 국무장관은 부시 선거캠프의 공동의장 출신이었다. 민주당은 선거 관리의 공정성 자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고어 측은 주 대법원에 기계에 의한 재검표가 아니라 사람에 의한 수작업 재검표가 필요하다고 소를 제기했다.

특히 민주당 표심이 높은 카운티들을 중심으로 수작업 재검표를 요청했다. 12월 8일, 플로리다주 대법원이 이를 받아들였고, 재검표가 시작되자 고어의 득표가 조금씩 늘어났다. 당황한 부시 측은 그다음 날인 12월 9일, 연방대법원에 긴급 상고했다.

이후, 단 3일 만인 12월 12일, 연방대법원은 5대 4로 재검표 중단을 명령했다. 보수 성향 대법관 5명이 찬성하고, 진보 성향 4명이 반대했다. 한국 대법원이 이번 판결문에서 불과 3~4일 만에 연방대법원이 개입해서 혼란을 종식시켰다며 긍정 사례로 인용한 대목이다.

하지만, 당시 미 연방대법원이 적용한 법리는 한국 대법원이 은연중에 의도하듯 공직 선거법이 아니었다. 미국 수정헌법14조, '평등 보호 조항(Equal Protection Clause)'을 판결의 근거로 들었다. 이는 모든 시민이 법 아래에서 동일한 대우를 받아야 하며, 선거 과정에서도 표의 가치가 지역이나 방식에 따라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당시 미 대법원이 이토록 서둘러 결정을 내린 데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미국 대선은 한국과 달리 유권자가 직접 대통령을 뽑는 게 아니라, 각 주에서 선출된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선거 방식이다. 연방헌법과 선거법은 각 주의 선거인단이 12월 18일까지 투표를 마쳐야 한다고 정하고 있었다.

이 시한이 5~6일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플로리다주 전체의 재검표 기준을 통일하고 전체 표를 재검토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새로운 정부의 출범도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는 초유의 헌정 위기 사태가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미 대법원이 재검표 중단을 결정한 핵심 이유다.

한국 대법원은 이 핵심 맥락을 누락시켰다. 부시-고어 사건은 진행 중인 선거의 헌정 위기였으나, 이재명 사건은 과거 선거와 관련된 단순 형사 재판이다. '선거'라는 단어만 같을 뿐 적용 법리와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 이를 비교하는 것은 사과를 오렌지라 부르는 왜곡이다.

5 대 4, 정치적 판결의 후유증

미 연방대법원 전경.wiki commons

 

 


이 판결의 후폭풍은 거셌다. 대법관 한 명 차이로 대통령이 결정됐고, 사상 처음으로 연방대법원이 선거 결과에 직접 개입했다. 특히 논란이 된 건 이 5 대 4 판결이 철저히 대법관들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갈라졌다는 점이다. 평소 주(州) 권한을 강조하던 보수 대법관들이 이례적으로 연방의 개입에 손을 들어주었고, 연방 정부 권한을 강조하던 진보 대법관들은 역으로 주 법원의 자율성을 지켜야 한다며 맞섰다.

결국 법리보다 대법관들의 정치적 성향에 따른 판결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판결에서 반대 의견을 낸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은 "이 사건의 진짜 패자는 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라고 썼다. 심지어 다수 의견에 동참했던 샌드라 데이 오코너 대법관조차 퇴임 후 당시의 결정에 깊이 후회한다는 소회를 밝혔다. 2013년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우리가 그 사건을 받지 말았어야 했다"고 고백했다.

당시에도 이런 사법의 정치 개입 문제점을 의식한 듯, 미 연방대법원은 판결문에 이례적인 문구를 포함시켰다:

"이번 결정은 현재 상황에만 한정된다. 선거 절차에서의 평등 보호 문제는 일반적으로 매우 복잡한 쟁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 문구를 통해 미국 연방대법원은 이 판결이 특수한 상황의 예외적 판단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플로리다 각 지역별 투표 방식과 재검표 기준이 달라 일관된 재검표가 불가능했던 특별한 경우였기 때문이다. 법조계, 정치권, 학계에서 이 판결이 언급될 때는 주로 사법의 정치 개입에 대한 경계와 반성의 사례로 다뤄졌다.

퍼셀 원칙: 선거 개입을 자제하라는 사법의 교훈

2000년 부시-고어 판결의 후폭풍으로 미국 사법부는 선거 개입에 훨씬 신중해졌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퍼셀 원칙(Purcell Principle)'이다. 이 원칙은 2006년 퍼셀 대 곤잘레즈(Purcell v. Gonzalez) 사건에서 확립됐다

2004년, 미국 애리조나 주는 유권자 사기를 막겠다며 시민권 증명서 제출과 신분증 제시를 의무화하는 새 법을 만들었다. 이에 대해 원주민 부족과 시민단체들이 "소수자와 저소득층의 투표권을 침해한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2006년 10월 5일, 연방 항소법원은 선거를 한 달 앞두고 이 법의 집행을 중단시켰다.

그러자 애리조나 주는 즉시 대법원에 항고했고, 2006년 10월 20일, 연방대법원은 만장일치로 항소법원의 결정을 뒤집었다. 선거가 코앞인 상황에서 규칙을 바꾸면 더 큰 혼란을 초래한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이렇게 판결했다.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법원 명령, 특히 상충되는 명령은 유권자에게 혼란을 초래하고 투표 참여를 저해할 수 있다. 선거일이 가까울수록 그 위험은 더 커진다."


이 판결의 핵심은 해당 애리조나 주가 새로 시행하려던 선거법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 대법원은 선거 직전에 규칙을 바꾸는 것 자체가 유권자뿐 아니라 선거 관리자에게도 불확실성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선거 관련 규정 자체를 바꾸지 말라고 판결한 것이다. 즉, 사법이 선거에 개입할수록 오히려 혼란을 키울 수 있으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판결한 것이다.

이후 미국 법원들은 이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해 왔다. 선거 임박 시 사법 개입을 자제하는 전통을 정립한 것이다. 선거 과정의 예측 가능성과 제도적 안정이 개별 사건의 정의보다 우선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는 부시-고어 사건과 같은 사법의 정치 개입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의였다.

이 퍼셀 원칙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도 분명하다. 선거가 임박할수록, 사법은 신속함보다 정당성과 안정성, 예측 가능성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으로 정치를 한 대법원

지난 6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경연합뉴스

 

 


부시-고어 판결은 헌법상 선거인단 투표 시한에 따른 헌정 위기 속에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미 대법원은 이 판결이 특수 상황임을 인정해 "현재 상황에만 한정된다"는 단서를 명시했다. 좋은 선례로 인용해서 판결에 사용하지 말라고 명시한 것이다. 이런 예외적 판결임을 무시하고 한국 대법원은 단지 '선거'라는 단어와 '신속 판결'이라는 형식만을 차용해와 9일만의 판결을 합리화하는 판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사례는 진행 중인 대선, 임박한 헌법상 시한, 기준 불일치로 인한 혼란 속에서 결정됐다. 이 경험을 교훈 삼아 미국은 선거 임박 시 사법 개입을 자제하는 원칙을 세웠다. 한국의 경우는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은 단순히 과거 선거 관련 형사 사건에 불과했다. 그것도 선거에서 진 후보의 발언에 대한 형사 기소다. 그 선거법 위반이 지금의 헌정 위기와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3~4일 만의 판결 사례만 차용한 것이다.

대법원이 부시-고어 판결의 적용 법리와 헌정 위기의 정치적 맥락, 이 판결의 향후 위상을 모르고 인용했다면 법리적 무지요, 알고도 했다면 의도적 왜곡이다. 어느 쪽이든 대법원 스스로가 권위를 훼손했다. 외국 법조인들이 이 판결문을 읽는다고 생각해 보라. 우리 대법원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겠는가?

미국은 이후 선거 과정의 예측 가능성과 제도적 안정성을 위해 선거 직전 사법 개입을 자제해왔다. 그러나 이번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사법부가 선거에 개입할 수 있는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일수록 사법은 더 신중해야 한다. 법치는 속도가 아닌 정당성에서 비롯된다. 이제 유권자가 투표로 응답해 바로 잡을 차례다.